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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정신 : 헤겔과 자기 읽기 Selbst-Lesen (1)

김남시 2007. 1. 16. 05:38

 

 

정신 현상학의 첫번째 감성적 확실성 유명한 구절에서 헤겔은 감성적 확실성 sinnliche Gewissheit 에서 지각 die Wahrnehmung에로의 이행의 번째 과정에 들어선 의식을 서술하고 있다.

 

지금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우리는 예를들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지금은 밤이다 라고. 감성적 확실성의 진리를 검토해보기 위해서는 아주 단순한 시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진리를 보는 것이다: 진리는 우리가 그를 보존한다고 해서 상실되지 않듯 그걸 쓴다고 해서 없어져서도 안된다. <그리고 나서> 이제 우리가 썼던 진리를 지금, 낮에 다시 바라보면 우리는 진리가 빠진 것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밖에 없을 것이다.“ „Auf die Frage: Was ist das Jetzt? Antworten wir also zum Beispiel: Das Jetzt ist die Nacht. Um die Wahrheit dieser sinnlichen Gewissheit zu prüfen, ist ein einfacher Versuch hinreichend. Wir schreiben diese Wahrheit auf; eine Wahrheit kann durch Aufschreiben nicht verlieren; ebenso wenig dadurch, dass wir sie aufbewahren. Sehen wir Jetzt, diesen Mittag, die aufgeschriebene Wahrheit wieder an, so werden wir sagen müssen, dass sie schal geworden ist.“[1]  (<   >  N.S. )

 

감성적 확실성이 그토록 확신하고 있던 진리가 그를 언어로 기록해 봄을 통해 사실상 가장 추상적이고도 빈곤한 die abstrakteste und ärmste 진리였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어제 우리가 확신했었던 지금으로서의 오늘 그렇게 기록된 지금 바라보는 우리에겐  이상 어제 밤의 확실성을 주지않는 김빠지고 공허한 독일어의 „schal“이라는 단어는 „schale 껍질이라는 단어에서도 유추할 있는 것처럼, 맛이   빠져버린 음식, 빠진 맥주나 콜라 등을 말할 쓰이며, 이런 점에서 헤겔에게서 등장하는 „gehaltslos, inhaltlos 내용없는 유사한 의미를 갖는다. – 되어버렸다. 우리가 확신했었던 으로서의 지금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설사 지금이 여전히 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쓰여진 지금 정작 우리가 드러내고자 했던 meinen ‚ 으로서의 지금 아닌 모든 순간 순간의 지금 지칭하는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 감성적 확실성의 진리는 그를 기록함으로써 이렇게 공허하고 김빠진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일까? 우리가 확신했었던 진리는 단지 그를 쓰기만 했는데도 이렇게 것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우리가 확신하던 진리와 쓰여진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간극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헤겔이 분석하고 있듯, 거기엔 가지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시간과 언어가 그것이다. 

 

첫째로 시간은 우리의 감성이 바로 지금존재하는 것으로 Seiende 확신했었던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지양시켜버린다. 감성적 확실성이 확신했던, ‚지금이 이라고 하는 진리는 이를통해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버렸고 이를통해 우리가 놓았던 지금 공허하고 내용없는 것이 것이다. 

 

시간이 감성적 확실성의 대상을 지양시킴으로써 그것의 진리를 공허하게 만든다면, 우리가 감성적 확실성의 진리를 기록하는데 사용했던 언어 감성적 확실성이 자신의 대상에서 포착한 것을 -  감성적 확실성이 확신하고 있던 완전한 충족 ganzen Vollständigkeit 가상 erscheint 비교해볼 - 공허하고 내용없는 것으로 보일 뿐인 일반적인 Allgemeine 만들어버렸다. 그를통해 감성적 확실성의 쓰여진 진리 지금 사실 감성적 확실성이 말하고자 했던 Gemeinte 아닌 엉뚱한 것을 지시하게 되었는데, „바로 지금, 바로 이것이라고 말하면서 감성적 확실성은 말하고자 했지만 사실상 그를통해 말해진 ausgesprochen ‚지금 결국 모든 지금 지칭하는 일반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반적인 만을 표현하는 언어[2] 통해서 우리는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싶어하는 meinen 감성적 존재 ein sinnliches Sein 결국 말하지 못하는[3]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이처럼 시간과 언어는 우리가 정작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 엉뚱하고도 공허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확신했던 진리가 자체로 기록되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진리와 쓰여진 진리 사이에 작동하는 시간과 언어로 인해 우리는 우리 내부에서 확신했던 진리를 자체로 기록하지 못하며, 설사 그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쓰여진 것에서 정작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찾지 못한다.   

 

우리 내에 존재하는 진리와 그것의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과연 극복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의 의식 내에서 확신하는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어떻게하면 우리는 우리 의식 (혹은 정신) 내에 존재하는 진리를 훼손시키지 않는 쓰여진 진리 소유할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쓰여진 속에서 정작 우리가 말하고자 찾을 있을까? 우리 내에 존재하는 진리와 그것의 기록 사이에 넘을 없는 간극과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 시간과 언어라고 한다면, 간극과 차이는 어떤 식으로든 시간과 언어를 제거 tilgen’함으로써만 극복될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것의 존재함 seiende 확신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그에 대한 기록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극과,  쓰여진 것과 정작 그를통해 말하고자 했던 우리 내부의 진리를 서로 다른 것으로 만드는 언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meinen 있으며, 그렇게 쓰여진 속에서 정녕 우리가 말하고자 것을 인식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내부의 진리를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과 언어의 문제를 해결 있을까? 우리는 해결의 열쇠가 헤겔이 엔찌클로패디에서 논의하고 있는 기억 Gedächtnis’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헤겔에게서 기억 우리 내부의 진리와 쓰여진 진리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언어의 문제를 극복하게 준다는 위에서 제시된 테제에 도달하기 위해선 우선 헤겔 철학의 몇가지 기본 전제들을 확인하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헤겔의 <정신현상학> 아무 경험도 없는 숯처녀 정신이 이제 처음으로 감성적 확실성에서 출발해 절대지 das absolute Wissen’ 이르는 오랜 방황을 거친 목표 도달의 여정을 기록한 모험 기록이 아니다. „감성적 확실성장에서 나무와 집을 여기, 밤과 낮을 지금으로 포착하고 있는 정신은 이미 절대지에 도달한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현상학> 전체는 이미 도달한 절대지의 단계에서 자신의 이전 단계들을 반성적으로 회상하는 정신의 회고록이다. <정신현상학> 출발이 그것의 결과인 절대지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자신의 정신현상학 강의록에서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절대지로부터 출발하고 출발할 밖에 없는 헤겔의 근본 의도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과 Ende 이해는 필요 불가결하다. 왜냐면 결과는 이미 출발이며, 나아가 결과가 출발을 이루고 출발이 결과를 이루는 방식도 이미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정신현상학> 절대적인 mit dem Absoluten 함께 절대적으로 출발한다[4]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정신현상학> 첫번째 문장 -  „Das Wissen, welches zuerst oder unmittelbar unser Gegenstand ist, kann kein anderes sein als dasjenige, welches selbst unmittelbares Wissen, Wissen des Unmittelbaren oder Seiende ist“ („우리의 첫번째 혹은 직접적 대상이 되는 지식은 자체로, 직접적인 것의 지식 혹은 존재하는 것인 그런 직접적 지식에 다름 아니다.“)  - 등장하는 우리 이제 처음으로 대상을 접하는 경험없는 의식이 아니라 이미 절대적으로 알고 있으며 wissen 그런  지식 Wissen 방식으로 파악하고 규정하는[5]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은 자신이 알고있는 das Gewusste 속에 머무르고 매달려 있는 상대적 지식 das relative Wissen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부정하고 넘어서서 확장되고 높은 지식의 수단으로 매개할 아는, 마디로 지양 Aufheben 자신의 운동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 헤겔이 절대적 부정성 absolute Negativität’ 혹은 동요 Unruhe’라고 불렀던 절대지[6] 다름 아니다. 제한된 의식이 자신의 제한성과 모순을 의식하고 이를 지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정신의 운동은 의식에게 제한되어 있지 않은 지식, 절대지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무엇이 자신에게 제한되어 있는지를 파악해 다음 단계로 지양해 가기 위해서 의식은 이미 자신의 완성된 목표와 방향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제한된 것의 지양은 제한되지 않은 das Unbeschränkte 전제를 통해서 조건지워져 있다.“[7]  출발 속에 결과가 전제되어 있고 결과가 다시 출발을 이루는 변증법적 운동의 특성을 헤겔은 역사철학 강의에선 씨앗 비유를 통해 말하고 있다. „씨앗과 더불어 식물은 출발한다. 하지만 씨앗은 동시에 식물의 생애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식물은 씨앗을 산출하기 위해 성장한다.“[8] 라고.

 

둘째, <정신현상학> 그리하여 절대지에 도달한 정신이 의식과 자기의식, 이성과 정신을 거치면서 경험했던 자기로의 회귀 과정을 서술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서술 속에 등장하는 주체로서의 정신은, 비록 헤겔에 의해 동일한 – ‚감성적 확실성’, ‚지각’, 오성 서술되어 있다 하더라도 내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입지점을 변화시킨다. (헤겔의) 정신은 한편으로는 이전 단계의 의식의 입장에서 의식에 떠오르는 것들을 서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의 다음 단계로의 이행 과정을 서술하기 위해   단계의 의식을 초월해 있는 관점을 취하기도 한다. 이전 단계의 의식에겐 자명한 진리로 보여졌던 것이 이상 진리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 지양되는 의식의 변화 과정은 이런 서술주체의 입장 변화를 통해서만 서술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서두에 인용된 감성적 확실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지금이 밤이라는 확신하고 그를 지금이라 기록했던 의식과 다음 그렇게 쓰여져 있는 지금 바라보면서 그를 김빠진 진리라고 감지하는 의식은 서로 다른 수준의 의식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세째, 이로부터 헤겔에게 있어서 쓰여진 Geschriebene“ 독특한 위상이 드러난다. 의식은  동일하게 머물러 있는 쓰여진 것에 대해서 의식의 발전 수준과 단계에 따라 서로 다른 진리를 읽어낸다. 지금을 밤이라고 확신하고 그를 지금이라 기록했던 감성적 확실성의 의식과 지금으로부터 김빠진 진리를 감지하는 의식은 모두 동일한 지금이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접하고 있다. „인생이라고 쓰여진 것으로부터 열살짜리 아이가 읽어내고 감지할 있는 규정들은 60 노인의 그것과는 다르다. 10살짜리 아이의 의식에겐 그저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며 공허한 의미로만 다가가는 인생 60살의 노인에게는 그의 경험을 통해서 그의 내부에 축적된 인생 다양한 , 외적 규정들 – ‚술어들’ Prädikaten -   상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네째, 동일한 쓰여진 으로부터 서로 다른 규정과 술어들을 인식하는 이러한 의식의 차이는 헤겔 철학에 있어 실재적인 das Wirkliche 갖는 관념성 Idealität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마르크스가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지양되는 것은 정신이 대상으로 삼고있는 실재 대상에 대한 지식이지 대상 자체가 아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이미 정신에 의해선 지양되었던 사법, 도덕, 가족, 시민사회, 국가 등은 실재로는 여전히 존속하고 으며, 이와 동일한 이유로 헤겔 철학 내에서 종교, 국가, 자연, 예술의 참된 실재 Existenz 종교철학, 자연철학, 국가철학과 예술철학[9] 다름 아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헤겔에게 있어 문제가 되었던 것이 실재하는 종교, 국가, 자연, 예술이 아니라 그러한 종교, 국가, 자연, 예술에 대한 정신의 지식이었기 때문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헤겔에게 쓰여진 에서 중요한 것은 자체 무엇이, 어떻게 쓰여져있는가가 아니라 쓰여진 것에 연해서 의식과 정신이 가지게 되는 지식과 관념이다.

 

이제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처음에 제기했던 문제, 어떻게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진리와 쓰여진 진리 사이의 간극이 기억을 통해 극복될 있을 것인가를 고찰해보자.

 

 


[1] Hegel :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81.

[2] 그러나 헤겔에게선 이처럼 일반적인 것을 표현하는 언어는 바로 이유로 인해 참된 das Wahrhaftere’이다. (vgl. S.82)

[3] Hegel :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82.

[4]  Heidegger : Hegels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54.

[5] Heidegger : Hegels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66.

[6] Heidegger : Hegels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66.

[7] Heidegger : Hegels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52.

[8] Hegel : Die Vernunft in der Geschichte, S.58.

[9] Karl Marx :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S. XXI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