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음성과 주문 : 어떻게 음성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김남시 2002. 11. 14. 04:24
문자가 만들어 지기 전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우린 서로 말을 통해 의사소통 할 수 있 있지만, 그것을 기록해 놓을 문자를 아직 만들어내지 못했다. 문자가 없음으로 해서 우린 우리 견해를 전달할 편지도, 우리의 업적과 성과를 증명해 줄 증명서도, 우리 삶을 규제할 명문화된 법률집도 갖지 않는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우린 전적으로 그가 발음하는 단어들의 ‚소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으며 그 ‚소리’에 의해 그 단어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문자 문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 소리를 듣고 그를 시각적인 것으로 떠올리는데 익숙해 져버렸다. 누군가가 ‚tchaeksang’이라고 발음하면 우리 머리 속에는 이미 ‚책상’이라는 글자가 떠오르고 그를 통해 책상을 표상한다.

이러한 문자와의 교제에 달통한 사람들은 심지어 „책상“이라는 글자를 마치 책상을 그려놓은 그림인양 받아들이기도 한다. ‚산’은 산의 모양과, ‚개’는 꼬리치는 개의 형상과, ‚집’은 지붕달린 작은 건물의 모습과 머리 속에서, 오랜 동안의 경험과 훈련을 통해 직접 연결되는 통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에겐 오직 말의 소리를 통해서만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해야 했던 저 고대 인류의 경험을 반추하기가 쉽지않다. 그들은 오직 목소리로만 의사소통 해야 했다.

누군가 내게 소리쳤다. „야, 이 버러지 같은 놈아.“ 그의 음성은 신기하게도 내게 즉각적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참 장하구나.“ 이 음성은 거의 반사적으로 내 가슴을 알지못할 뿌듯함으로 채운다. 목청을 울려 내는 특정한 소음에 불과한 음성이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어떤 감정을 불러 일으키거나,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하거나,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거나, 그와 무엇을 약속하거나 한다. 이것만으로도 음성이 갖는 마술적 힘을 십분 느낄수 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호명했을 때, 우리가 반사적으로 그에 반응하는 것처럼, 음성만으로 작동하는 소통 체계 속에서 ‚음성’은 마술적으로 세상의 어떤 사태의 변화를 불러 일으킨다.

아이가 말을 배울 때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아이는 소리와 음성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아이는 특정한 음성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알기도 전에 그 음성이 어떤 특정한 행동을 불러 일으키거나, 특정한 감정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하는 모습을 관찰한다. 아니면, 특정한 행동들이 언제나 늘 특정한 음성과 함께 일어나는 것을 본다. (아니 듣는다고 해야 올바르다.)

그를통해 아이는 음성이, 목청을 특정한 방식으로 울려나오는 소음에 다름 아닌 음성이 어떤 마술적인 힘을 갖는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그리곤 깨달을 것이다. 특정한 방식으로 목청을 울려 특정한 소리를 내면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할수도 기쁘게 할 수도,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꺼꾸로 아이는 엄마, 아빠의 특정한 음성이 자신에게 특정한 행동,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도 배울 것이다. 특정한 음성을 듣고 아이는 먹고싶은 쵸코렛을 참거나, 아빠, 엄마에게 달려가거나, 화를 낼 것이다.

음성적 문화 속에서 음성은 이처럼 늘 특정한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혹자는 이를 ‚음성의 수행성(performativity) 라고 부른다.) 음성은 늘 특정한 실천적 삶의 상황 속에서 발화되며, 그를통해 육체적 혹은 심리적, 사회적 행위를 불러일으킨다.

음성으로 발화된 말의 의미는 언제나 이러한 실천적 행위 연관 속에서 배워지고 받아들여진다. 글자로 쓰여진 지령보다 말로 내려진 명령이 더 큰 실천적 힘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학교, 거리, 관공서 곳곳에 붙어있는 표어들 ‚금연, 정숙, 좌측통행, 산불조심, 둘만 낳아 잘기르자... 등이 매 시간 혹은 매 분마다 확성기를 통해 울려나온다면, 그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

비트겐스타인은 우리가 단어들을 사물들 위에 붙어있는 ‚이름표’ 같은 것으로 표상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우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생겨날 때 부터 글자로 쓰여진 이름표를 달고 있으며, 그것이 단어들의 기원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문자가 생겨나기 훨씬 이전에 세상의 사물들은 누군가의 음성을 통해 이름 붙여졌고, 사람들은 자신의 음성을 울려 그 사물들을 불렀다.

창세기의 신은 그가 만든 최초의 인간에게 ‚아담’이라 쓰여진 이름표를 달아주는 대신, 너는 지금부터 아담이라 불린다고 말했다. ‚빛이 있으라’는 그의 음성이 비로소 세상에 빛이 생겨나게 하였다.

마법사의 주문은 음성을 통해 발화되었을때에야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한다. 종이 위에 써있는 „열려라 참깨“ 는 보물이 들어있는 동굴 문을 열지 못한다. 우리의 육체를 통해 울려나온 음성이 세상을 변화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