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문자와 인식, 다시 올립니다.

김남시 2002. 8. 27. 19:05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플라톤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이상하게 여겨질지도 모를 문자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고 있다. 그에 따르면, 문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이자 우리 자신에게 속해있는 ‚기억’을 연습하는 대신에 본질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외부적인 ‚문자’에 의존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킨다. 문자는 본질적으로 기억(memory)의 수단이 아니라 상기(reminding)의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자는 문자를 읽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식을 얻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문자를 통해 얻어진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 아니라 지식의 가상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 사람인 것 처럼 보이는 그림 속의 사람이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쓰여진 문자는 우리가 하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아무런 지적과 조언도 할 수 없는 죽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과 육체를 사용하여 말해지는 말이 상대방과의 대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에 반해 쓰여진 문자는 도대체 누구에게 말하는지, 아니 아예 말을하는지 아닌지 조차 알지못하도록 만들어진 허수아비 지성에 다름 아니다. 대화를 통해 스스로를 변호할 수도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킬수도 있는 말과는 달리 문자는 쓰여진 생각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도 그에대해 부언할 수도 없는 지식의 ‚가상’에 다름 아닌 것이다.

문자문화에 익숙해 있는 우리들에겐 웬 뚱딴지 같은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문자가 있었기에 플라톤의 그 생각도 우리에게 전달될 수 있었던거 아니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플라톤의 입장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당연하게만 여겨지는 문자문화에 대한 비판의 맥락 속에서 보면 그 의미 심장함을 느낄수 있게된다.

플라톤에게 있어 참된 앎은 ‚대화’를 통해 얻어진다. 쓰여진 지식은 플라톤적 존재론 속에서 기껏해야 우리의 모든 지식의 원천인 ‚이데아 세계’의 이차적 모방에 불과할 뿐이다. 대화가 구체적인 대화 상대자와 그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전제하는 것과는 달리 말하는 사람의 부재를 특징으로 하는 문자는 말해진 것, 곧 지식으로부터 그것이 갖는 구체적이고 실천적 의미를 벗겨내 추상화시킨다. 구체적인 대화 상대자와 함께 이루어지는 대화가 내가 말하고 있는 그 상대와의 구체적인 인간 관계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데 반해, 누가 어디서, 어떤 상황 속에서 읽혀질지 모르는 글은 추상적인 소위 ‚독자’라는 가상의 대화 상대자를 전제하고 쓰여질 수 밖에 없다.

내 앞의 구체적 대화 상대자에겐 이해되지 못한 나의 말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만, 글을 읽는 독자에게 그것은 봉쇄되어 있다. 무차별적인 ‚독자’를 향해 쓰여져있는 글을 읽는 독자들은 글의 일방적인 발걸음에 끌려가거나 아니면, 책을 덮어버리는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특성은 또한 글의 익명성과 관련되어 있다. 글은 말하는 자의 육체적 개별성을 은폐시킨다. 말하는 자가 자신의 음성, 표정, 제스쳐, 얼굴 빛 등, 말과 긴밀히 연결되어있는 육체적 징후를 통해 사실상 말 그 자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밖에 없는데 비해, 문자는 음성이 지니고 있던 저 개별적 내면, 음성을 통해 드러나는 말하는 자의 심리적, 육체적 상태 등을 사상시키고 고정된 활자들의 뒤로 개인을 숨겨버리는 가면의 역할을 한다.

글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는 글을 통해 표현된 생각과 사태들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태도를 숨길 수 있다. 그는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어떤 생각들을 변호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자신이 마치 남자 혹은 여자인 것처럼 의도할 수도 있다. 문자가 주는 이러한 익명성의 가면 속에서 글쓰는 이는 한편으로 말하는 이보다 더 자유로운 공간을 점유한다. 음성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고 폭로하는 말하는 자의 정체를 글은 감추고, 덮고 숨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이 갖는 이러한 성격은 또한 다른 한편으로 글의 외면성과 글쓰는 이의 내면과의 긴장감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글을 통해 자신의 내면, 감정, 생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한번이라도 노력해본 이는, 말을 할 때의 나의 표정, 음성의 떨림, 제스쳐, 목소리의 톤과 리듬 등이 동반되지 않는 글이 나의 진심을 드러내기에 얼마나 힘든 매체인가를 느껴보았을 것이다. 말의 내면성과 글의 외면성이라는 오래된 철학적 편견은 아마도 이러한 경험들에서 그 설득력을 얻어왔을지도 모른다.

또한 글이라는 매체는 그를 통해 표현되는 지식의 실천적 성격을 박탈하였다. 문자가 없던 시절 지식은 경험을 통해서 획득될 수 밖에 없었다. 특정한 분야에의 실천적 경험이나 오랜 숙련등을 통해 얻어져야 했던 지식은 따라서, 그 지식을 소유한 자에 대한 사회적 존경을 낳게 하기도 하였다. 그 때의 지식은 제사장의 신탁의 형태로, 선지자의 예언이나 경고로, 지혜로운 노인의 권고나 시인의 이야기의 모습을 띠고 사람들에게 다가왔으며, 이는 언제나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말로써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 지식들은 또한 그에 따라 우리가 행동하고 실천하기를 요구하는 실천적 지침이었으며, 그로부터 우리 삶의 방향을 도출해 내어야 하는 교훈적 가르침이었다. 한마디로, 지식은 그 실천적 성격을 통해 규정되었다.

문자를 통해 지식은 글을 읽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화 되었지만, 그를통해 지식이 지녔던 저 실천적 성격은 상실되었다. 지식은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되었고, 우리는 우리가 읽은 그 정보들에 대한 어떠한 실천적 부채 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책을 통해 지식을 습득한 존재로서의 지식인이 이전 시대의 예언자나 현자가 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곧, 그 지식은 내 삶 속에서 실행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의 어떤 목적을 위해 필요한 정보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말을 통해 사라져 버리는 대신 문자와 책을 통해 물질화될 수 있는 지식은 그 소유 개념의 변화를 낳았다. 우리는 책을 읽을 때 분명하게 파악했다고 느꼈던 책 속의 생각들이 책을 덮는 순간 까맣게 사라져 버리는 경험을 종종한다. 단단하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문자들로 구조되어 있는 책속의 지식들은 그로 인해 그 지식들을 ‚소유’했다는 느낌을 갖게 하지만 실상 우리가 소유한 것은 까만 활자들이 즐비하게 박혀있는 한권의 ‚책’이라는 물질일 뿐이다. 누군가의 대화를 통해 얻어진 앎이 나의 삶의 구체성 속에서 실천적 의미를 갖게되는 것에 반해 도대체 나만을 위해 말해진 것도 아닌 저 문자들이 읽는 순간 나의 것이 되지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자에 대한 불만“들은 문자를 말을 재현하는 외면적 매체로 보는 오래된 재현의 형이상학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그에 의하면, 문자는 우리가 그를 통해 드러내려 했던 ‚내면적, 정신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외화, 객관화 시키는 매체다. 물론 말 또한 인간의 내면에 있는 생각 혹은 감정들을 드러내고자 할 때 사용되는 매체이기는 하지만, 말은 문자보다 우리가 드러내고자 하는 저 ‚내면적인 것’에 더 가까이 있는 1차적 매체다. 말은 우리의 내면을 ‚재현’하지만, 문자는 그렇게 재현된 말을 또다시 재현하는 „재현의 재현“이라는 것이다. 음성 중심주의라는 이름으로 데리다로부터 비판받은 이러한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식론을 통해 철학적 사유의 틀을 잡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존재, 곧 세계의 사물들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세계를 인지한다. 세계의 사물들은 인간의 영혼에 작용하여 자극들을 „새겨 놓으며“ 그 서로 다른 자극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사물들을 서로 판별한다. 말은 인간 영혼에 새겨진 이 서로 다른 세계의 자극들을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음성적 말이 문자보다 훨씬 더 그것이 지칭하는 원초적 대상들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글자는 저 음성들을 또다시 재현하기 위해 사용된 것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존재와 영혼, 말과 글 사이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존재(세계) » 자극 » 영혼 » 1차적 재현 » 말 » 2차적 재현 » 글

이렇게 본다면, 막상 표현하려고 하는 것을 그저 외부적으로 재현할 수 밖에 없는 문자가 지극히 불만족스러운 매체인 것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인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재현의 형이상학 혹은 데리다의 말을 빌어 ‚음성 중심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은 본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것이다.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서구 철학의 기본 패러다임이었던 위와같은 사유방식에는 표음 문자로서의 알파벳이라는 특정한 문자체계의 문화가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말의 의미론적 단위를 문자로 표현하는 표의문자 체계에서라면 ‚글’이 ‚말’의 재현이라는 위의 생각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다음 번 다른 글에서 다룬다.)

어쨋든, 현대사회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커다란 역할과 위치를 생각해보면 아이러니컬하게도 문자는 최근까지도 서구 철학내에선 기껏해야 사유의 복제 혹은 껍데기라는 인식론적 천대를 면치못했다. 위와같은 사고방식에 대한 비판과 함께 오히려 문자가 갖는 인식적이고 구성적, 생산적 기능을 새롭게 평가하는 논의가 활발하다. 이는 문자가 말 이나 생각 등을 재현하기만 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것이 생각과 사유 자체를 가능케하고, 나아가 우리의 사유 자체를 구성하고 „작동“시키기도 하는 보다 적극적인 매체라는 데 주목하게 된 결과다.

문자는 인간의 지적 발전에 일대혁신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문자를 통해 과거의 지식들이 전달되고 축적될 수 있었던 점만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문자를 통해 사유 과정을 시각화함으로써 복잡하고 긴 계산을 가능케하였던 수학과 논리학등의 발전없이는 오늘날의 과학 문명은 거의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기하학, 수학 등에서 우리는 특정한 개념이나 사유방식 등을 문자나 숫자를 통해 수식화하며, 이들을 조작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이때 사용되는 문자나 숫자는 단지 그를통해 대별되는 개념들을 재현하기 보다는 그것을 조작할 수 있게 해주며, 그를통해 그 문자나 숫자없이는 불가능했을 복잡한 계산과 사고를 가능케 한다.(펜과 종이만으로 긴 자리 숫자의 연산을 하는 모습을 생각해보라.) 기하학이나 수학에서의 증명들을 문자나 숫자의 도움없이 풀 수 있을까? 차근차근한 절차와 과정적으로 이루어지는 계산들에 의거해 풀려야 하는 한 복잡한 수식들을 천재가 아닌한 머리 속으로만 계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수학에서 사용되는 문자 뿐만 아니라 글 자체 또한 우리의 생각들을 조직하고 그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게 함으로써 복잡하고 논리적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하였다. 문자의 도움없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연설이 자칫 횡설수설과 불필요한 반복 등에 빠지기 쉬운 것에 반해, 문자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항목별로 조직하여 시각화시킴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1) 이렇게 본다면 문자는 사유의 논리적 체계화에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다.

나아가 이제 문자가 언제나 어떤 사고나 생각 등을 전달 혹은 고정시켜놓는데 필요한 매체일 뿐이라는 생각은 이제 수정되어야 한다. 오늘날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등장한 새로운 종류의 문자는 자신 외의 다른 것을 전달해주는 매체가 아니라, 스스로가 특정한 작동을 만들어내고 구성하기 까지 한다. HTML, JAVA 등의 컴퓨터 언어가 그것이다. 멋진 그래픽과 사운드, 혹은 움직이는 화면 등으로 구성된 컴퓨터 화면이 실상은 특정한 컴퓨터 문자로 구성되고 짜여진 프로그램의 결과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화려한 인터넷 사이트가 간단한 영어 단어와 숫자, 그 밖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HTML문자로 작동되는 것이라는 걸 알려면, 단지 인터넷 브라우져의 인터넷 소스 보이기 단추만을 클릭하면 된다.

최근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JAVA Script 들은 단지 특정한 문자들로 구성되어 컴퓨터 화면 상에서 매우 다양한 멀티미디어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를들어, 아래의 한 applet은 화면 상에 나타난 그림을 마우스로 스칠때마다 마치 물결이 퍼져나가는 것 같은 효과를 연출해내는 문자들이다.(2)

[[applet archive="DuriusWaterPic.jar" width="200" height="100"
align="middle" code="DuriusWaterPic.class"> value="DuriusWaterPic.cab"> name="image" value="chat.gif"> name="noise" value="0"> name="url" value="http://"> name="reg" value="43752326"> ]]


위에 사용된 문자들 – 이를 평자들은 „작동적 문자(operative Schrift)“라고 부른다 – 은 스스로가 특정한 ‚작용’과 ‚작동’- 그것의 구체적 크기, 효과의 범위, 방식 등 - 을 지칭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그에따라 ‚작동하고 작용’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전의 문자들이 다른 무엇인가를 대변하고 전달하기 위한 수단적 문자였다면, 이들은 이러한 점에서 자기 지시적이자 동시에 자기 목적적인 문자들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자들을 통해 유통될 지식의 위상과 역할도 변화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간단히만 언급하자면, 이제 지식은 문자들을 통해 표현되고 전달되는 무형의 것이라기 보다는, 문자들을 통해 작동되고 작용하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작동되는 지식의 새로움이다. 이 지식들은 애써 머리 속에 기억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으며 – 어차피 컴퓨터에 저장된 형태로 유통되므로 – 마우스의 작동을 통해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작동시킬수 있다는 점에서 상호적이며, 약간의 변용을 통해 자신의 구미에 맞게 변용시킬수 있고, 그 복제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책을 통한 복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고 빠르게 확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자를 통해 생산되고 작동되는 지식들은 상대적으로 복잡한 이 문자의 구조를 익힌 사람에 의해서만 생산될 수 있으며, 따라서, 지식의 생산을 상대적으로 한정시킬수 있고, 기본적으로 컴퓨터와 브라우져, 그리고 네트워크로의 접근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지식에의 접근을 제한할 수도 있다.

1.글을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생각은 한편, 우리의 생각, 사유 자체를 글처럼 조직하고, 배치, 정열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한다. 특히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는 이러한 사유의 공간적, 시각적 조직화 가능성을 가장 첨예하게 드러내보여주는 대표적 매체이다. 워드프로세서로 글을 쓸 때 우리는 한 문단을 잘라내 다른 맥락에 갖다 붙이거나, 다른 맥락에서 쓰여진 글을 잘라와 수정하여 사용하거나, 다른 이가 쓴 글을 인용하거나, 불필요하게 생각되는 문단을 삭제해버릴 수도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마치 우리의 사유 자체를 ‚잘라내고, 다른 곳에 ‚붙여지거나, 수정되고, 삭제되고, 인용될 수 있는 어떤 물질적인 것처럼 다룬다. 문자로 기술된 지식과 책이 지식과 사유를 책이라는 물질적 형태로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면, 워드프로세서는 지식과 사유를 워드프로세서라는 도구를 통해 가공하고 만들어내는 물건처럼 여기게 한다.

2. 물론, 아래의 애플릿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미리 만들어져 있는 파일이 서버나 컴퓨터의 같은 폴더내에 저장되어 있어야만 한다. 아래의 경우, "DuriusWaterPic.jar" , "DuriusWaterPic.class", DuriusWaterPic.cab", "chat.gif" 파일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파일들 역시 결국은 컴퓨터 언어로 만들어진 (혹은 환원될수 있는) 디지털 기호의 조합이란 점에서 넓은 의미의 ‘문자’로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