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Madagaskar : 사자와 얼룩말이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

김남시 2005. 9. 23. 03:44

 

 

양념 통닭 포장지나 간판에서 우린 입맛을 다시며 웃고있는 그림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있다. 닭은 주방장 모자를 쓰고 조끼까지 차려입은 손엔 포크 혹은 숟가락을 들고 자기 앞에 놓여진 맛있게 튀겨진 치킨을 먹으려고 하는 참이다. 이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우린 고기집 간판들에서 양손에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 위에 놓인 삽겹살 구이나 갈비 앞에서 입맛을 다시고 있는 돼지나 소의 모습도 본다.  

 

치킨을 먹는 닭과 삼겹살 구이를 즐기는 돼지, 양념갈비를 뜯는 소의 모습 앞에서 우린 별다른 거부감도, 어떤 혐의점도 느끼지 못한다. 그건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에겐 치킨과 , 삼겹살 구이와 돼지, 양념갈비와 사이에 존재하는 동종적, 내적 연관성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치킨, 삼겹살, 갈비라는, 우리 일상의 식탁을 풍요롭게 하는 자연의 가공품들에는 살아있는 닭과 돼지, 소가 가지고 있던 자연의 흔적이 말끔하게 말소되어 있다. 살아서 꼬꼬거리는 닭들을 떠올리지 않고 KFC 즐겨 먹을 있게하는 우리의 문명은 이러한 자연에 대한 망각 기초해 있다.   

 

<마다가스카르> 등장하는 주인공 알렉스는 뉴욕 시내 한가운데 위치한 동물원의 인기많은 사자다. 그와 그의 동물원 친구들인 얼룩말, 기린, 하마는 알렉스가 끼니 때마다 배급받는 스테이크가 어떤 살아있던 동물의 가공된 고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문명화되어 있다. 그들에게 스테이크는 뉴욕 동물원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온갖 문명적 편의들 하나일 뿐이며, 그들은 그것이 바로 자신들과 같은 살아있는 동물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다. 자연에서라면 먹고 먹히는 관계였을 사자와 얼룩말이 친구가 정도로 그들의 본성(자연)으로부터 멀어진 동물들에겐, 그로부터 모든 자연의 흔적이 제거된 스테이크와 자신들 사이의 연관성 역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뉴욕 동물원에서의 이들의 삶은 자기 자신들의 본성(내적 자연) 스테이크의 동물적 원천(외적 자연) 대한 이중적 망각에 기초해있었다.

 

이러한 망각에 의해 유지되고 있던 이들의 평화로운 삶은 우여곡절 끝에 이들이 문명화되지 않은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문명의 무인도에서 며칠동안 배를 곯은 사자 알렉스에게 서서히, 오랫동안 망각하고 있던,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 맹수로서의 자신의 본성이 상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에겐 잊혀져 있던 외적 자연의 연관관계도 서서히 떠오르게된다. 자신이 동물원에서 즐겨먹던 스테이크가 결국 자기 친구 얼룩말의 고기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것이다. 이쯤되면 <마다가스카르> 만화영화 <계몽 변증법>이라 부를만도 하다. 사랑스러운 동물들은 자연과 문명 사이의 깊은 아포리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만화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택한 삶의 방식을 이야기의 행복한 결말로 세운다. 바로 타협이다. 자신의 내적 자연과 잊혀졌던 외적자연을 깨달은 알렉스는 그러나, 그야말로 동물적 인내 발휘하여 자신의 본성을 다시 억압하는 길을 택한다. 그는 이제 스테이크 대신 펭귄이 만들어주는 생선 초밥 만족하도록 자신을 적응시키고, 포기된 스테이크 대신 자신의 동물원 친구 얼룩말을 파트너로 얻는다.

 

사자 알렉스의 앞으로의 삶은 행복할까. 그는 가끔씩 자신이 억압한 내적 본성으로 인해 어떤 다른 신경증 증상을 겪지 않을까. 다시 돌아간 뉴욕 동물원에서 그가 물고기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어떻게 하지?

모든 신경증적질문들을 같이 영화를 아이에게는 던지지 않았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아이는 영화를 보며 소리로 웃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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