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신화의 언어와 실재

김남시 2003. 1. 9. 18:15
신화는 사실일 수 있을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신화는 뉴스나 제보와는 다르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언어적 기록이지 않을까?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 언급된 모토오리 노리나가의 주장은 이 생각의 연장선 속에 있다. 그가 신대에 쓰여있는 신화를 실제로 일어난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논증은 오늘날의 현대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보아도 여전히 흥미롭다. 그에 의하면, 신대에 쓰여있는 신화들을 오늘날의 사람들이 일어날 수 없는 황당무계하고 불합리한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재의 언어를 가지고 옛 언어를 해석해서 옛 일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대에 묘사되어 있는 신화를 그 일이 발생했었을 과거의 언어를 통해 바라본다면 그 신화들은 특정한 사실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 다름아닌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거다.

예를 들어보자. 비행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원시사회의 부족장이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비행기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사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그는 자신이 난생 처음 접한 그 경험을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통해 표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를들어 그는 그 비행기를 „소리를 지르며 날아가는 거대한 독수리“라고 말할 것이다. 나와 그 부족장은 모두 하늘 위로 스쳐 지나간 비행기를 함께 바라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비행기“라고 말하는데 반해, 그 부족장은 „독수리“라고 말한다. 나와 그가 눈 앞에서 마주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사태 곧, 하나의 동일한 실재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는 그 동일한 사태를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을 통해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표현된 서로 다른 언어적 표현을 읽고 대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 두 개의 언어적 표현이 서로 다른 사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곧, 나는 ‚비행기’에 대해 말하는데 반해, 저 부족장은 ‚독수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테레비젼을 처음 본 우리의 선조들은 아마도 그를 ‚조그만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는 상자’라고 말했을 것이며, 전기불을 처음 켜 본 사람들은 그를 ‚도깨비 불’이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우리와 우리의 선조들은 모두 동일한 하나의 대상 곧, 테레비젼과 전기불을 보고 다만 다르게 말했을 뿐이다.

공터에 „주차되어 있는 차들“을 보고, 아이는 „빠방이 코자자 한다“라고 말한다. 아이에게 아무 소리도 내지않고 죽은 듯 늘어서 있는 자동차들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코잔다(잠자다)“ 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의 세계 – 그것은 곧 아이가 습득한 언어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다름 아니다. – 내에선 세계 내의 사태나 대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단어였다.

이런 식으로 아이는 신호대기 중인 버스를, „버스가 힘들어서 쉬는“ 것으로, 주유하고 있는 차들을 „차들이 밥먹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며, 그것은 아이의 세계 속에서 실지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이다. 나아가 아이는 자신이 이해한 세계 내의 사태에 걸맞게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기도 한다. 아이는 주차되어 있는 차들 옆을 지날 때에는 ‚차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목소리를 낯추며, 신호등 앞에서 ‚쉬고있는 버스’를 독촉하지도 않는다. 차들이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주차되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아이의 저런 행동을 나이브한 것이라 여긴다.

이제 이러한 예들을 우리가 애초에 제기한 신화의 문제와 관련시켜 생각해보자. 신화는 특정한 언어적 표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선 우리의 일상적인 세계 이해와는 달리 인간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라다니기도 하고, 구름과 다른 동물들로 변신하기도 하며, 마늘을 먹고 곰이 인간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우린 그 속에서 표현된 사태들이 우리의 세계 이해에 비추어 볼때 ‚비현실적’이며 ‚비실재적’이라고 말한다. 그 표현들은 결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실재나 세계 내의 사태일 수 없으며 다만 판타지나 꿈 속에서 일어난 것을 나이브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화에 사용된 언어적 표현들이 다만 우리가 마주하는 것과 동일한 실재나 세계의 사태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신화를 만들어낸 고대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을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언어적 표현들을 통해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를 ‚실재나 세계의 사태’가 아니라 그저 ‚판타지나 상상’을 묘사한 것이라 여기는 것은, 그들의 언어적 표현을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신화의 언어적 표현들을 사실상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실재와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린 그 언어적 표현들로부터 실재와 세계의 특정한 사태에 대한 진술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우리는 종종 그렇게 하기도 한다. 인류종말의 예언이 빗나가긴 했지만 저 위대한 예언자 노스트라 다무스의 예언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의 예언을 그 이후에 실지로 일어난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건 그가 자신의 예언에 사용한 언어적 표현들을 오늘날 우리의 언어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언어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려고 시도하는 해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가 얼마전 일어난 쌍둥이 빌딩 테러사건을 다음과 같이 예연했다고 한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본문은 다음과 같다.

„요크(York)의 도시에 거대한 붕괴가 있어 쌍둥이 형제가 혼란에 의해 갈라진다. 요새는 아픔을 겪고 위대한 지도자는 굴복할 것이며, 큰 도시가 불탈 때 세번째 큰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위의 언어적 표현을 우리가 경험한 객관적 사태에 비추어 얼추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뉴욕 도시에 거대한 폭발로 인해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미 대통령(?)은 굴복할 것이며, 보복 폭격으로 다른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삼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이제 이러한 해석방식을 우리가 알고있는 다른 신화들에도 적용해보자. 누가 아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던 놀라운 발견을 우리가 하게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