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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로 말하는 이유 2 : 메타포적 인식론

김남시 2001. 6. 15. 00:44

1. 은유적 세계상

지금까지 우리가 전혀 본 적 없는 어떤 것을 우린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는가? 그건 우리에게 낯선 그 대상을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다른 대상과 관계시킴으로써(메타포)이다. UFO를 처음 본 사람은 그 모양이 마치 '날아다니는 팬케이크' 같다고 표현할 것이다. 비행기를 처음 본 원시부족들은 그를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거대한 새'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했을 것이다.

또한 메타포는 인간이 원천적으로 경험을 통해 지각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도 사용 되었다. '전체로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욕구, 우리의 위치를 정립하고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인간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 전체나 우주, 진리 등 결코 체험될 수 없고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를 인식하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경험될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은 여러 형상과 다양한 메타포를 통해 설명되고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세계를 '거인들 혹은 거대한 거북의 등위에 떠있는 원판' 혹은, '얼싸안고 있던 두 신이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져 생긴 것'으로 설명하거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 혹은 '정교하게 작동하는 시계장치'등으로 이해하는 표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은유적 세계상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적 사태들을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총체성 자체를 그려내려고 하며 그를 통해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게 한다.

한스 부르멘베르크에 의해 '절대적 메타포'라 불린 이러한 은유적 세계상들은 그러나, 세계의 총체성에 대한 우리의 앎과 지식을 규정하는 이론적 기능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가 등을 규정하는 실천적 기능을 갖는다.

2. 절대적 메타포

1) 세계, 우주의 메타포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위계적 우주관과 결합한 신학적 세계상은, 우주의 외부 어딘가에 자리잡은 창조주에 의해 끊임없이 움직여지는 구체의 우주를 상상해냈다. 인간과 생물을 비롯한 우주 만물은 저 신의 영역에 가깝고 먼 정도에 따른 존재론적 위계 질서에 따라 구성되어 있었다.

지상의 모든 요소는 원래 그 본연의 장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불은 공기와 더불어 우주의 위쪽으로 향하고, 흙과 물은 그로부터 멀어져 하강한다. 이 중 흙이 가장 신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가장 불완전하며, 불이 가장 고귀한 요소이다. 신의 영역에 속하는 천체가 영원 불멸하며 완전한 원 운동을 하는데 반해, 지상의 모든 것들은 시작과 종말이 있는 직선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천구의 운동을 통해 증명되는 신(토마스 아퀴나스)이 끊임없이 이 우주에 운동을 가하고 있음으로 인해 세계엔 변함없고 믿을만한 질서와 자연법칙이 부여되며, 인간의 삶 역시 그 질서와 법칙에 부합되도록 이끌려져야 했다.

신학적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는 새롭게 출현한 우주에 대한 메타포 속에서 감지될 수 있었다. 역학과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기계식 시계의 모델을 사람들은 우주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천체의 움직임이 시계처럼 균등한가 아닌가를 논증하는 글을 썼던 니콜 오레스메(1323-82)는, 불균등성과 비이성적 배분은 우주의 조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우주는 시계처럼 균등하게 운동하는 정밀한 기계라고 주장하였다. 로버트 보일(1627-91)은 신의 존재가 기적보다는 세상의 절묘한 구조와 균형에 의해 곧, 불규칙성보다는 규칙성에 의해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우주는 스스로의 자율을 획득한 시계와 같다고 말한다.

"우주는...시계와 같다. 시계의 모든 부품들은 절묘하게 고안되어 있어서 엔진을 일단 움직여 놓으면 그 나머지 것들은 장인의 원래 디자인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다. 또 시계의 움직임은 장인이나 장인이 지정한 지능적인 작동요인의 특별한 간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신의 개입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질서를 갖는 세계와 제 스스로의 규칙에 따라 지속적인 간섭 없이도 굴러나가는 시계와 같은 세계 속에서 인간들의 삶의 태도는 현격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가 제 스스로의 법칙과 작동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면 이제 인간은 어떤 죄의식 없이 그 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이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이와 유사한 메타포적 세계상의 변화를 부르멘베르크는 스토아주의자와 에피쿠르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찾고 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세계를 범신론적 질서에 기초되어 있는 조화로운 '코스모스'로 보고, 그 물리적 세계 전체를 '보석들이 아름답게 짜여져 있는 조직체' 같은 것으로 보았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저 아름다운 세계-보석 조직체를 경탄스럽게 바라보고 그 배후의 질서를 내면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반해 원자론자들인 에피쿠르스주의자들에게 있어 세계는 빈 공간 사이를 운동하며 그들끼리 결합했다 분리했다 하는 무한한 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있다. 스토아주의자들의 자연이 범신론적 질서와 조화가 표현된 것이었다면, 이들에게 자연은 그 자체로 무가치하고 무차별적이다. 세계는 신적인 것도 창조되어진 것도 아니며, 다만 물리적 의미에서의 자연적인 것일 뿐이다. 세계가 그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적인 것이라면,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가 존재하는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스토아주의자들에게서 세계가 경탄스러운 성찰의 대상이었다면, 이들에게서 세계는 그에 대해 전념할 필요가 없는 다만 무관심하게 대해야 하는 그런 것이다.

#3

이전까지 신의 창조에 대한 무분별한 범접이라고 여겨져 금지되어왔던 자연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르네상스기를 전후하여 가능케 된 배후에는 '이 세계가 신에 의해 쓰여진 책'이라는 메타포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세 철학자 쿠자누스에게 있어 자연이란 단지 신적 존재와 신적 능력의 반영일 뿐 아니라 신이 직접 쓴 책을 의미한다. 그 자연이라는 '책'은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에게서처럼 그 의미가 단지 주관적 정서나 신비적 예감으로는 알아낼 수 없고, 단지 연구되고 파헤쳐져야만 해독이 가능하다. '인식함'이란 다름 아닌 자연에 드러난 신의 글을 읽는 것이다.

창조주 신은 이처럼 바로 그가 창조한 자연, 정확히 말해 자연법칙 속에 창조의 섭리와 비밀, 신적 질서와 예견의 가능성을 '적어 놓았'으며, 그것의 의미는 더 이상 단순히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논리적 의미로 사유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경험적 탐구를 통해 그 이성적 근거를 규명해내는 작업은 신이 쓴 책으로서의 자연 속에서 그 신의 '설계'를 파악해내는 일로 정당화된다.

2) 진리의 메타포

서양 사유의 역사상 가장 먼저 등장한 진리에 대한 메타포는 아마도 '빛'일 것이다. 신 플라톤 주의의 원천을 제공한 플로티누스에 의해 이 세계에 저 절대적 일자로부터 유출되는 빛에의 참여 정도를 통한 위계적 존재론이 설정된 이래, 빛은 진리를 대변하는 메타포로 꾸준히 기능 해 왔다. 그 자체로 빛을 발할 뿐 아니라, 다른 대상까지도 비추어 밝혀주는 저 빛이 갖는 속성은, 그 스스로 위대하고 가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대상들을 그의 은총을 통해 가치 있게 만드는 신적 진리의 표상을 위해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진리의 메타포를 제공해주었다.

빛으로서의 진리는 그 광휘의 힘에 의해 세계의 어두움을 불식시키고, 몽매한 이교도들이 찬란한 진리의 눈부심에 스스로를 개종시키듯 우리의 이성을 밝게 밝혀줄 것이었다. 저 찬란한 빛으로서의 진리는 진리를 외면하려는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인간과 세계 전체를 밝게 비추어 줄 것이었다. 인간은 그저 만물을 사랑하시는 신이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은총과 같은 '진리의 빛'이 언젠가 자신과 세계 전체를 구원해줄 확신을 갖고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빛으로서의 진리' 메타포는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서서히 새로운 메타포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 시대에 진리는 이전 시대처럼 '스스로를 열어 보이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점차 인식적 수단과 도구들을 통해 붙들어야 하는, 그것도 온갖 '오류와 어려움'에 대한 싸움을 통해 힘들게 획득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데카르트가 진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명석하고 판명한 표상'을 제시하고, 그를 통해 온갖 오류와 착각들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에게 진리는 더 이상 스스로를 열어 보이는 수월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진리는 오히려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면서 힘겹게 얻어지는 것이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재판 서문에서 근대의 자연 과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성은 한쪽 손엔 그에 일치하는 현상들만이 법칙으로 타당할 수 있게 하는 원리들을 가지고 다른 한 손엔 저 원리들에 따라 고안된 실험을 가지고 자연으로 향해야 한다. 그건 물론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 이긴 하지만 그것은 선생이 원하는 모든 것을 암송하는 학생의 자질로서가 아니라, 그가 제기하는 질문에 답변하도록 증인에게 강제하는 임명된 심문관의 자질로서 자연에로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리는 온갖 수단과 책략, 나아가 강제를 통한 심문을 통해서만 어렵사리 스스로를 내보이는 '고집스러운 증인'으로 등장한다.

3. 메타포의 실천적 기능

우주나 진리에 대한 서로 다른 메타포는 우주나 진리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과 태도를 반영하며 나아가 그러한 입장과 태도로 사람들을 정향시킨다. '신이 쓴 책'의 메타포는 '신에 의해 창조된 불가침의 영역'으로서의 세계에서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태도를 부츠기고 발양시킬 것이다. '강제해야 하는 증인으로서의 진리'는 '빛으로서의 진리' 메타포와는 다른 진리에 대한 태도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G. Lakoff와 M.Johnson은 Metphors We live by {삶으로서의 은유} (서광사) 에서 우리의 일상적 언어사용의 구조가 그 본성에 있어 메타포적이며, 나아가 메타포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경험하는 개념체계를 변화시킴으로써 우리의 지각과 행동까지 변화시키는 실천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자신의 주장을 '방어'하고 타인의 논증을 '공격'하며, 논쟁에서 '이기다' 등의 일상 언어표현 속에는 '논쟁은 전쟁'이라는 익숙한 메타포가 반영되어 있으며 이것이 논쟁 활동에 있어 우리의 행동 방식을 구조화한다. "우리는 논쟁 상대자를 적수로 본다. 우리는 그의 입장을 공격하고, 우리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며, 진지를 빼앗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한다. 우리는 전략들을 설계하고 사용한다. 어떤 입장을 방어할 수 없음을 알게되면, 우리는 그 입장을 포기하고 새로운 공격선을 취할 수도 있다." 논쟁과 전쟁은 기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사물이며, 거기에서 수행되는 행위들도 다른 종류의 행위들이다.

그러나, '논쟁은 전쟁'의 메타포를 통해 논쟁은 '전쟁'의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구조화되고 이해되고 수행되고 말해지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시간은 돈'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우리는 시간을 '돈'의 관점에서 구조화시켜 경험하고 말하며 행동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 자원'이며, 따라서 '아끼거나 낭비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유익하게 쓰거나 무용하게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투자되거나 소모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논쟁은 함께 산에 오르기'라는 메타포가 우리 문화 속에서 정합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논쟁을 '전쟁'과는 다른 관점에서 구조화할 것이며 그를통해 논쟁을 수행하는 우리의 행동 방식은 달라질 것이다. '시간은 돈' 대신 '시간은 애완동물'이라는 메타포는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킬 것이다. 새로운 메타포는 그와 연관된 우리의 경험과 실재(이 경우엔 논쟁과 시간)를 그 메타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게 할 것이며, 그를 통해 지금까지 주목되지 못했던 대상의 새로운 측면을 부각시킬 것이다.

"새로운 은유에는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어떤 은유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생길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의 관점에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욱 심오한 실재가 된다. 하나의 새로운 은유가 우리의 행동의 근거가 되는 개념체계 안에 들어오면, 그 은유는 그 개념 체계뿐만 아니라 그 개념체계가 만들어내는 지각과 행동도 변화시킬 것이다."

참고문헌

Hans Blumenberg, Paradigmen zu einer Metaphorologie

레이코프, 존슨, 삶으로서의 은유 (서광사)

시간의 문화사

카시러,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에디트 위제 외, 갈릴레오 이전 사람들은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가 (이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