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강연 또는 발표엔 늘 미리 발표 원고를 나누어준다. 난 독일에 있을 때 학생들의 ‚발표‘가 아니라, 강연시에 그러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발표 원고를 미리 나누어주면, 사람들은 연사가 ‚구술적 연행‘을 통해 이야기할 내용을 미리 ‚알아버릴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의 구술적 연설을, 쓰여진 텍스트의 언어적 재생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해진다. 물론 연사의 연설은,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는, 미리 준비된 텍스트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논문이나 글을 읽는 것과는 달리, 누군가의 강연을 들을 때 우리는 쓰여진, 익명적인 문자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그의 목소리와 그의 육체의 현존에서 등장하는 ‚말‘을 듣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말의 1차적인 특성은, 그것이 ‚시간적‘이라는 것이다.
텍스트가 동일 공간에 말들을 한꺼번에 모두 다‘내뱉어‘ 배열해 놓았다면, 그래서 그를 읽는 사람은 임의로 어떤 곳은 뛰어넘고, 어떤 곳엔 집중할 수 있다면,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술적 말은 그렇지 못하다. 우린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으며, 그의 말을 빨리 돌릴 수도 없고, 그 말의 ‚뒷부분‘을 미리 읽어볼 수도 없다. 우린 그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그의 말을 ‚시간 속에서‘ 들어야 한다. 누군가의 강연을 직접 듣는다는 것은 이처럼 먼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안다.
원고를 미리 나누어주고, 듣는 사람이 이미 그를 다 임의의 순서대로, 강연자가 말하는 속도와 시간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임의의 속도대로 읽을 수 있는 관객에게 강연자의 말은 그것의 자발성과 즉흥성이라는 성격을 상실하고, 쓰여진 텍스트의 ‚재생‘이라는 성격만으로 환원된다. 강연자는, 아직 말 속에 등장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것의 등장의 긴장감을 고조시킬 수 있을 극적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다. 발표 원고를 미리 나누어주어야 하는 강연은 그것이 지닌 수행적 성격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국에선, 이런 방식의 강연 문화가 정착되었을까? 왜 여기에선 말하는 자의 수행적 자유가 쓰여진 텍스트의 언어적 재생으로 국한되어 버리는 것일까? 쓰여지지 않은 말이 그 자체로 어떤 자립적 신뢰성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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