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 미디어

일상생활의 언어게임과 그 규칙

김남시 2002. 12. 1. 08:30
눈에 보이는 것만이 확실하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라고도 한다. 누군가의 말이 의심쩍을 경우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아야지’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우리가 직접 보지않은, 곧 우리의 직접적 경험을 통해 확인하지 않은 사실들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않다. 알고보면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나아가 우리가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많은 사실들에 대해서도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확신들 위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이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1.우리는 이집트 왕 람세스 2세가 기관총으로 무장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사살되었다거나, 쌍둥이 빌딩 붕괴의 충격으로 사망하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2.우린 직접 열어 들여다보지 않았지만,(그렇게도 할 수 없지만) 내 두피 속에는 두개골이 있으며 그 안에 나의 뇌가 들어 있다고 확신한다.
3.나는 지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150년 전에도 존재했었다고 확신한다.

위의 세가지 예는 우리가 그 확실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는 수많은 확신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우리는 첫번째 확신을 우리의 역사적 지식에 의거해 다음과 같이 논증할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기관총은 빨라도 19세기나 되어서야 개발된 무기다. 이집트 왕 람세스 2세가 살았던 시기는 기원전이다. 19세기에 개발된 무기로 기원전에 살았던 누군가를 사살할 수는 없다. 따라서, 람세스가 기관총에 의해 사살되었을 수는 없다.“ 이 논증의 타당성은 ‚시간은 역전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명제에 의해 보증된다. „쌍둥이 빌딩 붕괴 사건은 2002년 11월에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람세스가 그 사건의 충격에 의해 사망했을 수는 없다“ 는 논증 역시 시간의 역전 불가능성이라는 위 명제에 의거해있다.

두번째 확신은 다음과 같이 논증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모든 인간은 그 속에 뇌가 들어있는 두개골을 가지고 있었다. 나 또한 인간이다. 따라서, 나 역시 그 속에 뇌가있는 두개골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하다.“ 이 확신은 종으로서의 인간의 생물학적 동일성이라는 명제(모든 인간 종은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와 귀납적 방법에 대한 믿음에 의거해있다.

„만일 150년 전에 지구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면, 지금의 지구는 그 사이에 새로 생겨난 것이거나 아니면 지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지구는 지금 존재하고 있으며, 150년 이전에 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50년 전에도 지구는 존재했었음이 확실하다“는 세번째 확신의 논증은 물질적 사물의 객관적 존재성과 영속성 곧, 존재하는 물질은 그에대한 나의 지각과 무관하게 존재하며, 중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생겨나거나 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의거해있다.
이처럼, 위에서 언급한 확신들은 재차 ‚시간의 역전 불가능성’, ‚인간의 생물학적 동일성’, ‚물질적 사물의 객관적 존재성과 영속성’이라는 또다른 명제에 의거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는 또다시 위의 확신들을 근거지워주고 이러한 명제들의 확실성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정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한가? 진정 모든 인간들은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물질적 사물들이 객관적으로 또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등으로 말이다.

진지한 의미에서 철학을 하는 철학자들이 던져 봄직한 이러한 질문들을 그러나,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생활 속에선 전혀 문제삼지 않는다. 우리는 위의 명제들의 확실성을 별다른 의문없이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명제들은 사실상 우리의 확증되지 않은 또 하나의 확신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들 위에서 우리의 정상적 일상 생활이 진행된다. 책상 서랍에 물건을 넣어 놓으려 하거나, 누군가에게 ‚그 서류 이 책상에 좀 갖다줘’라고 부탁할 때 우린 그 책상이 내가 보지 않을 때도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내시경으로 배속을 검진하는 의사는 모든 인간의 뱃속이 동일한 생물학적 구조를 갖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난 내가 내일 아침에 갑자기 벌레로 변신해버리지 않는다는 확신하에서 그녀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 살인범에게 징역10년을 구형하는 판사는 그 사이 갑자기 지구가 멸망해버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길을 걷고있는 나는 갑자기 지구의 중력이 사라져 내가 하늘로 날라가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등등.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생활의 실천적 맥락 속에서 우리 스스로 검증하지 않은 수많은 확신들에 의거해 판단하고, 판결을 내리고, 처방하고, 약속을 하며, 길을 걷는다. 만일 누군가 이러한 우리의 일상적 삶의 실천들을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확신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더이상 정상적으로 자신의 삶을 진행시켜 나가지 못할 것이며, 심한 경우 그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생활을 뒷받침해주는 저 검증되지 않은 믿음들을 의심없이 받아들일 것!“ 이 일상생활이라는 언어 게임의 기본규칙이며, 우린 암묵적으로 이를 따르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축구를 하면서 공을 손으로 잡아서는 안된다는 규칙을 문제삼지 않고 따르는 것과 같다. 일상생활의 언어게임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그 게임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삶에는 이것과는 다른 언어 규칙을 갖는 언어 게임도 있다. 그 속에선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타임머신에 대해 이야기 하고, 우리와는 다른 생물학적 구조를 가진 지구에 숨어사는 외계인에 대해 말하고,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아 다니기도 한다. 여기에서라면 람세스 2세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20세기의 테러범에 의해 사살되었을 수도 있으며, 미래 세계에서 전파된 방송을 통해 쌍둥이 빌딩 붕괴 소식을 듣고 충격사했을 수도 있다. 그 속에서는, 어느날 아침에 벌레로 변해버린 내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고, 사실상 지구와 모든 지구인들이 어떤 외계인에 의해 십초 전에 만들어진 가상 리얼리티일 수도 있다. SF영화나 소설,컴퓨터 게임 등의 언어게임이 그것이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우리는 일상 생활의 언어게임과 예술 및 판타지의 언어게임의 규칙을 구분하고 또 그에따라 행동한다. 때문에 우리는 극 중에서 살해 당하는 배우를 구출하기 위해 무대 위로 뛰어오르거나, 미래로 가기위해 벼랑을 향해 과속으로 질주하거나, 바퀴벌레 외계인이 두려워 바퀴벌레를 죽이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언어게임의 규칙을 혼동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지구의 멸망이 온다고 믿고 집단자살을 하거나,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재림한 예수라 믿고 재산을 갖다 바치기도 한다. 민족신화나 설화의 영역에서 통용될법한 언어 게임의 규칙을 사회, 정치적 삶의 영역과 섞어버린 히틀러에 의해 나찌시대 독일인들은 가장 우수한 인종인 독일인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특히 사회, 윤리적 행위의 영역에서 의심없이 받아들여 행하고 있는 많은 수의 게임 규칙들이 종종 우리의 시선과 자유를 암암리에 한계짓는 이데올로기인 경우도 많다. 왜 꼭 모두 군대를 가야하는 거지? 왜 어른들은 무조건 공경해야 하지? 어째서 동성연애는 비정상이라는 거지? 왜 ‚빨갱이’들은 모두 다 우리의 적이어야 하지?...

한번씩 쯤은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언어게임의 규칙들에 대해 의심의 시선을 던져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