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낡고도 질긴 감정

김남시 2005. 10. 25. 21:35

 

예전에 썼던 글입니다. 정리하는 차원에서 여기 올려 놓습니다.

 

 

 

 

한국에서 부쳤던 책들이 도착, 읽었다. 무라까미 하루끼의 최근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호머의 오디세이아, 68년 격동의 세계사를 정리한 1968년, 책 그림책이 그것이다.

   하루끼 소설이 내게 갖는 매력은 여전하지만, 웬지 그의 소설이 기반하고 있는 저 상류층 생활의 지반이 날 꺼림직하게 한다. 분노, 울분, 저주, 앙갚음 등을 알지 못하는 하루끼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래서 깔끔하고, 가볍게 삶을 살며 예민한 감성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감정과 삶의 결들을 호소한다.

그 깔끔함, 그 낯선 그러나 낯익은 거리감, 그로부터 생겨나는 삶에 대한 관조적 태도, 감정에 따라 살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 하지는 않는 저 주인공들의 일상적 견고함, 칸트와 혁명을 비틀즈나 스파게티처럼 들먹일 수 있는 자유로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아무런 장애도 없는 그들의 경제적 기반, 그 특권감...

기묘한 사랑과 충동적 감정, 무해한 방황과 멋진 여행 등으로 이루어져있는 그들의 삶엔, 노동의 피로, 권력으로부터의 피해, 가진 자에 대한 박탈감, 생존을 위한 노고, 그로부터 생겨날 피해의식 등이 깔끔히 씻겨져있다. 그의 소설이 내 속에서 울리는 감흥엔 그래서 무언가 꺼림직한 것이 있다.

  나의 이러한 생각은 어쩌면 하루끼 다음에 읽었던 {1968년}으로부터 기인한 것일 확률이 크다. 왜 억압과 차별, 저항과 진압의 이야기들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키는 것일까. 1968년 전 세계적으로 이루어졌던, 단지 지리적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의 베트남 침공을 통해 불러내어진 저 전세계적 혁명의 분위기를 이 책은 연대기적으로, 그러나 생생하게,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그려내고 있다.

베트남에 퍼부었던 미국의 저 엄청난 폭탄들만큼이나 전 세계에서 흑인과 여성, 학생과 노동자, 민중들을 향해 내리꽂혔던 지배와 학정의 치밀한 잔인함, 그에 대한 저항, 폭력적인 진압, 이데올로기, 죽임... 세계가 아직 미래를 향해 꿈틀거리고 있을 때, 그들이 아직 혁명의 희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리고 그 혁명을 그들의 삶과 투쟁 속에서 실현시키려 하고 있을 때...

"우리가 우리의 집단적 자아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망에 쏟아 부을 수 있었을 때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세계의 억압받는 사람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을 위해 그럴 수 있었을 때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희망을 통해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우리의 행복은 달콤한 행복이나 황홀경이 아니라 인간의 대의를 향상시킬 수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거나 자기 자신의 삶도 희생할 수 있는 행복이다."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난 기뻤는가? 난 안다. 집회와 가두 투쟁의 무질서, 혼잡스러움, 제어되지 않는 무분별과 발산되는 유치함을. 그 속에서 난 피로했으며, 이것이 진정 혁명의 진실인가하고 회의했었다. 그럼에도 내겐 저 무질서, 저 피로함, 저 유치함, 저 열정이 보여주는 피 빛 혼란에 두근거리는 가슴이 남아있다. 베트남 민중들에게, 시위대에게, 학생들에게 내리쳐졌던 총탄과 최루탄, 폭력적 진압의 섬뜩함에 치를 떠는 분노가 남아있다.

이 '낡은 감정'들은 도대체 무엇을 어디를 향해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