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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의 특성과 한계

김남시 2003. 1. 30. 00:56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 그 특성과 한계


언어적 소통행위의 규범적 지향

화용론적 소통 행위이론에 의하면 타인과의 커뮤이케이션은 이미 그 자체 속에 특정한 규범적 행위 지향을 함축하고 있다. 상대방과 더불어 대화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어떤 식으로든 그 대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한, 스스로에게 그리고 또한 상대방에게 암묵적으로 특정한 몇가지의 규범적 요구를 제기한다. 무엇보다도 난 대화 속에서 내 말이 상대방에게 이해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내 말이 이해되지 않았을 때 상대방이 내게 제기할 질문 등에 최대한 성실히 대답하고, 나의 말을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보충 설명을 하는 등의 노력까지도 포함된다. 난, 예를들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 건 잘 된 일이야“라는 나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왜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된 것’ 혹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나아가 나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여겨지는 몇가지 사실들을 제시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또한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말을 나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대화 상대자가 "그래도 남한에 미군은 계속 주둔해야 해“라고 말했다면, 난 왜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의 주장에 깔려있는 가치규범은 어떤 것인지, 어떤 사실들을 그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제시할 수 있는지 물어볼 것이며, 상대방이 이러한 나의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나와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나에게 이해시키는데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를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느껴진다면 난 그와의 대화를 그만둘 것이며, 이렇게 중단된 소통은 그와의 인간적 관계에까지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또한 꺼꾸로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점에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 내재해 있는 규범적 지향은 사실상 이기적 동물인 인간들의 공동적 사회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기본 윤리이기도 하다.

인터넷 소통과 일상적 언어소통의 차이

하버마스에 의해 소통행위의 보편적 타당성 요구라는 개념으로 소개된 바 있는 이러한 언어적 소통 행위의 행위 규범적 지향이 그러나, "원거리 네트워크를 통한 익명적 상대방과의 문자적 소통“(참조. Sybile Kramer,"Das Medium als Spur und als Apparat" in Medien, Computer, Realitat, 1998)으로 특징지워지는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공간 속에선 결핍되어 있다. 특히 인터넷 소통 매체로 주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문자 채팅과 소위 토론 의견 게시판 등에서 이러한 모습은 두드러진다. (인터넷 연결 속도 및 향상된 컴퓨터 성능으로 인해, 음성채팅, 나아가 화상채팅 등의 소통방식 또한 점차 확산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이에 대해선 다른 글에서 다룬다.) 문자채팅과 게시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다음과 같은 점에서 구분된다.
일상적,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대화 상대방과의 대면적 접촉, 곧 대화자들의 육체적 현존을 통해 이루어진다면 문자채팅과 게시판은 인터넷이라는 광대한 네트워크에 접속된 사용자들 사이의 익명적, 비물리적 대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참여자들은 그들에 의해 임의로 선정된 아이디를 통해서만 상대방을 확인(Identify)하며 이를통해 직접 타인의 얼굴/육체를 대면하면서 이루어지는 일상적 언어소통 속에서 우리가 자신과 상대방에게 갖게되는 책임성이 완화된다. 대화 혹은 토론의 상대자의 존재가 단지 임의적으로 선정된, 그리고 수시로 변화하는 '아이디’로서만 확인되는 대화 상대자의 '임의성’은 소통 상대자의 일관성, 안정된 정체성, 자신과의 일관된 인간적 관계 등을 전제로 하는 언어적 행위의 발화수반적 규범적 요구를 제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일상적 소통이 음성 곧, 육체를 울려서 나오는 목소리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반해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은 주로 자판을 두들김으로써 컴퓨터 화면에 떠오르는 문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스스로의 목청을 울려 말하는 자의 육체적 현존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전통적인 구속적, 행위 지향적 성격을 갖는다면, 모니터 상에 떠오르는 문자에 대한 시각적 수용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타인의 존재는 내게 아무런 구속적, 행위 요구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채팅이나 게시판에서 나의 가상적 대화 상대방은 지금, 여기에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소통의 상대는 다만 '쓰여져 있는 글자’로만 드러날 뿐이며 그 글자의 담지자는 들리거나 보이지 않는다. 그 '글자’는 누군가 실수로 입력한 것일 수도 있으며, 혹은 대량 복사된 '도배’를 통해 그저 빈칸을 채우고 있을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임의로 타인의 '문자’를 복사해서 올려놓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한 점에서 우린 그 글자에 대해 어떠한 일관성에의 요구를 제기하지 못한다. 게시판에 쓰여진 글자는 이러한 점에서 언어적 소통행위의 규범적 구속없이 그저 입력된 글자들일 뿐이다. 그 '문자들’은 언어적 소통에서와는 달리 그 문자의 발신자로부터의 책임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그 문자의 발신자는 자신이 입력한 문자들에 대해 어떤 구속적 책임성도 갖지 않는다.

문자에 대한 분노?

이러한 점에서 누군가가 올린 "글자“에 대해 욕설과 인신공격 등으로 댓글을 다는 인터넷 게시판의 모습은 인터넷을 통한 문자적 소통의 성격이 음성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적 소통으로 부터 독립되지 못한 채 혼재되어 있는 데서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에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타인과의 언어적 소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일상적 사회생활 속에서 상대방의 특정한 말이 우리의 감정(그것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을 자극하는 것은 우리가 그 상대방이 실재세계에서 어느정도 확립된 정체성과 행위 및 말의 일관성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정체성과 일관성에 대한 이러한 믿음 위에서 우린 시간적으로 지속될 상대방과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이러한 전제 하에서 상대방의 말은 그에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널 사랑해"라는 상대방의 말이 우릴 기분좋게 하는 건 상대방이 내뱉은 말에 걸맞게 앞으로 나와의 인간적 관계에서 보여 줄 특정한 행위 예측에 의해서이다. "자네 머리론 공부하긴 힘들겠는데"라는 지도교수의 말이 우릴 좌절시키는 것은 그 말의 담지자가 실재 세계에서 갖는 지위 및 그와 내가 앞으로 가져야 할 인간적 관계에서 그가 보여줄 자신의 말에 대한 일관성 때문이다. "야 이 개새끼야" 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우릴 분노케 하는 건 특정한 정체성과 일관성을 갖고 나와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 처해있는 상대방이 그 말을 통해 이 사회적 관계의 기본 규칙을 침범해왔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화자로부터 그의 일관된 정체성과 행위의 일관성, 나아가 사회적 관계에서 그가 갖는 유의미성 등을 제거시킨다면, 그의 말은 사실상 우리에게 어떤 지속적인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기 힘들 것이다. 예를들어 "야 이 개새끼야"라고 내게 소리친 사람이 정신병자였거나, 아니면 앵무새나 구관조가 사람의 말을 흉내내 말한 것이었다면, 혹은 다만 그 소리가 테레비젼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면 그 말이 불러 낸 우리의 감정은 상쇄될 것이다.
임의적인 ID 만으로 상대방의 정체성이 확인되는 인터넷 소통의 공간에선 자신의 말과 행위의 일관성을 검토할 수 있는 아무런 확인장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A라는 아이디로 '미군철수'를 주장했던 누군가가 B라는 아이디를 통해 그 반대를 주장할 수 도 있으며, A라는 아이디를 통해 말했던 자신의 주장을 B라는 아이디를 통해 찬동하거나 반박하는 등의 '정체성의 유희'가 가능한 곳이 바로 인터넷이다. 난 게시판의 나의 글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다. 그는 다만 화면상의 '글자'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에 분노한다면, 난 그 담지자와 발신자를 확인할 길 없는 '문자'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가 내게 "이 병신 새끼야"라고 말한다면, 난 그에게 분노가 치솟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병신새끼야"라고 쓰여진 종이를 내게 건네준다면 어떨까? 혹은 누군가가 종이에 "이 병신새끼야"라고 써서 무차별적으로 살포한다면? 그래서, 그 문자를 읽는 우리는 그 문자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그래도 우린 그 '문자'에 대해 분노할 것인가?

부재하는 상대

상대방의 특정한 말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내 눈 앞에 현존하고 있는 그 감정적 반응의 수용자를 전제할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곧, 소통 중의 나의 감정적 반응은 나의 상대방에 의해 수용될 때에만 의미를 발생시킨다. 난 나의 감정적 반응을 인식하고, 그에따라 반응하지 않는, 예를들어 벽이나 자동차에다 대고 나의 기쁨, 혹은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넷 게시판의 문자에 대해 분노 혹은 기뻐하고 있는 나는 나의 감정반응에 반응하는 상대방의 얼굴이 아니라, 다만 문자들과 그래픽이 혼재되어 있는 컴퓨터 화면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이는 인터넷 소통의 일방성이라는 문제와 관계한다.
일상적 소통이 나의 말과 상대방의 응답, 나아가 그에대한 나의 반응 등의 상호적 행위를 통해 특징지워지는데 반해 인터넷을 통한 소통은 원리적으로 일방적이다. 게시판에 실린 누군가의 글에 응답을 하는 이는 사실 일상적 대화에서 누군가의 말에 반응하는 것과는 다르다. 게시판의 글은 그 글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기대하고 쓰여졌다는 점에서 대화에서와 같으나, 상대방의 반응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일상적 대화와 구분된다. 난 뭐라고 말을 하지만 나의 가상적 대화상대자는 그를 아예 듣지 (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보았으나 응답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으로 등장해 (다른 아이디를 통해) 나를 역공격해 올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게시판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은 늘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잠정적 유예를 통해 특징지워질 수 있다. 나의 메시지는 인터넷이라는 저 넓은 공간에 던져지지만, 그것은 그에대한 응답을 반드시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이에반해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에서 나의 말은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완성된다. 심지어, 상대방이 나의 말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른척 하더라도 상대방의 그러한 반응자체, 나아가 그가 그 반응을 통해 나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나와 대화하기 싫다!)는 어김없이 전달된다. 이와는 달리 게시판에서 난 내가 남겨놓은 말을 누군가 보기는 하였는지, 아니면 보고도 일부로 무시하는 것인지 조차 확인할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한 소통의 이러한 일방적 성격은 채팅의 경우에서 분명하게 드런난다. 나와 채팅하던 상대방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언제든지 예고없이 일방적으로 나와의 채팅룸에의 접속을 끊어버릴 수도 있다.

회원제 커뮤니티

물론, 인터넷 공간에서의 익명적 소통이 갖는 문제들을 극복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실명과 개인정보를 제공하고 가입하는 회원제 커뮤니티 등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시도는 온라인에서의 익명적 소통의 문제점을 오프라인에서의 언어적 소통의 규칙으로 보완해 보려는 시도라고 볼 수있다. 회원만이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에서 우리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를 일상적 소통에서 그가 갖는 그의 실명적 정체성을 통해 확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은 특정한 커뮤니티 회원들의 오프라인에서의 잦은 접촉과 만남을 통해 강화될 것이다. 이 경우 이러한 회원제 커뮤니티의 인터넷 게시판에선 사실상 오프라인에서의 사회적 관계에서 적용되는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의 규칙이 적용될 것이다.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있는 사람은 게시판에 올려있는 다른 회원의 글을 읽으며, 그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릴 것이며, 그를통해 그의 글은 위에서 언급한 일상적 소통이 제기하는 규범적 지향을 담지할 것이다.

남는 문제 : 자유냐 규범이냐?

일상적 소통이 암묵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규범적 지향은 그러나, 종종 억압적이고 부자유스러운 소통 상황과 구분되기 힘들다.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갖고있는 상대(예를들어, 부모, 지도교수, 선생님, 직장상사 등)와의 대화에서 우린 소위 '이상적 대화상황'이 요구하는 규범적 지향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힘들다. 난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나의 생각과 의견을 자유롭게 완전히 주장하지 못한다. 내가 실제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갖는 실명적 정체성을 통해 규정되어 있는 한, 난 그 속에서 나의 지위와 사회적 위치를 위태롭게 할 만큼 자유롭게 날 주장하기 힘들다. 이러한 점에서 익명적인 인터넷 소통은 모든 사회적 관계의 규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조건으로 환영받기도 한다.
익명성이라는 안전한 보호막에 싸여져 있는 게시판의 논자들은 자신이 게시판에서 내뱉은 말들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방면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의 일관성에 대해 억매일 필요도 없으며, 자신의 급진적 주장이 일상적이라면 자신에게 부과할 실천적 부담감을 지지 않아도 된다. 그는 자신이 과격하게 비판 혹은 비난한 상대방과의 불유쾌한 대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며, 상대에게 퍼부은 욕으로 인해 자신의 체면이 깍이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일반적인 소통 상황에서는 대화 상대자에 대해 지니게 될 자신의 주장에 대해 근거를 댈 부담을 지지 않으며, 그를통해 소통 상대자와의 사이에 암묵적으로 형성되는 소통의 규범적, 윤리적 규율에서도 자유롭다.
이러한 익명성의 자유로움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가에 따라 인터넷 소통의 윤리적 규범에 대한 지향이 달라질 것이다. 하버마스가 말하듯 일상적 소통의 규범이 노동과 더불어 인류의 근본적 행위의 하나인 인간들 사이의 소통적 실천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자라나온 것이라면, 인터넷 소통의 규범 역시 인터넷을 통한 소통적 실천으로부터 생겨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인류의 오래된 일상적 소통의 모습을 변화시킬 지도 모른다.




1. 타자의 '얼굴'을 대면함으로써 발생하는 책임성에 대해선 Levinas "시간과 타자" 참조

2. 문자가 갖는 비육체성에 대해선 "문자의 육체성과 익명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