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스크랩] 선한 자본가와 요정 노동자

김남시 2006. 10. 11. 22:26

 

여기 있다 보니 정말 영화를 볼 기회가 없다. 한국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상영되는 다른 영화들도 볼 시간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해 보게 되는 영화는 늘 철지난 영화들 뿐이다. 그리고 이런 그 나마의 영화감상도 대부분은 아이들이 보는 영화를 같이 보면서 이루어진다. 한 달에도 수십편 씩 제작, 상영되는 영화가 매일 매일의 신문같은 것이라면 철지난 아이들 영화나 보고 쓰는 내 이야기는 어쩌면 폐지를 재생해 만든 화장실 휴지같다

 

몇 편의 아이들 영화를 보고 나는, 꽤 많은 영화들이 사회주의가 붕괴하기 전 나쁜 이미지로 고착되어 있던 자본과 자본가들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제작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전 같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을 부려먹는 착취자로 등장했었을 공장주나 자본가들은 이제 어린 시절의 꿈을 성공적으로 실현시킨 자기 성취자이거나 자신의 고용자들에게 미덕을 베푸는 선량한 부자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예를들어 <토마스와 친구들>에 등장하는 인상좋은 사장은 몇십대의 기관차와 헬리콥터 헤롤드, 나아가 철로와 역까지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이다. 볼프강 쉬벨부시(기차여행의 역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초기 열차와 철로 사업을 벌였던 자본가들은 엄청난 초기 투자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초기 형태의 주식을 유통시켰던 이들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기관차 토마스의 사장님은 거대한 물적 자본과 금융자본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던 20세기초의 대 부르조아였다는 것이다. <토마스와 친구들>에 등장하는 이 사장의 모습은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맑스나 엥겔스가 전하는 대부르조아지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그는 토마스나 제임스 같은 기관차나 기관사들을 과도하게 부려 먹으며 초과 이윤을 착취하려 하기는 커녕, 아이들과 유모어를 사랑하고 아량이 넓은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

 


 

<찰리와 초콜렛 공장>에 등장하는 빌리 봉카 (Willy Wonka) 초콜렛 공장 사장도  마찬가지다. 그는 초콜렛과 사탕을 엄하게 금지시켰던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금지와 억압의 희생자였는데 그는 이런 외적억압을 초콜렛 공장 사장이 됨으로써 훌륭하게 승화하고 극복한 인물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의  거대한 초콜렛 공장은 마치 푸리에가 꿈꾸던 Phalansterium의 헐리우드판 같다.

 

푸리에가 꿈꾸었던 사회주의에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기질과 성향, 충동들은 그를통해 거대한 사회적 조화를 이루는 토대로 적극 발양되어야 한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향과 기질에 맞는 일들을 분배받고 자신에게 맞는 일들을 수행함으로써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창의성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회적 조화에 기여한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생산해 내는 동시에 자신의 기질과 성향에 맞는 일을 하면서 자아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벤야민이 남긴 노트(파사지 베르크)에 의하면, 푸리에의 Phalansterium에서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도 훌륭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한다. 늘 무언가 떠벌리며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그 곳에서 사람들에게 매일 매일의 뉴스꺼리를 전달해주는 메신저의 임무를 맡는데, 이를통해 다른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일을 먹고살기위해 감수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런 푸리에의 아이디어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빌리 봉카의 초콜렛 공장에서 일하는 다람쥐는 썩은 콩을 깨어보지도 않고 골라 낼 수 있는 자신의 천부적 능력을, 땅콩 초콜렛을 만드는데 활용한다. 카카오를 신봉하던 아마존의 움파 룸파 부족은 카카오를 마음껏 가질 수 있는 조건하에 이 공장에서 일한다. 이를통해 다람쥐와 움파룸파 부족원들과 공장주는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들의 천부적 기질과 성향에 가장 들어맞는 일들을 하면서 가장 맛있는 초콜렛을 만들어내는 초콜렛 공장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초콜렛만 만드는게 아니라, 배를 젓고, 선전지를 붙이고, 때에 따라선 멋진 합창극도 연출하는 움파 룸파가 자신의 규정 외 노동들에 대해 불만갖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아가 공장주는 이 곳에서 자기를 실현시키는 이들에게 임금을 줄 필요도 없다.

 

초콜렛이나 사탕을 먹는 아이들이 그것의 달콤함 속에서 저 비현실적으로 조화로운 초콜렛 공장의 모습을 떠올리기를, 자기가 먹는 초콜렛이 자신의 천성에 맞는 즐거운 노동을 통해 만들어진, 마치 과일나무에 열린 열매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를 이 영화는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우리 아이가 자기가 먹는 한 개의 초콜렛에 배여있을 사회적 갈등 들을 저 환상적이고 멋진 그림으로 대체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와 비슷한 우려는 톰 행크스의 얼굴과 목소리를 딴 차장이 등장하는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면서도 생겨났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아이는 크리스마스 이브 밤 자기 집 앞에 정차한 기차에 멋모르고 올라탄다. 그건 아이들을 태우고 남극으로 향하는 기차다. 그 곳에 도착한 아이들은 거기에 있는 거대한 공장 단지를 발견하는데, 그건 전 세계 어린이들에게 나누어줄 싼타 크로스의 선물이 만들어지고 포장되는 곳이다. 빌리 봉카의 초콜렛 공장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자동화된 생산공정은 선물 생산에서 포장까지 그 누구의 힘든 육체 노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싼타 클로스의 거대한 선물 꾸러미를 썰매에 옮겨 싣는 일을 담당하는 일꾼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빨간 싼타클로스 모자를 쓴 요정들이다.

 

당연하게도 이 영화에 나오는 크리스마스 선물은 그 순수한 사용가치의 측면에서만 등장한다. 아무도 어떤 선물이 더 비싸고, 어떤 건 더 쌀 것이라는데에 신경쓰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기가 원했던 선물을, 그것의 교환가치, 곧 가격엔 구애받지 않고 받기를 원한다. 경제적 이유로 아이가 원하던 선물을 마련해 주지 못한 부모와는 다른 이유로, 아이는 자기가 원하지 않던 선물에 불만족한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모든 부모들을 긴장시키는 이 선물 가격을 둘러싼 고민을, 이 영화는 그 선물들이 남극의 거대한 공장에서 생산되어서 싼타 클로스를 통해 공짜로나누어진다는 상상을 통해 해소시킨다. 자신이 원하던 선물을 받지못한 아이들은 그것이 부모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전 세계적 감시망을 통해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싼타 클로스에게 자기가 말을 안듣거나, 우는 („울면안돼!“) 모습을 들켰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아이를 키우는데 반드시 필요한 이데올로기가 이런 류의 동화나 영화를 통해 유포되는 상상을 통해 뒷받침되는 한, 이는 부모들에게도 큰 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의 현실 지각의 의미론을 제공해주는 저 상상들이 또 다른  현실들을 감추고 은폐하게 될 때 저 상상은 치명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된다.  6살인 우리 아이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우리가 몰래 머리맡에 갖다놓는 크리스마스 선물이 싼타 클로스가 가져다 준 것이라고 믿는다. 아이는 적당한 가격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다리 품을 팔며 돌아다녀야 하는지, 장난감 가게에 쌓인 값비싼 선물들 사이를 빠져나올때 우리가 어떤 패배감을 맛보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언젠가 아이가 우리가 사다준 중국산 장난감의 생산자들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다. 혹시 아이는 자신의 선물을 만든 중국의 싼임금 노동자들을, 맥도널드 햄버거에 끼워주는 프라스틱 장난감을 만드는 중국의 어린 아이들을 저 남극의 선물공장에서 싼타 클로스를 도와주는 요정들로 착각하지는 않을까. 그리곤 그들도 저 영화 속의 요정들처럼 늘 즐겁게, 파티를 하는 기분으로 장난감들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출처 : 비평고원(Critical Plateaux)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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