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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울수 있을까? 1

김남시 2002. 3. 26. 07:27
1. 준거 언어 체계로서의 모국어

새로운 외국어 하나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먼저 우리는 그 외국어의 기본 단위인 철자들을 익혀야 할 것이다. 한국어의 철자와는 완전히 다른 그것들 각각의 발음과 모양들을 연결시켜 쓰고 알아볼 수 있도록 외워야 할 것이다. 그 철자들의 발음은 우선 우리가 발음할 수 있는 발음들에 상응하여 비교되며 익혀질 것이다.

독일어를 예로 들자면, a는 한국어 발음의 ‚아’와 같은 것으로 ‚b’는 ‚배 혹은 베’에 유사하게 상응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그 알파벳의 발음들을 배울 것이다. 그 언어의 철자들 중 한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발음들이 들어있는 경우에도 우선은 그 발음을 우린 한국어의 음성적 구조가 허용하는 발음의 형태와 연관시켜 배울 수 밖에 없다. 독일어의 ‚V’는 한국어 발음의 ‚프와 브’ 중간쯤 되는 발음으로, Z는 ‚츠’와 ‚즈’ 중간 어디엔가 위치하는 발음인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그 예다. 이런 방식으로 그 발음을 우리가 완전히 모국인처럼 발음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를 모방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발판을 얻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본 철자에 대한 발음이 익혀졌다면, 이젠 그 철자들로 이루어진 단어들을 배울 차례다. 우선은 가장 기본적인 단어들을 배워야 할 터인데, 예를들어 영어라면, I, You, He/She 등의 대명사와 am, is, are 등의 be동사 들이 아마도 그에 해당될 것이다. 이 기본 단어들의 의미를 우리는 ‚I’는 한국어의 ‚나’에, ‚You’는 ‚너’, He/She’는 ‚그/그녀’에 상응시킴으로써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국어의 문장 구조와 본질적으로 다른 be동사의 의미와 활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I am Tom’이란 문장에서의 ‚am’이 한국어 문장 ‚나는 탐이다.’의 ‚이다’정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한국어에서와는 달리 이 be동사가 주어에 따라 ‚is, am, are 등으로 변화한다는 것도 익혀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이해에 기반하여 이제 우리는 좀 더 복잡한 문장들을 분석,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특정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그 문장을 이루고 있는 각각의 단어들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를위해 우리는 ‚외국어 사전’을 활용할 것이다. 그 사전은 해당하는 외국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고있는 ‚한국어’를 통해 설명하거나 그 외국어 단어에 상응하는 한국어 단어를 제시해 줄 것이다. 독일어 단어 ‚Suche’가 한국어의 ‚탐색 혹은 무엇인가를 찾는 것’ 이란 의미를, ‚Sprache’가 한국어의 ‚언어’로, ‚vollkommen’이 ‚완전한 혹은 완벽한’ 등의 의미를 갖는다는 걸 알고서야 비로소 우리는 ‚Die Suche nach der vollkommenen Sprache’라는 독일어 문장이 „완전한 언어에 대한 탐색“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걸 알게될 것이다.

좀 더 본격적인 외국어 이해를 위해선 우린 때로는 그 외국어 단어들만을 집중적으로 익혀야 하기도 할 것이다. 늘 사전을 찾아야 하는 수고를 덜기위해서라도 우린 외국어 문장을 읽어 이해하거나, 그 외국어로 소통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어휘들을, 단어 카드를 만들거나, 어휘집을 보거나, 좀 더 고전적으로는 사전을 외우거나 하는 식으로 익힐 것이다. 각 외국어 단어들은 – 너무도 당연하게도 - 그 의미와 더불어, 곧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와 함께 익혀져야 할 것이며, 이렇게 익혀진 단어들은 우리가 접하는 외국어 문장들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활용될 것이다.

위의 과정을 통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다음의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우리는 외국어를 우리의 모국어에 의거해서 배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그러한 준거 언어 체계가 아예 결핍되어 있다면, 우리는 외국어 단어의 의미를 알 수도, 그 문장 구조를 모국어의 그것과 비교하여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결국 그 외국어를 배우고 이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린 자신의 모국어와 그를 통해 얻어진 의사소통 능력에 의거해서만 외국어의 발음과 단어의 의미와 문장 구성의 원리, 나아가 특정 상황속에서의 문장의 수행적 의미 performativ 를 이해할 수 있다. 외국어를 배우고 이해하기 위해선 우린 최소한 하나의 언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소위 ‚이해의 해석학적 선지평’이 외국어를 배우고 이해하는데 만큼 더 잘 적용되는 곳은 없을 것이다.

2. 언어와 세계지식

한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로 표현되는 세계에 관한 지식들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특정한 영어단어의 의미를 ‚영-한사전’을 보고 이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 단어가 표현, 지칭 혹은 지시하고 있는 세계 내의 특정한 대상과 사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태나 대상을 지칭하는 단어들은 - 그것이 외국어건 모국어건 간에 –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는다. 예를들어 보자. 우리는 멀쩡한 한국어인 ‚필집(筆執)’ ,토매(土昧)하다’ 등의 단어를 발음할 수는 있지만 도대체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건 그 단어들이 지칭 혹은 표현하고 있는 대상이나 사태를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외국어 단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Zahnarzt’이라는 독일어 단어를 길거리에서 봤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해보자. 그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데는 다음 두 가지 중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 단어는 어쩌면 우리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어떤 사태나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일 수 있다. 아니면, 사실 이 단어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내가 그로부터 그 의미를 연결시켜 떠올릴 수 없는 외국어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내가 알수 없는 것일 수 있다. 독한 사전을 찾아보자 위 단어는 한국어의 ‚치과의사’에 상응한다고 되어있고, 그를통해 우리는 독일어 Zahnarzt가 ‚치과의사’ 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된 것은 독일어 Zahnarzt 가 한국어 „치과의사“에 상응하는 단어다라는 사실만은 아니다. 우리는 한국어 „치과의사“가 무엇인지, 말하자면, 그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일반적으로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으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등등을 알고있으며, 그를통해 독일어 Zahnarzt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던 것은 ‚치과의사’라는 단어가 지시하는 세계 내의 어떤 대상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외국어 단어에 상응하는 한국어의 사전적 정의를 안다고 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다음의 예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Weitfixleisten’ 이란 독일어 단어와 맞닥뜨렸다고 해보자. 역시, 그 단어의 의미를 알지못해 독한 사전을 찾아보니 나와있지 않아, 할 수없이 위 단어를 weit ‚넓은’, fix 고정시키다, leisten 구두골 등으로 분해해서 그 의미를 유추해보았다. ‚넓게 고정시키는 구두골?’ ,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이 단어를 이해할 수 없다. 왜? 그건 이 단어가 지칭하는 세계 속의 그 대상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사태나 대상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국어로 표현되었다고 해도 우린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가 그 의미를 확실히 알고있는 단어들에 대해선 자신있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난 그 단어들, 예를들어, 집, 책상, 학교, 선생님, 신문 등이 지칭하는 세계 내의 대상을 „알고 있다“고. 만일 내가 책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난 „책상“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책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난 이미 책상이 무엇인지 알고있는 것이다. 우린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 만큼 세상을 알고 있다!

3. 그렇다면, 아이는 어떻게 말을 배우는가?

위로부터 다음 두 가지 사실이 확인되었다. 외국어를 배우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최소한 한가지의 언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언어의 의미를 알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언어가 지시, 지칭, 표현하는 세계 내의 대상과 사태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위 두가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아이가 처음 말을 배우는 과정은 하나의 아포리한 철학적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된다. 종종 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비교되지만, 이미 하나의 모국어를 갖고있는 어른이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과 선행하는 해석학적 준거 언어가 없는 아이가 말을 배우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아이에게는 새로 배운 단어의 의미를 그에 의거해 이해 할 ‚선행하는 의미체계’- 우리에게서라면 우리가 이미 알고있는 모국어-가 없기 때문이다.

‚Desk’라는 영어 단어의 의미를 우리가 그에 상응하는 한국어 ‚책상’에 의거해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 어떤 준거언어도 가지고 있지 않고, 아직 세계 내의 사물과 사태들에 대해서도 알고있지 못한 아이들은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말을 배울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플라톤은 소위 '상기설'을 통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플라톤적 대답)

모든 인간은 이미 태어날 때 부터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는 그 지식을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이데아의 세계에서 배웠다.) 모든 경험 이전에 생겨났다는 점에서 선험적이자, 존재하는 모든 책상들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원형적인 그 지식은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태들의 ‚원형’(Idea)들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책상을 ‚책상’으로 인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근원적 모국어“의 역할을 한다. 아이는 그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된 책상을 자신이 이미 알고있는 책상의 원형적 지식과 연결시켜 이해하고, 그를 ‚책상’이라고 부른다는 걸 배운다. 마치 우리가 영어 단어 ‚Desk’ 가 우리가 한국어 „책상“을 통해 알고있는 지식과 연결시켜 이해하듯, 아이 역시 ‚책상’(2)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저 원형적 지식 „책상“(1)과 연결시킴으로써 이해하는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저 근원적 지식 „책상(1)“ 은 그 자신 만이 알고 있는 형태로 아이의 머리 속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말을 배우면서 구체적인 세계 내의 대상들과 하나씩 연결될 것이다. 만일 그 아이가 영어를 모국어로 배워야 한다면, 아이의 머리 속의 저 지식 „책상(1)“은 „Desk“라는 단어와 연결될 것이며, 독일 아이라면 그것은 „,Tisch“, 일본아이라면 „つくえ“라는 단어와 연결될 것이다. 책상을 가리키는 서로 다른 말들(영어, 한국어, 일본어, 독일어 등등)이 결국 저 „책상(1)“을 지칭하고 있는 한, 그 말들의 의미는 „책상(1)“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시말해, 이렇게 말을 배운 한국, 미국, 독일, 일본 아이들은 각기 „책상(2)“, „Desk“, „Tisch“, „つくえ“라는 단어를 말하면서 머리 속에선 자신들이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었던 „책상(1)“을 떠올릴 것이다.

위 설명이 그럴듯하다고 여겨진다면, 우린 플라톤적인 관념론적 전제를 받아들일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가 석연치 않게 여겨진다면, 우린 다른 대답을 찾아보아야 한다. 비트겐스타인이라면 이에대해 어떻게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