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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욕망 : Sibylle Lacan <한 아버지>

김남시 2006. 11. 19. 01:40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없었다”.


Sibylle Lacan의 회고록 <한 아버지 : 퍼즐>은 이 첫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건 이 책 전체를 관통해 흐르고 있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로 만들기 위한 그녀의 안쓰러운 투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부재로 인해 그녀 생애 전체를 규정했던 그녀의 아버지 이름은, 쟈크 라깡이다.


Sibylle Lacan은 쟈크 라깡이 첫 번째 부인 Marie-Louise Blondin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쟈크 라깡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이후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 첫째 딸 Caroline과 둘째 아들 Thibaut에 이어 1940년, 이 회고록을 쓰게 되는 세 번째 딸 Sibylle Lacan을 낳는다. 그녀가 태어난 지 1년 후 라깡은 Marie-Louise Blodin과 이혼한다. 그녀의 말처럼, 아버지를 의식하게 될 나이의 그녀에겐 이미 자신의 아버지는 부재했던 것이다. 


Sibylle Lacan은 위의 문장으로 시작되는 자신의 회고록 앞에, 특이하게도 ‘일러두기 Hinweise’ 라는 제목을 단 ‘서문’을 붙였다. 거기서 그녀는 ‘이 책은 소설도, 소설 형식을 띤 자서전도 아니다. 이 책엔 어떤 픽션도 없다. 독자들은 여기서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거나 책 부피를 늘리기 위한 어떤 꾸며진 이야기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기억 속에 있는 모든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들을, 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것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리고 이이야기는 쟈크 라깡이라는 인간자체에 대한 것도, 정신 분석학자로서의 쟈크 라깡에 대한 것도 아니다. 이건 나의 아버지 쟈크 라깡에 대한 이야기다“1) 라고 썼다.


실지로 그녀가 이 책에서 전해주고 있는 쟈크 라깡의 모습은 온전히 그의 ’버려진‘ 딸, Sibylle Lacan의 관점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녀의 회고록은 쟈크 라깡에게 버림받은 후 광고 삽화가와 부띠끄 점원을 전전하며 어렵게 세 아이를 양육해야 했던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자신의 생부이지만 법적인 타자였던 라깡에 대한 그녀의 양가적 감정, 나아가 그가 두번째 부인 Sylvia Bataille 사이에서 낳은 딸 Judith Bataille - 그녀는 이후 라깡의 제자였던 Jacque Alain Miller와 결혼해 Judith Miller 라는 이름을 갖는다 - 에 대한 그녀의 깊은 열등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저 유명한 정신분석 이론가는, 이미 세 명의 아이를 낳은 부인에게 또 아이를 낳기를 요구하다 그를 거부한 부인과 이혼하는 이기주의자이자, 전 부인과 자식들이 사는 거리 바로 맞은편 호텔에서 버젓이, 그것도 약속시간을 어기면서까지 여자와 동침하는 파렴치한으로, 나아가 이혼한 부인과 자식들에게 오랫동안 궁핍한 생활비만 제공했던 인색한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버지 쟈크 라깡에 대한 관계를, 그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요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그려지는, 혹은 읽어낼 수 있는, 아버지의 부재를 극복 혹은 부정하려는 그녀의 집요하고도 애처로운 의식적, 무의식적 노력은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인간적 연민과 스노비즘적 경멸 사이를 오가게 한다.


부재하는, 유명한 아버지 쟈크 라깡에 대한 그녀의 권리 주장은 그녀의 깊은 피해의식과 열등감과 결합되어 있는데, 이는 라깡이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Judith Bataille 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혼한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어머니 성을 따르자는 제안을 거부할 정도로, 아버지 Lacan에 집착하고 있던 그녀에게, “Who‘s who” (유명인 인명사전)에 실린 Jacque Lacan의 소개 글은 충격적이었다. 거기엔 정신분석학자 라깡에겐 한 명의 딸, Judith Bataille만 있는 것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겐 태어날 때부터 부재했던 바로 그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현존하는 아버지로 인정받고 있는 배다른 동갑내기, 라깡이 자신의 진료실에 커다란 그녀 사진을 붙여놓을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던 유디트와의 첫 만남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만 한 일이다. “유디트와의 첫 만남은 내겐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완벽했고, 나는 너무도 조야하고 서툴렀다. 그녀는 완벽히 사교적이고 재치 있었고 나는 거칠고 직접적이었다. 그녀가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데 반해 나는 어린애 같았다...나는 완전히 내팽겨지고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내가 언어만 공부했던데 반해 그녀는 철학을 공부하기까지 했다. 아, 얼마나 자주 그녀가 소르본 앞에서 마치 모르는 사람인양 내 앞을 스쳐지나 갔던가.”2)


그런데, ‘자신에겐 부재했던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유디트에 대한 그녀의 피해의식과 열등감은 자기 언니이자, 라깡이 자신 어머니 사이에서 낳은 첫째 딸 Caroline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리하여 라깡을 4년이나 더 ‘아버지’로 가지고 있었던 Caroline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녀는 모든 능력과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성숙하고 모든 여성스러움을 갖추고, 길고 탄탄한, 그리고 우리 가족 중에선 보기 드문 금발머리였으며 르노아르 그림의 주인공처럼 화사했다. (그에 반해 나는 우리 반에서 가장 작았고 버릇없는 소년 같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다는 소리를 들었고 (나는 그냥 ‘귀엽’기만 했다), 특별히 재능이 많고 지적이었다. (그녀는 학생시절 내내 1등이었고, Concours General 상을 받고, 우수한 대학 성적을 거두었다. 난 성적이 좋긴 했지만 그를 위해 무척 애써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는 육화된 여신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우리 (나와 오빠)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았다.”3)


그녀에 의하면 이 Caroline이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때, 라깡은 그녀에게 두 번째로 - 첫 번째는 메를르 퐁티가 죽었을때 -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아버지 (라깡)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고, 그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확실히 Caroline은 아버지와 어머니 이 둘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것이다.”4) (강조는 저자자신)


 아버지를 가지고 있었던 다른 딸들의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공적인 여성성을 아버지가 부재했던 자신의 볼품없고 초라한 삶과 대비시킴으로써 불러일으켜지는 꺼림칙한 연민의 감정은, 쟈크 라깡의 자식이기를, 태어날 때부터 부재하던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전취하려는 Sibylle Lacan의 파라노이드적 집요함 앞에선 엽기적 섬뜩함으로까지 발전한다. 라깡이 죽은 후 그의 묘지를 방문한 그녀는, 함께 방문했던 남자 친구를 묘지 입구에서 기다리게 한다. “나는 아무 목격자도 없이, 내 아버지와 단둘이 있고 싶었다. (내 남자 친구의 모욕받고 기분상한 반응에 대해선 침묵하기로 하자.) 그건 사적이고도 내밀한 만남이었으니까.” 그녀는 아버지의 차가운 묘석에 손을 얹고는 마음 속으로부터 이야기한다. “내 아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내 아버지에요. 그걸 아시겠지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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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ibylle Lacan : Ein Vater. Puzzle. 1999 Shurkamp, S.9.

 2) Sibylle Lacan : Ein Vater. Puzzle. 1999 Shurkamp, S.24.

3) Sibylle Lacan : Ein Vater. Puzzle. 1999 Shurkamp, S.19.

4) Sibylle Lacan : Ein Vater. Puzzle. 1999 Shurkamp, S.53.

5) Sibylle Lacan : Ein Vater. Puzzle. 1999 Shurkamp, S.61.

    

 

현재 프랑스에서 러시아어, 영어, 스페인어 자유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Sybille Lacan의 이 회고록 <UN PÈÈRE. Puzzle>은 1994년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한편 또 한 명의 라깡의 딸, 철학자 Judith Miller 역시 아버지 라깡과 관련된 책을 출판했다. 1991년 Le Seuil 출판사에서 나온 <Album Lacan, Visages de mon pèère> <라깡 앨범. 내 아버지의 얼굴>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