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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로 말하는 이유 1

김남시 2001. 5. 20. 03:47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째서 저희에게 늘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태 13장 10-16)

1. 성경 속의 메타포

성경은 훌륭한 메타포들의 보고다. 첫 등장에서부터 예수는 놀랄만한 문학적 재능을 발휘 당시 사람들에겐 새롭고 생경한 가르침이었던 자신의 말에 메타포를 통한 설득력을 부여하였다. 성경에 등장한 저 유명
한 메타포들 -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이는 내 피와 살이요'. '물과 함께 아이도 내다 버리는' 등 - 은 이후 많은 저술가들에게도 즐겨 인용되었다.

천국은 다음과 같은 메타포로 이야기된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고,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며,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마태 13장)

곧, 천국 = 밭에 감추인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이다.

2. 메타포와 형상숭배 금지

서양 사상사에서 최초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메타포(Metaphor)를 "비교(analogie)를 통하여 어떤 것에 다
른 것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시학 457b)이라 정의하였다. 서로 다른 두 대상 사이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유사성을 관련시켜 표현함으로써 메타포는 말과 연설에 놀라운 효과를 불어넣는다. 남을 설득시킬 수 있
는 연설의 기술이 없어서는 안될 정치적 수단이었던 고대 폴리스에서 메타포는 따라서 매우 중요한 수사
학 기술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메타포는 소위 진지한 철학의 영역 속에선 늘 배제되어 왔다. 그것은 메타포가 결국
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불충분한 모사나 허위적 모방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
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천국)을 그와 유사성을 갖는 다른 어떤 것(밭에 감추인 보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을 통해 표현하는 메타포는 이를 통해 비교되는 두 대상을 동일시 해버릴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

경험할 수 없는 '천국'을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같은 것'이라 말하면서도 예수는 바로 이 점을 우려하였다. '밭에 감추어진 보화'는 저 풍요롭고 풍부한 천국의 극히 작은 일면만을 그저 빗대어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천국은 당연하게도 밭에 감추어진 보화 보다 훨씬 '더 좋고, 더 풍요롭고, 더 훌륭한', '더 큰 것'이다. 그럼에도 무지한 무리들이 하느님의 나라 천국을 그저 한갖 '밭에 감추어진 보화'와 동일시해 버린다면? 이런 우려에서 예수는 자신의 메타포에 명확한 한계를 설정하려 한다. 메타포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복 없는 자들'을 위해 고안된 교육적 수단일 뿐이다.

이처럼 예수가 최초로 '형상(메타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이후, 메타포 및 형상에 대한 저주는 계속 되었다. 메타포는 결코 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진리와 동일시되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교육적 목적에서 저 진리의 겉 모습만을 유사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회화가 색과 선을 수단으로 갖는다면, 메타포는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대상을 모사하는, 말하자면 대상의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 '모사는 하나의 쌍둥이거나 차라리 그 모델의 불구자 동생이다. 한마디로 형상을 만드는 일의 '부가가치'는 통하지 않는다.' - 저 이미지는 어떤 경우에도 그것의 진짜 대상보다 더 아름답거나 더 훌륭한 것일 수 없다. 메타포로 표현된 천국은 어떤 경우에도 천국 자체의 아름다움과 숭고함과 동일시되어선 안된다.

이런 점에서 메타포는 저 교부 신학자들에게 성상 및 형상들과 같이 진리를 사칭하는 거짓말에 다름 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그러한 형상들로 인해 진리에 대해 눈이 멀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신을 직접 인식할 수 없는 유한한 인간 존재에게 신을 알리기 위해선 비교 및 메타포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메타포와 형상은 우리에게 불가결하다. 그러나, 이를통해 우리가 얻은 메타포적 지식을 곧바로 신의 직접적 속성과 혼동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우린 진리를 얻는 대신 미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그 후 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수와 신의 형상에 대한 집요한 파괴와 저주의 역사는 바로 이로부터 연유하였다.

3. 서양 철학사에서 메타포

이러한 가르침을 기반으로 성장한 서양 철학사 속에서 메타포는, 정작 교회에선 성상이 부활된 뒤에도
계속 여전히 믿지 못할 거짓 가르침 혹은 기만이라는 저주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디드로는 철학적 표현 방
식에 대해 말하면서 메타포의 기초가 되는 '비교'가 이성적 능력의 소산이 아니며 따라서, 비 학문적인 것
이라 말한다.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메타포에 근거한 사유는 셀 수 없는 불합리 속에서 헤매이는 것이
며, 그 귀결은 논쟁과 혼란 아니면 경멸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경험주의적 전통 속에서 록크 역시 메타포
를 '잘못된 사유를 불러일으키고 감정을 자극함으로써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메타포는 시나 수사학의 도구는 될 수 있을지언정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의 도구일 수는 없다. '메타포적 언어로 표현된 철학의 모든 이론은 참된 진리가 아니라 반짝거리는 몇 마디 공허한 말로 치장된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었다.

진리가 그를 가리고 있는 모든 불필요한 장식과 감성적 찌꺼기들을 벗어 던진 명료하면서도 분명한 것이
라면, 이를 표현하는 언어는 주어진 세계의 궁극적 상태를 그 정확함과 명료함 속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언어는 우리의 논리적 사유를 투명하고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며, 거기엔 우
릴 혼동과 오류에 빠지게 할 어떠한 감정적, 감성적 요소도 담겨있어선 안될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감각적, 감성적 판단이 우리를 속이고 기만하는 한, 그것은 저 이성적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판단으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저 순수하게 개념적이고 이성적인 언어로 구성되는 철학적 진리의 모델을 세웠고, 그 후 철학자들은 그 모델을 쫓았다.

칸트는 가능한 경험의 직관 대상들과 순수한 오성 및 이성개념을 구분하면서, 이성 개념들인 이념은 그
에 상응하는 어떠한 직관도 가질 수 없기에 메타포나 실례를 통해 설명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천국은
이성적으로만, 순전히 반성의 형식을 통해서만 사유될 수 있을 뿐 결코 경험적으로 지시될 수 없는 이념이다. 우린 '이것이 '새'이고 '저것이 '나무'야'라고 가르쳐 보여주듯 '이것이 '천국'이야'라고 가리켜 보여줄 수 없다. '천국'이 그에 상응하는 경험적 직관 대상들을 갖는다면 그건 더 이상 천국이 아닐 것이다.

예수는 메타포를 통해 - 천국은 '고기들이 모이게 한 그물'과 같고, '여자가 자루에 담아놓은 누룩'과 같다 - 저 추상적인 천국의 이념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려 하지만 그러나, 그를 통해 지시된 것은 몇 개의 경험적 대상과 사건들일 뿐 결코 이념으로서의 천국 그 자체는 아니다.

헤겔에 의해 드디어 이러한 메타포적 사유와 개념적, 철학적 사유 사이에 하나의 위계질서가 세워지게
된다. 그는, 메타포적 사유로 특징 지워지는 '신화(신화적 사유)'는 사유가 감성적 질곡으로부터 아직 완
전히 해방되지 않은 단계로, 개념이 성장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개념적, 철학적 사유에로 이행하게 될 진
리의 전 단계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4. 신화에서 로고스로의 이행

메타포적, 신화적 사유를 개념적, 철학적 사유로 발전해 나갈 전 단계라는 헤겔의 생각은 실상 진리의 일
면을 표현하고 있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저 신화적, 메타포적 세계로부터 출발한 서양 사상은 시간
을 거치면서 점차 그와는 이질적인 추상적, 개념적 사유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호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저 근원적으로 메타포적인 신화적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들의
외양, 성격, 행동하는 모습들은 설명되거나 서술되는 것이 아니라 늘 비유적으로 묘사된다. 모든 인물들은
언제나 그를 묘사하는 하나의 메타포적 형용어구와 함께 등장한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아침의 빵
과 같은 레메디오스!'

저 신화의 세계 속에서 사물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말하는 사람 혹은 창조주에게 의존되어 있지 않았다. 성서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정점과 교훈과 목적을 위해 '구성'되어 있다면, 신화의 이야기들은 그저 다양한 신들과 인간들이 별 생각없이 벌이는 사건들로 '나열'되어 있다. 저 올림프스 산의 신들은 때론 무료함에서, 때론 자신도 이기지 못한 격정에서 '사고를 치며', 그를 수습하기 위해 변신하거나 남을 변신시킨다. 그들에겐 세계가 그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목표도, 최후의 심판도 없으며, 태양신 아폴로의 황금 마차가 매일같이 새벽의 장막을 걷고 황도 12궁을 운행하듯 하루하루를 살아나간다.

인물들은 고뇌하고 번민하기보다는 '매일 아침 그것이 마치 그들의 삶의 첫날인 것처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나 행동한다. 그들의 감정은 강렬하나 단순하며 즉각 표현된다.'

신화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하나의
현상을 그 원인과 법칙을 통해 설명하는 대신에 유래와 변천에 대해 말하며, 규칙과 일반화에 관심을 두는
대신 개별자와 특별한 사건들에 관심을 둔다. 근거와 근거정립 대신 예전과 그후에 대해 말하며 논리적,
인과적 규범적 관련들을 엄밀히 구분하는 대신 서로 섞어놓는다.'

서로 낯선 것들 사이에서 근친성을, 서로 멀리 떨어져있는 것 사이에서 서로 공유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내려 하는 유비적 사고는 그리하여 이러한 신화적 세계의 특징을 이룬다. 메타포적 사유는 세계에 존재하
고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커다란 연속성 상에 있음을, 그리하여 모든 것들이 다른 모든 것들과 '관
계 맺고' 모든 것들이 다른 모든 것들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하는 확신으로부터 개념적 사유와는 전혀 다른
신화적 인과성을 추구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상 서로 본질상 관계 맺고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스콜라 철학자 텔레시오는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이 결국은 그것과 '하나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이는 중세의 신비주의 사상의 기초를 이루는 세계관이었다.

'시간의 기원, 세계 창조와 함께 시작되어 최후의 심판일, 그와 함께 세계가 종말을 고하는 것과 함께 끝나는 저 성서의 시간 속에선,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세계에 관해서 알려진 모든 것은 신의 계획 속의한 요소로서 이러한 연속 속에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안되며', 따라서 개개의 사건들은 모두 이전에 일어난 사건 혹은 이후에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건과의 '인과적 관련성'에 따라 설명되어야 했다.

저 낯선 세계를 정복하고 인간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저 세계로부터 떼어놓고, 객관화하는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했다. 그를 위해 인간은 저 혼돈스럽게 서로 얽혀있던 카오스적 세계를 구분하고, 이름 붙이고, 분류하여야 했으며, 그로부터 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추상적 법칙을 도출해내어야 했다.

이를 통해 세계는 인간 존재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법칙을 가지고 운동하는 '낯선 무엇인가'가 되어버렸고, 인간은 그 세계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참고문헌

Hans Blumenberg, Paradigmen zu einer Metaphorologie
Emil Angehrn, Die Ueberwindung des Chaos
Encyclopedia of Aesthetics
Historisches Woerterbuch der Philosophie
에리히 에우얼 바하 , 미메시스
카시러,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레지스 드브레, 이미지의 삶과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