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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표현과 경험의 주체

김남시 2003. 6. 19. 17:37
目覚えが ある 와 '본 적이 있다'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위 두 표현은 서로 얼추 번역될 수는 있지만, 사실상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 다른 사태를 표기하는 표현이다.

„본적이 있다“한국어의 표현은 „먹어 본적이 있다, 읽어 본적 있다. 만나 본적 있다, 그와 이야기 해본 적 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본 적이 있다.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경험의 유무를 드러내는 언어적 표현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그를 언젠가 한번 보았던 적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이러한 한국어 표현은 오히려, 일본어의 ‚ 見たごとある‘나 영어의 I have seen him before’ 등에 더 걸맞는다.

일본어 표현 „ 目覚えが ある“는 이보다 좀더 복합적이다. 여기에서는 ‚본적이 있다’는 한국어 표현에서와는 달리 과거 특정한 경험의 유무가 중요하기 보다는, 그러한 특정한 경험 (여기서는 시각적 경험)이 현재에도 기억을 통해 계속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본 적이 있다’는 표현이 특정한 과거의 시각적 경험의 유무를 표현한다면, „ 目覚えが ある“는 그러한 과거의 시각적 경험의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아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본 적이 있다’目覚えが ある“가 모두 „A가 있다(aru)“라는 동일한 언어 구조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적’ 곧, ‚보았던 적’이라는 표현이 과거를 함유하고 있음에 반해, ‚目 覚え’가 어디까지나 현재적 의미에서의 의 ‚기억’을 지칭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이 두 표현의 함축적 주어에 있다. ‚본 적이 있다’의 한국어 표현에서 ‚보는 행위’의 주체는 ‚본적이 있다’라고 말하는 주체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그를 과거에 한번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를 보거나, 무언가를 먹거나 했던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이며, 바로 그 나에게 그 과거 경험이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하다.

„ 目覚えが ある“에서는 이와는 다르다. „目 覚え’에서 覚え(기억)의 주체는 ‚나’ 가 아닌„目’ 곧, 눈이다. 여기서 과거의 경험에 대한 기억 覚え이 존재하는 장소는 내가 아니라, 눈이다. 마치 혀가 특정한 맛을 기억하고, 귀가 특정한 멜로디를 기억하듯이, 눈이 특정한 시각적 감각 혹은 경험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발견“에서 Bruno Snell은 호메로스의 초기 서사시에서 모든 육체적 부분들과 그 지각의 총체로서의 ‚주체’개념이 결여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있어 지각은 ‚나’라고 하는 주체에 의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각을 수행하는 각 신체 기관들에 의해 경험되는 것이다. 곧, 귀가 듣고, 눈이 보고, 입이 말하고, 발이 걸음을 걷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내가 보고, 말하고, 걸어갔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의 귀가 듣고, 나의 눈이 보고, 나의 입이 말하고, 나의 발이 달려갔다라고 말한다.

각각의 신체 기관들에 분산된 경험들이 나라는 주체에 의해 통합되지 않은 채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이 모든 경험들이 집합되고 규제되고, 총괄되는 장소로서의 ‚주체’관념이 서서히 생겨나고 나서야 비로소 각각의 경험들은 모두 주체인 나에 의해 수행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경험을 총괄하고 종합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관념은 문어적 글쓰기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적 경험이 가능해지고서야 비로소 생겨나게 된 것이다.

만일 그의 이러한 논의를 여기에 적용시켜 본다면, 일본어 표현 “ 目覚えが ある“은 모든 경험과 기억들을 총괄하는 '주체' 개념이 여전히 결여되어 있는 사유의 특성을 보여주는 반면, 한국어의 '본 적이있다'는 경험과 기억의 주체로서의 '내'가 형성되어 있는 사유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고통에 대한 진술'에 사용되는 언어들을 비교해볼 수 있다. 몸이 아플때 우린 '몸이 아프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몸의 부분들이 아플때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 이빨이 아프다. 등이 아프다' 등등이 그것이다.

고통 진술에 사용되는 한국어의 표현을 독일어와 비교해보면 그 진술들이 함축하고 있을 서로 다른 사유방식의 차이가 분명해진다. 독일인들은 머리가 아플 때 „Mein Kopf (Bauch, Ruecken, Zaehne) tut mir weh“라고 하거나, „Ich habe Kopf(Bauch,Ruecken) schmerzen“이라고 말한다. 이를 말 그대로 직역해보자면 „내 머리(배, 등, 이빨)이 날 아프게 한다" 혹은 „내가 두통(복통,요통 등)을 가지고 있다" 이다.

한국어의 표현 속에서 '아픔을 감지하는 주체'는 육체의 기관들 곧, '머리','배, 이빨, 어깨,등'이다. 내 신체의 각 기관들은 제각기 스스로 고통을 감지하고 그를 호소한다. '내 머리'가, '내 배'가, '내 이빨'이 '아픈' 것이다!

반면, 독일어의 표현에서 드러나는 '아픈 주체'는 나의 머리, 배, 이빨, 팔다리가 아니라 '나'라고 하는 통합적 주체다. 육체의 부분들, 즉 머리, 배, 이빨, 등은 이 모든 육체들의 경험을 총괄하고 종합하는 주체인 '나'를 '아프게 하는' 대상들이다. 이들이 나를 아프게 함으로써 나는 두통을, 복통을, 혹은 요통을 갖게 되며, 여기서 이 고통을 갖는 주체는 내 육체의 기관들이 아닌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