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인간

책과 삶의 시간

김남시 2010. 2. 25. 01:12

 

거의 10년 이상 처박혀 있었던 책들을 버릴 것과 책장에 꽂아두고 보관할 것으로 분류하면서 나는 나의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읽혀지지도 않은 채 버려질 책들을 고르는 내가,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대인들을 한 번 훝어본 후 곧바로 가스실로 보낼 것인지 일하는 노동 캠프로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는 독일군 장교가 된 기분이었다. 그 행위에서 우릴 경악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순간적이고 또 즉흥적인 판단에 의해 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해야 했던, 그에게 제도적으로 부과된 거의 신과도 같은 권능이었다면, 10년 이상, 처음에 나에 의해 구입되어, 내가 살던 공간에 보관되어왔던 책들에게 그렇게 짧은 순간에 즉흥적인 판단에 의해 폐기 선고를 내려야 했던 내게도 그에게 못지않은 어떤 커다란, 하지만 나의 실질적인 본질에 걸맞지 않는 그 권능이 부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난 짧은 시간의 판단을 통해 이 책은,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결코 읽지 않게 될 것이라며 판결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결코 읽지 않게 될 것’이라는 이 판결에는 오랜 세월동안 그 책이 내게 가지고 있었던 어떤 의미가 변화되었다는 사실만 전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나의 „앞으로의 삶의 시간“에 대한 어떤 암묵적 판정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 책을 처분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내게 그 책까지 읽을 삶의 시간이 그만큼 넉넉하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그래서 나는 내가 읽을 책들을, 그것의 내용과 중요성에서 뿐만 아니라, 이제 그를 읽을 내 삶의 시간을 고려해 더 주의깊게 선별하고 한계지워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의 내가 이 책을 읽기위해 구입했었을 땐 아직 내게 남아있던 삶의 시간이, 이제 그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고 판단하는 현재의 나에게는 없다. 그렇기에 사 놓았으나 읽지 못했던 책을 솎아내는 작업은 그만큼 짧아져 버린 자신의 삶의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우리의 삶의 시간을 탐낸다. 우리가 구입한 책은 하나의 물건이지만 그걸 손에 들고 있다고 해서 우린 그걸 온전히 가지지 못한다. 책은 우리의 값비싼 삶의 시간을 지불해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는 콧대 높은 여인이다.

 

쇼펜하우어는,

"책들을 사면서 그 책들을 읽을 시간도 같이 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책을 사는 것을 그 책의 내용을 전유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Parerga und Paralipomena. Kleine philosophische Schriften, Bd. II, S. 608)고 말한다.

 

돈을 주고 책을 구입하고서 그것을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착각은, 돈을 주고 구입한 하룻밤을 사랑이라 믿는 것만큼이나 허망하다. 하지만, 제한된 삶의 시간 속에 있는 우리는 그런 착각없이는 살아가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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