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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어떻게 하나의 믿음에 도달하는가? : 비트겐스타인과 믿음의 체계

김남시 2001. 9. 11. 05:10
난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다. 혹은 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 난 그걸 어떻게 아는가?

우선, 난 믿을만한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배웠으며, 신뢰할만한 책(교과서)과 다른 매체들을 통하여 또한 그 사실을 확인 받았다. 내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사람들, 예컨대 선생님들이 내게 집단적으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내가 읽은 책 혹은 다른 매체들이 모두 그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말이 최소한 거짓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지구가 편편하다고 믿었던 옛날과는 달리 직접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에 나가 지구를 본 사람들이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으며, 그를 입증할만한 사진들도 찍었다. 그들의 말과 사진들은 신뢰할만하며, 그들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들이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만 빼놓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 하나를 속이기 위해 모두 작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사람들이 모두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말하고있는 마당에 나 혼자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곧, 내겐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을 믿을 수많은 근거들이 존재하는 반면에 지구가 둥글지 않다는 주장을 믿을만한 근거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내가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혹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실존 인물이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후 부활하였다고 믿는다.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믿음을 갖게되었을까?

우선, 그들은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주위의 믿을만한 어른들에게 예수가 실존인물이며 죽은 후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며, 그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책들과 다른 매체들을 통해 그 사실에 대해 확인하였을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인류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또 그를 통해 권위를 갖게된 성경이라는 책이 위 사실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교회나 성당 등의 믿을만하고 진지한 사람들 - 성직자, 선생님, 목회자 등 - 이 그에 대해 강한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말하며, 그 믿음에 따라 자신의 삶을 정향 시키고 있다. 나아가 몇몇 사람들은 죽은 예수를 덮었던 수의나 예수가 처형당한 십자가의 나무 조각 등을 발견하였고, 그를 조사한 결과 그것들이 예수 시대의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많은 사람들이 구태여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한, 그들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며 따라서 나 역시 예수가 실존인물이었으며, 부활하였다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한편 성경은 하나의 '종교적' 텍스트일 뿐이며, 그러한 한 그것의 사실성은 신앙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음을 안다. 또한 내가 그 진실성을 별로 의심할 수 없는 현대과학이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와 그의 부활을 믿게 하는 근거도 존재하는 한편,그를 의심하게 할만한 (다시 말하자면, 그를 사실적 믿음과는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게 하는) 다른 근거들도 존재한다. 따라서, 예수와 그의 부활에 대한 나의 믿음은 지구가 둥글다는 나의 믿음만큼은 확실하지 않으며 유동적이다.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을 지지해주는 다른 믿음들에 의해 지탱된다. 한 믿음을 지탱해주는 다른 지식 혹은 그 지식에 대한 믿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또한 그 믿음을 의심케 하는 근거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 믿음에 대한 나의 확신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것이 소위 과학적 사실이건, 종교적 믿음이건, 아니면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이건 모든 의심 혹은 믿음의 구조는 특정한 믿음(혹은 의심)과 그 믿음(혹은 의심)을 지탱해주는 다른 믿음(혹은 의심)의 체계들로 이루어져있다.

남편 혹은 아내의 부정을 의심케 하는 근거와 자료와 흔적과 소문, 자취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린 더욱 그 의심을 강화시킬 것이며, 이 모든 근거들에 의해 지탱된 우리의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사이비 종교 신봉자들은,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자신들의 체험과 기존의 지식과 가치관 등이 그 종교의 종교적 신념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점점 그 종교에 몰두하는 동안, 많은 근거들이 그 종교적 신념을 지탱해주는 대신 그 종교적 신념을 의심케 할 만한 어떤 근거도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음을 발견한다면, 그는 이제 그 종교의 신봉자가 된 것이다.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운동하고 있다고 믿었던 천동설의 지동설로의 변화는 이런 점에서 보면 단지 '천체 운동의 중심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한 믿음의 변화만은 아니다.

다른 수많은 믿음의 체계들 - 천구의 밖에서 천구에 운동을 가하고 있는 신에 대한 믿음, 그 신으로부터 지상에까지 위계적으로 구성된 천체의 질서에 대한 믿음(나아가 그 질서에 따라 구성되어있는 인간사회의 신분적, 계급적 위계질서에 대한 믿음), 일식 및 월식, 혜성 등이 저 위에 있는 신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전조라는 믿음 등등이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운동하고 있다는 믿음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지동설은 저 모든 하나의 거대한 믿음의 체계 대신에 완전히 새로운 믿음의 체계 - 우주는 무한히 넓으며,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더 이상 우주의 중심이 아닌 주변의 작은 행성에 지나지 않으며, 천체는 신적 위계질서에 따라서가 아니라 질적으로 균일한 물리적 힘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따라서 천체의 운동엔 어떤 신적인 힘도 작용하고 있지 않는다는 등 -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과연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불릴만한 이러한 새로운 믿음체계는 그리하여 오랜 시기 동안의 사회적 역사적 진통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리이스 신화의 세계는 그 신화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게 하는 이러한 '상호 지지적 구조'를 갖는다. 그 속에 등장하는 신들과 인간, 사건과 장소들은 서로 너무나 밀접하고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 중의 일부만을 먼저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그 믿음에 의해 지지되고 또 그를 지지하는 나머지 다른 연관들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구조다.

그 대표적인 것이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 및 인물들의 복잡한 계보다.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줌으로 인해서 저 오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을 마련했던 파리스는, 그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이스 군들을 용감히 물리치고 아킬레스의 절친한 친구 티물루스를 죽인 트로이의 장군 헥토르의 동생이었고,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그 파리스의 아내 헬레나와 이종 사촌지간이며, 그 헬레나는 또한 트로이전쟁에서 오딧세우스와 함께 싸웠던 그리이스군의 총수 아가멤논의 현제 메넬라오스의 아내였으며, 나아가 그 아가멤논을 정부와 공모해 살해했던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가 헬레나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씨 다른 자매였다는 사실 등등이 그것이다.

이 경우 한 인물의 실존성에 대한 믿음을 그의 복잡한 계보의 체계가 다층적으로 지탱해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이스 신화는 등장하는 한 인물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년도, 성장과정, 가족관계 가족의 이름들까지 곧 그의 계보를 모두 알려줌으로써 그를 '살아있는 상태'로 믿게 해준다. 많은 수의 등장 인물들이 서로 복잡하게 관계 맺고 특징적으로 상호관계 함으로 인해 그를 둘러싼 하나의 거대한 지식체계를 요구하는 근래의 몇몇 만화나 컴퓨터 게임들은 이러한 그리이스 신화의 체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을 것이다.

* 비트겐스타인의 <확실성에 대하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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