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문자의 육체성과 익명성

김남시 2002. 12. 18. 09:39
문자가 말의 자리를 차지하고 등장하면서 부터 가장 뚜렷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음성을 통해 울려나오는 말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말하는 자의 육체성이 문자에서는 지워져버리게 되었다는 거다. (음성의 육체성과 문자와의 관계에 대해선 본 컬럼의 „플라톤에서 HTML까지“ 참조)

말하는 자 스스로의 육체를 울려서 발화할 수 밖에 없는 말이 당연하게도 그 말의 발신자를 동시에 드러낼 수 밖에 없는데 반해, 문자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자는, 그리고 그 문자로 쓰여진 텍스트는 말/음성과 필연적으로 결합하고 있었던 말화는 자의 육체성(그의 성별, 나이, 나아가 그의 육체와 목소리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화자에 대한 모든 정보들)을 그의 말로부터 걸러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제 ‚말하는 사람’이 아닌 ‚말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만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하였고, 이를통해 이제 말은 그 육체성을 상실한 채, 보관되고, 전달되고, 이동되며, 나아가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될 수 있는 ‚정보’로 변환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의 정보사회의 인프라 디지털 코드는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 사용한 기초적 문자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이 지니고 있었던 육체성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까지에는 아직 거쳐야 할 중간과정이 있었다. 구텐베르크에 의해 활자 인쇄술이 보편적으로 확산되기 이전에 인류는 문자를 직접 손으로 쓰는 수 밖에 없었다.

개개인에 의해 손으로 쓰여진 문자는, 말이 지니고 있던 화자의 육체성 만큼 개방적이고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문자를 쓴 사람의 육체적 흔적을 지니고 있었다. 개인의 필체 혹은 필적이 그것이다. 누군가가 손을 움직여 써내려간 문자는, 말이 그러했던 것처럼 글쓴이의 개별성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 보여준다. 필적 감정을 통해 글쓴이의 신원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나아가 그의 성격과 성장환경, 그가 그 글을 쓸 때의 심리상태 등까지도 간파해내는 범죄수사 기술은 글씨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육체성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직접 손으로 쓴 글씨가 지닌 육체성이 범인검거 등의 부정적 차원에서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여전히 타자기나 컴퓨터로 쓰여진 편지보다는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가 더 인간적이고 친밀감을 준다고 느낀다.

이메일이 보편적인 문자적 통신수단으로 등장한 오늘날에도 우린 연말연시가 되면, 카드에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쓴 짤막한 글(씨)들을 주고받는다. 그 길지않은 글씨들이 나의 육체성(진실성?)을 상대방에게 전달해주길 기대하면서. 컴퓨터나 타자기로 작성된 공적인 편지들에도 그 끝머리에 여전히 직접 손으로 휘갈겨 쓴 개인의 싸인이 첨부된다. 이를통해 그 편지는, 비록 비서에 의해 작성되었을지라도, 친필 싸인을 한 그 편지 발신인 ‚개인의 것’으로 간주된다. 이 모든 관행들은 컴퓨터를 통한 익명적 글쓰기에 익숙해진 오늘날에도 저 오래된 ‚글씨의 육체성’이 사회적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적 필체가 지니고 있던 육체성마저 규격화된 활자를 통해 말끔히 제거해버린 책이 보편적 매체로 등장하면서, 이제 애초에 말과 음성이, 이후엔 개인의 글씨가 지니고 있었던 육체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활자화된 말“은 그야말로 ‚말하는 사람’과 ‚그의 말’을 최종적으로 분리시켰다. 활자화된 말은 그를통해 하나의 ‚사상’ 이나 ‚생각’, 아니면 ‚감정’등을 드러내지만 그것이 누구의 생각, 감정, 사상인가 하는 것은 다만, 활자로 찍혀진 그 책 저자의 이름을 통해서야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책 저자의 이름과 그의 간단한 약력 등을 확인하기 전에는 활자로 찍혀진 그 책의 내용은 사실상 우리에겐 익명적인 것에 다름 아니다. 동일한 내용이 이 저자가 아닌 다른 저자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이 감추어버리는 말하는 자의 육체성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사람들은 책방이나 출판사 등에서 주최하는 ‚저자 싸인회’에 몰려가 그 저자가 직접 쓴, - 그리하여 그의 육체성의 최소한의 흔적을 보여주는 -, 글씨(기껏해야 그의 이름)를 책표지에 받아두고 싶어한다.

문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잠재적 익명성은 또한 다른 정치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한 국가의 왕이나 임금이 자신이 다스리는 어떤 지역에 대해 특정한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자 한다고 해보자.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결정을 문자를 통해 작성하여 그것을 그 지역의 담당관리에게 나아가 그 지역 백성들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그를 따를 것을 강제해야 한다. 그런데, 서한을 받아본 관리나 백성들은 그것이 정말 왕에 의해 쓰여진 것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확신하는가? 왕이 그 지역에 직접 행차해서 관리와 백성 앞에서 자신의 정치적 결정에 대해 포고한다면 전혀 발생하지 않을 문제가 여기에 등장한다. 바로 문자의 익명성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임금들은 ‚옥쇄’를, 유럽의 왕들은 ‚봉인 혹은 인증’(Siegel)을 사용했다. 이제 왕은 자신의 정치적 결정이 쓰여져 있는 편지에 도장을 찍거나, 문장을 통해 봉인함으로써 그 편지가 다름 아닌 최고 통치자에 의해 발신된 것임을 보증하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선 왕의 옥쇄나 문장은 왕만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어야만 했다. 만일 동일한 도장이나 문장을 다른 누군가가 도용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발신인의 신분확인을 위해 사용되었던 이러한 방법은 실효를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나 유럽에서나 임금의 옥쇄나 문장은 그 어떤 왕가의 물품보다도 엄중히 관리되었던 거다. 어쨋든, 옥쇄나 봉인은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정한 징표를 통해, 문자가 갖는 익명성을 극복하고자 한 시도였다. 곧, 이전 시대의 말이나 손으로 쓴 글씨가 지니고 있던 육체성을, 왕이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옥쇄나 봉인을 통해 대체하고자 한 것이다. 임금의 옥쇄를 임금의 몸, 옥체처럼 취급했던 것은 이처럼, 저 옥쇄나 봉인이 말하는 이의 육체성과 그와 결합되어 있는 발신인의 진품성(Authenticity)을 보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우리의 친숙한 커뮤니케이션 매체가 되어버린 이메일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메일은 기본적으로 컴퓨터 자판을 통해 입력되는 문자로 쓰여진다. 누구의 손이 자판을 치건, 그가 분당 500타의 고수이건, 두 손가락의 독수리 타법 소유자건 상관없이, 모니터에 나타나는 문자는 모두 동일하다. 말하자면, 글쓰는 이, 곧 발신자의 육체성은 그렇게 입력된 문자 속에선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친구와 혹은 동료들과 일상적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데는 사실 이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떨 때 우리는 심지어 한꺼번에 여러 사람에게 동일하게 입력된 이메일을 보내기도 하고, 컴퓨터의 간단한 복제 테크닉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입력해놓은 문자들을 복사해서 내 이름으로 보내지는 편지에 갖다 붙이기도 한다.

컴퓨터를 통한 사업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그러나 이메일 문자가 가지고 있는 저 극단화된 익명성은 이제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이메일을 통해 확인되지 않는 발신인의 진품성(Authenticity)의 문제가 그것이다. 얼마든지 ‚이름(아이디)’를 바꾸어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고, (난 하루에도 수십통씩의 스팸메일을 받는다!), 원한다면 발신인의 신분을 얼마든지 가장할 수도 있으며, 그도 여의치않으면 그저 인터넷 상에서 잠적해버릴 수도 있는 이메일의 ‚무육체성’은 인터넷을 통한 금전거래의 가장 큰 허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여러가지 방식이 위에서 말한 임금의 옥쇄나 문장의 기능방식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정한 컴퓨터에 단 한번만 발행함으로써 그 컴퓨터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하게 해주는 소위 ‚디지털 인증서’ 는 독점적 소유를 통해 그 소유자의 신분을 확인하려던 옥쇄의 기능방식과 같다. 개개인에게 고유하게 부여된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주민등록번호는 한국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지만, 내 번호는 나만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가 억압해버린 말하는 이의 육체성은 이렇게 다른 모습을 띠고 귀환한다. 다만 그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