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사랑과 페티시즘 2

김남시 2007. 3. 15. 22:53

여전히 강한 헤겔 철학의 영향하에 있던 <경철초고> 마르크스에게 사랑은 자신의 자유에 대한 의식을 자기존재의 본질적 출발점이자 목표로 삼고 있는 근대적 주체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호적 인간관계다. 근대적 주체는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 내에서도 타자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는’, 그를통해 자기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써 드러내며 타자에 대해서도 그런 자유로운 주체임[1] 주장하는 자기의식적 주체이기도 하다. 주체의 자기의식은 서로에게 단지 사물적 존재로 남을 것인가(죽음) 아니면 자신의 자기의식적 자립성을 인정받을 것인가() 둘러싼 타자와의 인정투쟁을 통해 출현하며, 이는 나아가 타자의 직접성을 지양함으로써 그의 의식의 자립성을 인정하고 그렇게 인정된 타자의 의식에 의해 자신의 자립성을 인정받는[2] 근대적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인정 관계의 출발점을 이룬다. 자기의식적 주체의 이러한 상호 인정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 사랑 속에서 개인은 타자의 의식 속에서 자기자신을 가지고 있으며 속에 외화 entaussert되어 있다. 이러한 상호적 외화 Entausserung 속에서 개인은 자기자신 만큼이나 타자를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타자와 더불어 하나가 된다. »[3]이러한 사랑 속에서 주체는 이상화된 낭만주의적 사랑에서와는 달리 타자와의 합일을 통해 소멸되고 사라져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는 자기 속에서 타자를 의식하는 만큼 타자의 의식 속에서 자신을 재인식한다. 사랑은 «  이상 개별적 개인의 의식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나는 타자 속에서 나를 의식하고 있다 .» 이러한 점에서 이것은 «  자신의 확장 Erweiterung meiner selbst» [4]이다.

 

이런 근대적 주체가 사랑의 주체로 등장하는 , 마르크스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랑은 속에서 자신과 타자의 구분이 소멸되어 버리는 낭만주의적 사랑과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편이 모든 결핍하고 있는 다른 상대를 향해 베푸는 동정이나 자비 Misericordia 와도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고난받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신의 보살핌이라는 종교적 근원을 갖고 있는 동정 혹은 자비Misericordia 이미 중세 때부터 귀족들의 평민과 하류계층에 대한 적선과 동정을, 노동자 계급에 대한 부르조아들의 연민과 사회적 조원(자선냄비!) 사상적 근원을 이루고 있었다. 동정과 자비의 관계는 신의 위치로까지 격상된 편의 구원자들과 그들의 자선 행위에 의존되어 있는 반대편의 구원자라는 대칭적 인간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러한 점에서 니체는 이런 동정적 사랑 무의식적이고, 무른 에고이즘으로 오히려 세계의 고난을 가중시키기만 하고 고난받는 자들을 모욕하는 [5]것이라며 신랄히 비판하기도 하였다. 

 

평등하지 못한 주체관계에 입각한 이러한 부르조아적 동정과 연민에 대한 혐오와 경멸은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과 더불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이 사랑을 사랑으로, 신뢰를 신뢰로 교환되지 못하게 한다면, 부르조아적 동정과 연민에 의거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 사이의 불평등하고 대칭적 사회적 관계들을 종교적 미덕을 가장한 에고이즘으로 은폐하며, 그를통해 자신의 자유를 의식하는 근대적 주체의 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적 사랑과도 동정과 자비와도 구분되어야 사랑이란 그리하여 자기 의식적 주체들이 자신들의 본질적 평등함을 상호인정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롭고 공평한 교환이어야 했다.

 

자신이 지니는 인간적 특성과 본질 만을 가지고 사랑이라는 교환 관계에 돌입해야 하는 주체들은 다른 한편, 자신의 사랑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사랑으로 교환될 있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사랑Liebe 으로 그에 상응하는 사랑 Gegenliebe 반드시 생산해 있을 것이라는 보장을 갖지 못한다. 교환이 자유로운 주체들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 나의 사랑이 상대에 의해 수용되어 교환될 있을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상대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어야 ) 때문이다. 자신에게 결핍된 인간적 특성과 본질을 가상적으로 만들어 상대의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을 왜곡시키는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교환되지 못했을 생겨날 무기력 불행 가능성을 스스로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는 « 너가 사랑을 불러내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면, 너의 사랑Liebe 그에 상응하는 사랑Gegenliebe 생산해내지 못한다면, 너가 너의 사랑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기력하며ohnmächtig, 하나의 불행이다 »[6]라고 말했던 것이다. 상응하는 사랑을 생산해내지 못할, 교환되지 못할 사랑이 가져다 무기력과 불행은 이러한 점에서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가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감내해야 기회비용[7] 셈이다.  

 

그러나, 과연 사랑이 교환의 메커니즘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상품교환 관계가 모든 사회적 관계의 핵심으로 등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랑마져 교환관계로 비록 자본가와 노동자의 그것처럼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것은 아닐지라도 - 이해하는 것은 유일하게 남은 인간적관계까지 교환의 경제적 메커니즘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은 아닐까. 최소한 사랑만이라도 모든 것들을 교환 관계의 대상으로 양화시켜 버리는 교환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헤겔의 적대적 반대자[8]였던 키에르케고르의 사랑에 대한 논의[9] 중심엔 바로 이런 질문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근대적 개인들이 자신의 실존적 결단 (Entweder Oder!) 통해 기독교적 윤리로 회귀할 것을 주창하는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신의 계명으로써 등장한다. 의무이자 계명으로서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란, 누군가를 그를 사랑함으로써 내게 돌아올 어떠한 이익과 이해관계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라는 것을 요구한다. 무조건적 사랑에의 요구는 사랑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데, 그건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미 사랑의 동기가 선택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어떤 특성 잘생긴 얼굴, 재산, 훌륭한 성격, 사회적 지위, 나에 대한 우호감 놓여있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미 무조건적 의무 아니기 때문이다. 나아가 사랑은 내가 그를 사랑함으로써 역시 나를 사랑할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그로부터 사랑을 받을 것을 기대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건 의무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교환의 법칙에 사랑을 종속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환이 내가 주는 것에 상응하는 것을 돌려받을 것에 대한 기대에서 이루어지는 교환 관계에서 벗어나야 하는 사랑 Liebe 그것의 상응물인 되돌아오는 사랑Gegeliebe 기대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점에서 키에르케고르의 사랑은 마르크스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대치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 사랑을 불러내지 못하는“ , „그에 상응하는 사랑 Gegenliebe 생산해내지 못하는사랑, 그리하여 너가 너의 사랑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하는사랑이 "무기력하며ohnmächtig, 하나의 불행 « 이었다면,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교환 관계로부터 완전히 탈피시키는데에, 자신의 사랑을 통해 사랑을 불러내고, 상응하는 사랑을 생산해 내며,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려는 요구들을 완전히 포기하는 데에 존재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어떤 것도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교환관계로부터 벗어난 무조건적 사랑의 실천사례로써 죽은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건 죽은 자가 자들과의 교환 관계로부터 배제되어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우리의 사랑에 상응해 무엇인가를 되돌려 없으며, 그에 대한 사랑은 또한 그의 개별적 특성들 - 잘생긴 얼굴, 재산, 혹은 성격 에도, 나에 대한 그의 호의에도 의거해 있지 않은, 칸트적 의미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무로서의 사랑이다. 죽은 자를 사랑하는 우리는 그에게 아무 것도 되돌려받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를 사랑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죽은자에 대한 사랑은 « 교환, 돌려받음에 대한 모든 생각들로부터  배제된, 교환 사회가 남겨놓은 최후의 파손되지 않은  »[10] 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교환이라는, 저울질하는 이성에 의해 규정되며 상응하는 없이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 »[11] 대한 반발로부터 키에르케고르가 죽은 자에 대한 사랑을 교환관계 자체로부터 완전히 탈피된 사랑의 전범으로 부각시키는 순간 그의 사랑은 패티시즘으로 변모한다. 자체로 아무 인간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죽은 이러한 사랑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죽은 자의 본래적인 사물적 본질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가상이 그에 부여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상품교환 관계에 기인한 자본과 돈의 패티시즘이 본래 상대에게는 없는 가치들을 허위로 만들어 내는 패티시즘적 가상을 생산해 내었다면, 역으로 교환관계 자체를 거부하려는 시도는 사물적 존재를 교환적인 사랑의 페티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도르노가 지적하는, 모든 것을 그에 상응하는 양적대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교환의 메커니즘 속에서 진실로 살아있는 wahrhaft lebendig’ 찾으려는 요구가 결국엔 죽은 자에 대한 페티시즘적 사랑 Liebe zum Toten’으로 귀결되는 이러한 패러독스[12] 그러나 알고보면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사랑과 상품소비 속에서, 우리에게 의식되지 못한 ,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우린 상대(혹은 그에게 속한 ) 우리의 순전한 페티시즘적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를 지배하고 있는 상품교환 관계의 메커니즘 상대의 미모, 학력, 수입 - 으로부터 자신의 사랑의 순수성을 옹호하려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에 의한 상대의 상승된 교환가치를 수용하는 양자택일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본래 자신의 물질적 가치를 넘어서는 어떤 초월적 가치의 가상을 통해 자신을 다른 모든 죽어있는 사물들과는 다른 특별하고 유일하며, 어떤 살아있는 이라고 주장하는 패티시즘은 호시탐탐 우리에 의해 구입되기를 원하고 있는 많은 상품들의 자기본질이기도 하다.

 

그에대한 많은 이들의 부정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패티시즘은 이미 우리의 일상적 곳곳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다. 숨가쁘게 이루어지는 생산과 갱신, 소비와 소멸이라는 교환 체계 속에서 우리는, 대상들을 교환의 체계에서 떼어 자신만의 으로 만들기 위해서도 우리의 페티시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자신의 진정한인간적 본질과 특성만으로 승부할 것을 요구했던 헤겔과 마르크스의 근대적 주체들은 오늘날엔  패티시즘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비밀무기로 활용하는 현대적 주체로 변모하였다. 누군가에 대한 우리의, 혹은 우리에 대한 누군가의 사랑이 우리의 본질 아니라 패티시즘적 가상과 허위 근거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본질주의적 불안감은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사회의 모든 제도와 사고, 실천들 속에 페티시즘이 얼마나 깊이 통합되어 있는가 [13],  소위 우리의 본질 패티시즘적 가상과 허위 구별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가를 아직 깨닫지 못한데에서 나온다.  

 

 



[1] Hegel : Enzyklopädie §430.

[2] Hegel : Enzyklopädie §431.

[3] Hegel :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S.119.

[4] Hegel :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S.227.

[5] F. Nietzsche, Also sprach Zarathustra, zweiter Teil. Von den Mitleidigen.  

[6]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S. 198. vgl. MEW Bd. 40, S. 567.

[7]  마르크스가 사용한 무기력 ohnmacht’ 불행 ‘Unglueck’이라는 단어가, 헤겔이, 자유를 자신의 본질로 갖고 있는 근대적 주체가 그럼에도 자신의 개별적 의지를 통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할 없는 상황 속에서 감수해야 하는 모순적 감정을 지칭할 사용했던 단어였다( Hegel :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S.72. ) 사실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8] Karl  Löwith   마르크스가 <자본론> 2 (1873) 서문에서 자신이 위대한 사상가헤겔의 제자임을 밝히면서 언급했던 헤겔을 죽은 취급하는 사람 대표자가 바로 키에르케로그였다는 (Parergar und Paralipomena II, C.20)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Karl  Löwith : Hegel und die Aufhebung der Philosophie im 19 Jahrhundert. S.99.

[9] 아래의 논의는 Theodor Adorno : Kierkegaards Lehre von der Liebe, in T. Adorno Kierkegaard 근거한 것이다.

[10] Theodor Adorno : Kierkegaards Lehre von der Liebe, S.288.

[11] Theodor Adorno : Kierkegaards Lehre von der Liebe, S.287.

[12] Theodor Adorno : Kierkegaards Lehre von der Liebe, S.288.

[13] Hartmut Böhme : Fetischismus und Kultur. Eine andere Theorie der Moderne,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