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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적"과 "권위주의적"

김남시 2009. 8. 30. 10:03

 

검찰총장 후보로 인선되어 인사 청문회를 받고 있는 김준규의 인터뷰를 보았다.

한나라당 의원이 '그동안의 불법 시위 등으로 인해 실추된 검찰과 국가의 권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류의 질문을 던지자, 김준규 후보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권위주의는 안되지만 권위는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통해 그는 "권위"를 둘러싼, 언어적 영역에서 펼쳐지는 싸움에 아주 중요한 한 발을 내딛었다.

 

'권위'라는 단어 자체는 한국의 민주화 이후 부정적인 함축으로 점유되어,

최대한 '극복'하고, '부정'해야할 어떤 것으로 여겨져왔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에 가장 많이 '부정'되고, '극복'의 대상이었던 것도 이런 '권위적'이란 형용사가

붙을 수 있었던 구조, 조직, 혹은 분위기 등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과 그를 통한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는 사회의 보수주의적 흐름을 강화시켰으며

이들이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점유되었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랜 시간동안 부정적인,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겨져왔던 '권위'를 어떻게 다시 부활시킬 것인가?

여기에 위 김준규의 답변이 갖는, 놀랍고도 뛰어난 언어정치 혹은 정치언어적 전략이 작용한다.

 

그건 부정적으로 점유된 단어를, 그냥 무턱대고 다시 부활시키려는 대신 그것의 부정성을 승인/인정하면서

그것의 긍정성을 부각시키려는 전략이다. '권위'라는 명사에 부착될 수 있는 두가지 형용사 '권위적' 과 '권위주의적'을

구분하는 것은 그 첫번째 수순이다. '권위주의'라는 단어에 '권위'가 갖고있던 부정적 어감, 함축들을 싸잡아 몰아넣고

그와 구분하는 단어 '권위적'이라는 형용사에 구제하고, 회복시키고, 되살리고 싶은 권위를 분리해 담아넣는 것이다.

 

"거짓말"을 '좋은 거짓말'과 '나쁜 거짓말'이라고 구분함으로써 '거짓말'을 구제해내듯

'권위적'을 '권위주의적'과 구분함으로써 '권위'를 구제, 회복하려는 전략...

 

흥미로운 사실은 '권위'라는 단어를 둘러싼 이와 유사한 - 그 방향은 반대인 - '의미전유'의 과정이

독일의 68 시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Franz Schneider (Dienstjubiläum einer Revolte, "1968" und 25 Jahre, Münschen)

에 의하면 '권위 Autorität"라는 단어는 68 이전까지는 사람 혹은 기관이 지니고 있어야 할

어떤 속성 혹은 가치를 함축하는 있었고, 또 그런 점에서 긍정적 가치로 점유되어 있었다. 

문제는 이 명사 '권위'가 예를들어 그런 긍정적인 속성 혹은 자격으로서의 '권위가 있는'이라는

중립적 의미를 드러낼 형용사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68의 자유주의적, 기존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 분위기는 이 '권위'라는 단어의 형용사 "autoritative" 혹은

 "autoritär" 라는 단어를, 권위에 대한 비판적 의미로 전유해 사용하였다. 곧, 중립적으로 "권위가 있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적인 방식으로 근거지워지지 못한 정당하지 못한 권위를 주장하고 내세우는"이라는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이 '권위'라는 단어의 긍정적 함축까지 부정적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를 생각해보면 이제 김준규의 답변이 지닌 전략적 측면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권위주의적" 이라는 단어가 그동안 "권위"에 부과된 부정적이고 흉축한 몰골을 뒤집어쓰고 폐기되어 가는 사이에,

이제 말끔하게 단장을 한 "권위적"이라는 형용사는 '권위'의 부활을 위한 도정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