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여보세요'의 소멸

김남시 2010. 10. 9. 12:04

4년전인 2006년, 나는 전화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벨이 울린 수화기를 받아들면서 우린 ‘여보세요’ 라고 말한다. 마치 상대를 향해있는 것 같은 이 모호한 언어행위는, 그러나 사실 아직 상대와의 어떤 관계도 맺고있지 않은, 수취인 불명의 발화다. 이 말은 다만 수화기를 들은 내가 ‘지금,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것만을 지시하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시그널이다.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나는 나의 현존을 ‘지시’하며, 내가 ‘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전적으로 나에게만 속하는 그 말은, 내게 전화를 건 모든 가능한 존재자들에게 다만 나의 현존만을 알리는 순수한 주관적 언어다.

 

‘여보세요’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주관적 성격은 그 말을 하는 순간의 내게, 전화기 저쪽의 보이지 않는 상대가 전혀 규정되지 않은 상태라는 데서도 드러난다. 내가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나의 현존과 나의 « 말할수 있음 »을 알리는, 그러나 아직 나의 ‘여보세요’에 응답하지 않는 저 전화기 바깥의 상대는, ‘지금, 거기’에 현존하고 있지 않을 수도, 혹은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는 어쩌면 자동 기계일지도, 외계인 혹은 유령일지도 모른다. 그가 설사, 나처럼 말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가 나의 ‘여보세요’에 아직 반응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떤 육체적 지표를 통해서도 신원확인 되지않는 익명의 대상이다. 그는 ‘여보세요’라는 말을 통해 전달되는 나의 현존만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릴수도, 침묵해 버릴수도, 아니면 버럭 소리를 지를 수도 있다. 이 모든 상대의 반응을 ‘여보세요’를 말하는 순간의 나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다. 나는 ‘여보세요’라고 말하고는, 무력하게 그저 상대의 반응을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아직 반응하기 전의 저 상대는 내게 절대적 ‘타자’다. 그와 나와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은 전적으로 그에게 달려있다.

 

상대가 나의 ‘여보세요’에 언어적으로 반응하는 순간에 비로소, 나의 ‘여보세요’는 구체적인 수취인을 얻는다. 처음엔 전적으로 나의 현존과 말할 수 있음만을 지시하던 주관적 시그널은, 그를통해, 말하는 두 주체 사이의 대화를 선도했던 ‘최초의 호출행위’가 된다. 그 반응을 통해 비로소 나는, 상대가 나와같은 말할 수 있는 존재로 전화기 저 편에 현존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나아가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지인인지 낯선이인지, 내게 호의적인지 공격적인지 등, 그와의 구체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진입하기 위한 나의 모드를 결정한다.

 

전화는 이처럼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에 무규정적 공백의 순간을 만들어내었다. 상대와의 대면적 커뮤니케이션이 그의 육체적 현존을 전제하고 따라서, 그의 육체적 지표 – 성별, 나이, 인종, 친소 여부 등 – 를 통해 알려지는 커뮤니케이션 지평의 선 규정성을 제공해주었다면, 전화는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이전의 선이해의 가능성을 차단시켰다. 그로인해 전화는 마치 준비되지 않은 채 불쑥 맞이해야 하는 낯선 침입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우린 상대가 누군지도 모른채 걸려오는 전화를,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받아야만’ 한다. 장난 및 음란전화, 전화를 통한 무차별 광고 등은 전화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 놓은 저 공백의 순간을 악용하는 사회적 결과물이다. 걸려오는 상대의 전화번호가 찍히는 핸드폰과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는 화상 전화 등은 이를 극복하려는 기술적 시도다.“

 

 

국민 대다수가 발신자 확인기능을 당연한 옵션으로 갖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전화통화에서는, 무규정적 수취인에게 나의 육체적 현존만을 알려주는 저 모호한 말 “여보세요”는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아직도 여기에 익숙해있지 않은 나는 “여보세요”를 아직도 내 전화 커뮤니케이션의 첫 단어로 사용한다. 문제는, 불과 몇년까지만 하더라도 모든 전화 커뮤니케이션의 당당한 첫마디였던 ‘여보세요’가 이제는 내게 전화를 건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기 전에 걸려온 상대방이 누군지 먼저 확인하지 않았다는 데 대해, 내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른채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사람들은 어떤 섭섭함 혹은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며칠전 전화한 선배는 나의 ‘여보세요’에 대해 “내 이름이 핸드폰에 뜨지않냐?”라며 힐난했다. 그에대해 나는, 전화 건 상대를 미리 확인함으로써 나의 ‘여보세요’와 상대의 응답 사이에 놓인 어떤 설레이는 긴장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는 단순한 변명만은 아니었다.

 

발신자 확인 기능이 불과 몇 년 사이 우리의 전화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을 바꾸어버린 이후, 우리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상대방이 내가 누구인지 ‘미리’ 알아서 응대해주기를 원한다. ‘여보세요’의 소멸과 더불어 이제는, 보이지 않는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최초의 목소리만으로 상대방이 누구인지, 그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떠올려야 했을 때의 다차원적 상상과 기억의 과정은 함께 사라져버렸다. 전화가 울림과 동시에 화면에 뜨는 발신자의 이름을 통해 우리의 맘졸임과 설레임 혹은 두려움과 결합되어있던 전화기의 청각적 울림은 디스플레이에 떠오르는 상대 이름의 시각적 기호로 해소되었다. 물론 우리는 이 기능을 통해 하루에도 여러번 우릴 귀찮게 하는 대출, 보험, 인터넷 상품 광고 전화를, 마감 원고를 독촉하는 출판사 편집장의 전화를 미리 ‘차단’할 수 있다. 내게 걸려온 전화의 익명성을 탈각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이러한 차단 효과는 다른 한편, 그 익명성에서 기인하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댓가로 치루고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