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말과 사물

김남시 2001. 12. 2. 00:46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지금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가 이제 막 태어난 저 존재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지니고 다닐 이름을 난 함부로 지을수 없다. 이름이 부르기 쉽고, 우스꽝스럽지 않으며, 기억하기 좋게, 예쁘게 울려야 한다는 실용적 목적 외에도, 그 이름은 좀더 깊은 근거 위에서 지어져야 할것이다. 그 이름으로 저 존재가 계속 불려질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통해 어쩌면 저 아이가 ‚규정’될 그 이름이, 아무렇게나 선택된 음절들로 이루어져서야 되겠는가. 그 이름은 저 아이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최소한 저 아이의 존재 자체의 규정으로부터 자라나온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할수도 있다. 이름은 그저 이름일 뿐이다. 저 아이가 ‚철수’라 불리건 ‚영수’라 불리건, 중요한 것은 그 아이 자체이지, 이름이 아니다. 이름은 그저 저 아이를 다른 아이와 구별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붙여지는 ‚분류기호’같은 것이다. 위에서 말한 몇몇 실용적 목적만 고려하면, 이름이야 어떻게 붙여지건 상관없다. 중요한건 저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지, 어떻게, 어떤 이름으로 불릴것인가는 아니지 않는가.

이 두 상반되는 생각은 중요한 철학적 대립을 반영하고있다.

첫번째 입장은 ‚말’혹은 ‚이름’이 그것으로 지칭되는 ‚사물 혹은 사태’와 분리될 수 없이, 본질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라고 여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자면 존재의 이름은 자의적으로 붙여진 지칭(REFERENCE)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의 스스로 드러냄(SICH ZEIGEN)이다. 이름은 그 존재의 요구에 의해, 그 존재의 본질을 드러냄으로써 그 존재와 동일시된다.

신의 이름 ‚여호와’는 결코 다른 이름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건 신의 존재가 아닌, 다른 것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특정한 이름으로 부른다는 건,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사물과 사태로부터 구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난 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를, 그 존재를 나를 통해 다시 한번 이 세상에 호출해내는 것이다. 책상이 ‚책상’이라 불리는 것은, 그것이 ‚의자’나 ‚가방’이 아닌 ‚책상’이라 불릴만한 필연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입장에 의하면 이름(단어)는 사물이나 사태에 자의적으로 붙여져, 사물과 다만 지칭 관계만을 갖는 약속된 기호체계에 다름 아니다. 그에 의하면, 만일 책상을 우리가 ‚의자’라 부르기로 하고 그렇게 했다면, 책상은 오늘날 ‚의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름이나 단어는 그저 인간들 상호간에 소통을 위해 우리가 임의적으로 제정한 하나의 약속에 불과하다. 내가 그를 ‚책상’이라 부르건 ‚의자’라 부르건 간에, 어차피 내가 ‚그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너와 내가 이해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 두 입장은 또한 매력적인 선역사적 시나리오를 통해 다음과 같이 관계 맺기도 한다.

바벨탑 이전의 모든 인간들은 하나의 공통된 근원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 언어는 모든 인간들을 아무 제한없이 서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 사태들과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사물(사태)와 언어는 아무 갈등없이 서로 본질적으로 밀착되어 있어, 그 언어를 통해 사물과 사태의 의미는 모든 인간들에게 투명하게 알려질 수 있었다. 다시말해, 모든 사물들은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의미를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의 단어는 그를 통해 표현하려는 사태를 ‚부족하지도, 넘쳐나지도 않게’드러냄으로 해서, 말을 통해 자신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거나, 모호하고 불분명한 언어로 인한 오해와 불화도 생겨날 수 없었다.

만물의 창조와 더불어 신에의해 붙여진 그 만물의 이름들은 이를통해 모든 만물과 인간들 상호간의 조화롭고 완전한 상호이해를, 나아가 신과 인간간의 갈등없는 관계를 보증해주고 있었다.

오! 죄많은 인간이여.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은, 서로 하늘에 오르겠다고 다투다 신의 노여움을 사, 저 행복했던 아담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쫓겨나게 된다. 이제 인간들은 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해야 했으며, 사물들은 단어들과의 조화롭고 완전한 관계를 상실, 이제 말은 사물의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불완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타인의 말은 이제 무수한 지칭과 지시관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힘겨운 ‚해석작업’을 통해서만 겨우 그 의미를 이해할수 있는 불투명한 암호로 변해버리고, 모든 인간은 그런 불충분한 언어를 통해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 자신을 타인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말을 통해 사물이 자신의 의미를 투명하게 드러내지 못함으로해서, 세계는 이제, 인간이 억지로 뜯고, 자르고, 헤쳐보아야 겨우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는 수수께끼로 가득찬 미궁으로 변하고, 인간은 저 불완전한 언어를 도구로 겨우 겨우 소통하며 살아갈수 밖에 없게 되었다. 신은 더 이상 자신이 저주내린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말을 걸지 않으며, 그리하여 이제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신에게 다가가려는 인간은 난해하고 힘든 우회로를 힘겹게 극복해야만 한다.


단어-사물 사이의 본질적이고 필연적 연관이 있다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한 사람이기가 쉽다. 그는 누군가의 말의 진정성을 그 말로 드러나는 사물 혹은 사태의 진정성에서 찾으며, 머리 속에 떠오른 불길한 생각을 좀처럼 입밖에 내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사태가 그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고 (혹은 그 반대로) 주장하는 „거짓“ 말의 가능성을 원리적으로 믿지 않는다. 말이 사물과 사태에 필연적으로 묶여있는 한, „어제는 비가왔다“는 말은 실지로 어제 비가 왔기 때문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그는 ‚너는 바보야!’라는 상대방의 욕설을 그저 화나서 내뱉은 말일 뿐이라고 여기지 못한다. 그 자신이 정말 바보가 아니라면 그 말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사태 그 자체이지 말 혹은 말의 기술은 아니라고 여겨, 변명보다는, „진실이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며 침묵하는 쪽을 택한다. 인간관계를 매끄럽게 만들 수사학적 기교들을 불신하는 그는, 마음에 없는 찬사나 칭찬을 하지못하며, 그로인해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따돌림당하기 쉽다.

반면, 타인의 욕설이나 저주를 비교적 쉽게 받아넘길 수 있는 사람은, 말이 그저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세계와 짝맞추어진 기호에 불과하다고 믿는 사람이기 쉽다. 그는 중국어의 특정 발음이 한국어의 욕설과 유사하다는 사실을 통해 그에 대한 욕설이 칭찬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동일한 사태를 좀더 멋지게 표현해내는 문학적, 수사학적 기교에 관심이 많으며, 잘된 번역이라면 원전 못지않게 그 의미를 충실히 전달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물체는 낙하한다“는 문장이 „잘 있거라, 더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라는 문장과 그 가치면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건조하게 표현된 공식보다 알기쉽게 그려진 만화 한편이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을 갚는다’를 신조로 삼는 그는 찬사와 칭찬에 인색하지 않으며, 별다른 부담감없이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말들을 할 수 있음으로 해서(어차피‚말’뿐 이니까!) 대부분의 인간관계에서 성공적이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