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끝나지 않는 시간, 끝나지 않는 고통

김남시 2004. 3. 9. 08:05
 

새로운 세계를 꿈꾸던 자들은 늘 새로운 시간을 갖고자 했다. 새로운 왕조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간의 출발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된다. 새로운 세계는 결코 이전의 낡은 시간의 유산일 수 없다. 낡은 시간은 낡은 세계를 재생할 뿐이다.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새 시간을 통해 시작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원하는 자들은 그래서 새로운 시간을 꿈꾼다. 우리가 원하는 새 세계는 결코 지금 이 시간의 연장으로부터, 이 시간 속에서 자라나와서는 안된다. 우리가 원하는 새로운 세계는 지금의 이 시간이 완전히 붕괴된 폐허로 부터, 그로부터 생겨날 새로운 토양 위에서 건설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세계는, 결국 고통과 살육을 낳는 지금 이 시간의 재생일 뿐이다.

미래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미래를 희망하는 자는 지금의 시간, 저 끔찍하고도 질긴 이 연속성의 굴레를 깨뜨려야만 한다. 과거가 현재를 낳고, 또 그 과거의 과거가 그 과거를 낳는 이 순환의 굴레 속에선 그리하여, 결코 새로운 시간이 등장할 수 없다. 저 희망의 시간, 메시아의 시간은 현재 시간의 이 끈질긴 인과성의 사슬을 깨고서야 비로소 우리에게 나타난다.

자신의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신의 몸과 함께 버스를, 나이트 클럽과 쇼핑센터를, 시장과 사원을 폭파시키는 저들은 그를통해 이 견디기 힘든 현재의 시간의 태연한 연속성을 함께 폭파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지금의 시간은 저 도저한 흡수력과 세상에 대한 냉정한 무관심으로 치떨리게 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간은 다른 곳에서 자신의 부모와 형제들이 피흘리며 죽어가는 바로 이 순간에 여기 이곳에선 사람들이 장을 보고, 쇼핑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신의 일상을 영위해 나갈 수 있게 한다.

지금의 시간, 저 냉정한, 태연자약한, 우리 인간들에 냉소적이고 무관심한 이 시간은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고통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저 차가운 시간의 품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나이트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의 일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시키며, 이 부조리한 공존을 언제까지나 재생시킨다. 이 시간이 신이라면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죄와 고통에 무관심한, 표정없는 신이다. 그는 이 세계가,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죄악과 살육과 만행을 고스란히 외면하는, 체념의 신이자, 그 속에서 벌어진 죄악과 살육을 심판하려 하지 않는 무책임한 냉소의 신이다.

검은 옷 속에 허리에 감은 폭탄을 감추고 이스라엘의 도심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저 팔레스타인인의 가슴 속에선 저 무차별적인 시간에 대한 분노가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권태와 무관심, 냉소 속에서 잠들어있는 저 신을 흔들어 깨워, 자신의 품 안에 살육에 의한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위되는 일상의 태연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함께 품고있는 저 신의 가슴에 상처를 내어, 이제 저 무관심한, 무책임한 직무유기를 경고하리라. 그를 죽여, 그가 감싸고 있는 이 태연한 일상의 굴레를 깨뜨려 새로운 시간, 그 속에서 생겨나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시간, 살육과 태연한 일상의 평화를 공존시키지 않는 사려깊은 시간, 고통을 끼친 자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정의가 지배되게 하는 우리의 시간을 맞이하리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는 순교자처럼 그는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몸에 감긴 폭탄의 점화 스위치를 눌렀을 것이다.

그의 흩어진 육체와 그와 함께 죽임을 당한 다른 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고통과 살육과 분노와 복수에 무관심한 지금의 시간은, 그를 비웃듯, 조금도 상처입지 않은 채, 태연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는 세상 사람들 앞에 흩어진 살덩이와 피가 흐르는 티브이 화면을 내보내고, 우린 이 뉴스가 끝나고 시작할 드라마와 스포츠를 기다리며 채널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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