미학적 인간

이 세계와 벌이는 시간을 둘러싼 싸움

김남시 2004. 6. 10. 00:37

 이 세상이 점점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속도로 우리에게 온갖 즐길 것과 향수할 것들을 제공하면 할수록, 이 세계가 이전에 비해 점점 더 누릴만하고, 즐길만하며, 볼만하고, 먹을만하며, 향수할 만한 것들로 채워져 갈수록 우린 세상이 점점 더 살만한 곳으로 변해간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은 어쩌면 백년전, 이백년 전의 세상에 비해 사람들에게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제공한다.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티브이, 영화, 라디오, 컴퓨터 등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얼마나 심심하고, 지겹고, 무미하게 시간을 보냈어야만 했던가.

 

그러나, 저 백년, 이백년 전의 세계와 단 한가지 변하지 않은 사실 하나가 우릴 이 풍요로움으로 넘쳐나는 세계 앞에서 불안하게 한다. 곧, 이 세계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모든 것들을 즐기고, 향수하고, 소비하기 위해선 '시간'이, 우리의 삶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한 권의 책, 한 편의 디브이디, 한 장의 시디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향유의 가능성은 전적으로 한권의 책, 한편의 디브이디, 한 장의 시디를 읽고 보고 들을 '시간'을 통해 규정되어 있다.

이 세계를 백년 전의 세계에 비해 훨씬 더 풍요롭게 만든 저 모든 것을 우린 우리 자신의 삶의 시간을 댓가로 치루고서만 즐길 수 있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개씩 쏟아져 나오는 저 수많은 영화, 책, 음악 들 중 과연 몇퍼센트 만큼이나 내가 살아있는 동안 보고, 듣고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이 세계가 제공하는 저 넘쳐나는 풍요로움이 실지로는 이 세계를 즐기고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가능성을 백년전에 비해 그렇게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 세상엔 이미 내가 평생 동안 보아도, 평생 동안 읽어도, 평생 동안 들어도 다 보고, 읽고, 듣지 못할 영화, 책, 음악들로 가득 차 있다!

어렵게 한 권의 책을, 한 장의 음반을, 영화 디브이디나 컴퓨터 게임 씨디롬을 손에 넣고 나서 우리가 느끼는 뿌듯함은 그 모두를 우리가 실지로 즐기고 향수하기 위해 치루어야 할 우리 삶의 시간을 계산에 넣지 않을 동안에만 우릴 만족시킨다. 내 방에 꽂혀있는 수백권의 책을 다 읽기 위해, 내게 주어지는 음반들을 다 듣기 위해, 내가 볼 수 있는 영화들을 다 보기 위해, 내게 가용한 컴퓨터 게임을 다 해보기 위해 얼마 만한 시간이 필요한지를 따져보는 순간, 이 세계의 외관상 풍요로움은 제한된 내 삶의 시간을 상기시키는 불편함으로 변한다. 도서관과 책방에 꽂혀있는 수많은 읽고 싶은 책들, 비디오 가게에 쌓여있는 보고싶은 영화들, 한번씩이라도 꼭 해보고 싶은 넘쳐나는 컴퓨터 게임들은 그리하여 이제 폭발적으로 풍요로와진 이 세계에 비해 내 삶의 시간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를 힘빠지게 깨닫게 만든다.

한 편의 책을 쓰기위해,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한 곡의 음악을 만들기 위해 사람들이 소모했던 시간에 비해 물론 한권의 책을 읽고, 한 편의 영화를 보고, 한 곡의 음악을 듣는 시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다. 우린 몇 년에 걸쳐 쓰여진 책과, 몇년에 걸쳐 만들어진 음악과 영화를 단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에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린 영화와 책,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이들이 그를위해 소모했던 수년의 시간을 압축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이 제한된 우리 삶의 시간에 대한 힘빠지는 깨달음을 위로해주지는 않는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음악을 듣는 것을 내 삶의 시간을 걸고 벌이는 세상과의 싸움이라고 한다면, 난 책을 쓰고, 영화와 음악을 만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시간과 대항하는 1대 수만, 수백만의 가망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어쩌면 내 글을 읽을 사람들의 삶의 시간을 축냄으로써 나의 저 가망없는 싸움을 끌어보려는 반칙행위인지도 모른다.

'미학적 인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과 확신  (0) 2005.11.13
왜 행복을 말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는가  (0) 2005.07.03
끝나지 않는 시간, 끝나지 않는 고통  (0) 2004.03.09
손톱  (0) 2004.02.24
쓰레기를 버리며  (0) 200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