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왜 사랑은 지침서를 필요로 하는가.

김남시 2005. 6. 22. 06:13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 니클라스 루만이 말하는 현대 사랑의 의미론의 정식이다. 어느 시대나 사랑이 있었다고 해서 어느 시대나 다 동일한 방식으로 사랑을 했었던 것은 아니다. 인간의 다양한 소통의 한 형태로서의 사랑은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소통방식에 따라 늘 서로 다른 의미론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의미론은 상대의 어떤 행동이나 말을 나를 향한 사랑의 기호로 받아들일 것인지를 규정해 줄 뿐만 아니라, 저 복잡하고도 독특한 사랑이라는 소통관계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할 것인지까지도 규정해왔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은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랑의 의미론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해왔고, 그 사랑이라는 관계를 둘러싼 사태들을 다른 방식으로 대하고 받아들여 왔다. 이러한 서로 다른 사랑의 의미론들은 그 사랑이라는 소통에 참여하는 당사자들이 그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그에대한 반응까지도 다르게 규정해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유부녀에 대한 사랑을 자살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던 젊은 베르테르는 오늘날과는 다른 사랑의 의미론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의 사회적, 정치적 지위, 계급과 재산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저 열정과 낭만적 사랑의 의미론은, 루만에 의하면, 18세기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개인화가 진행되면서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개인의 사회적, 계급적 지위 등 눈에 보이는 사회적 기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에선 사람들 사이의 소통은 복잡하고도 위계적인 질서와 규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그 시대엔 기사가 백작 부인을, 농노가 영주의 딸을, 평민이 귀족들을 대할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떤 말과 행동은 허용되고 어떤 건 금지되어 있는지, 어떤 제스쳐와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등이 사회의 모든 계급과 계층들 사이의 소통규칙으로 정식화되어 있었고, 이를통해 이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 하버마스가 말하는 이상적 소통이 아닌! - 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속에서 만일 계급과 계층을 초월한 사랑이 발생한다면 그건 전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저  소통규칙을 일순간에 위기에 빠뜨릴 것이며, 따라서 이는 이 시대엔 좀처럼 생겨날 수 없는 것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타인에 의해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계급적, 사회적 지위 대신 개인들의 내적인 세계, 그의 교육과 교양수준, 내면의 깊이 등이 더 중요한 가치로 부상되기 시작하자, 이전의 소통적 규칙들만으로는 사람들 사이의 원활한 소통이 점점 힘들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이제 누군가에게 호감을 사려는 사람은 그 상대의 개인적 취향과 선호, 그의 세계관 및 가치, 윤리기준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소통의 개인화와 그를통한 소통 방식의 변화가, 루만에 의하면, 소위 사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의 의미론을 낳게했던 사회적 원인이었다. 객관적으로 관찰수 있는 상대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그의 체험의 차원을 고려해야 함에 따라 이제 소통은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외적 관찰이 아니라, 그의 내면과 개인적 체험에 대한 추측과 배려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개인화된 소통의 조건 속에서 이제 서로가 자신의 사적 체험의 세계에 상대가 함께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나의 연인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상태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체험의 세계, 곧 나의 감정과 느낌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이기적이며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 우리는 사랑의 상대의 체험의 세계에 끊임없이 주위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가 생일 선물로 무엇을 좋아할지,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을지, 특정한 사건이나 대상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등 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내면은 내가 그와의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한 늘 추측하고 탐색해야할 판도라의 상자다.

 

루만에 따르면, 이러한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은 이전 시대의 소통의 비 개연성 (Unwahrscheinlichkeit)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로 또한 해결하기 힘든 딜레마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현대의 사랑을 힘들고 모순적으로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가. 

 

첫째, 근대에 등장한 이 사랑의 소통은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내적 체험의 세계에 기초하고 있다. 구체적인 삶의 상황들에 요구되는 소통 규칙들이 상대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분명하게 정식화되어 있던 이전시대와는 달리, 이제 서로의 내적 체험의 세계를 공유하고자 하는 두 명의 개인들은 다만 상대의 주관적 내면에 대한 추측에 기초해 자신의 행동방식을 결정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야 할지가 전적으로 그 순간 상대의 내면상태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나의 추측과 판단에 달려있다. 만일 내가 상대의 체험세계를 잘못 추측했다면 나의 어떤 행동이나 말은 도리어 그를 화나게 하거나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둘째, 눈에 보이지 않는 상대의 체험세계를 잘못 판단함으로써 생기는 소통의 위험성은 그러나, 그 상대의 체험 세계 자체를 소통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통해서 감소되지 않는다. „너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 말해봐라고 말하는 상대는 그를통해 그가 그만큼 상대의 내적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리하여 저 사랑의 의미론에 의하면, 상대를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있었음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이 된다. 

 

세째,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기를 요구받은 사람 역시 모순적 상황에 빠져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말함으로써 자신이 상대의 선호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 인간으로 보여지기를 원치 않는다. 상대가 싫어하는 SF영화를 내가 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보자고 한다면 난 상대의 체험의 세계를 배려하지 않는 나쁜 사랑 소통의 상대자가 되는 것이다. 저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 상대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향해 열어둠으로써 두 명의 파트너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도 상대가 원하는 것도 아닌 모두에게 불만족스런 제 삼의 결정을 하게되기 쉽다.  

 

 네째, 이러한 현대 사랑의 딜레마는 사랑 관계에 있어서의 관찰자와 행위자라는 역할 수행을 통해 더욱 심화된다. 오늘날의 사랑관계 속에서 우리는 상대방에게 그의 주관적 세계, 그 만의 내적 체험특수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을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이때 그 상대방은 자신의 내적 세계가 나에 의해 받아들여졌는지를 관찰하고 판정하는 관찰자가 된다. 사랑 관계 속에서 연인들은 서로 관찰가능한 행위를 통해 상대에게 서로의 내적 세계를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또 상대의 행위를 보고 그를 판단하는 행위자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게 된다. 그런데, 루만에 의하면  행위와 관찰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그것은 행위자가 자신의 행위를 주로 상황의 조건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보는 반면 관찰자는 그를 행위자 개인의 특성으로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루만은 자동차 운전의 상황을 예로든다. 를 운전하고 있는 자는 운전하고 있는 상황의 조건들에 따라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차에 함께 타고있는 파트너는 그의 불만스러운 운전방식상황의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특수성 너무 빨리 혹은 천천히 가면 멀미를 한다거나 하는 - 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이를통해 행위자의 입장에선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했던 행위들이 관찰자 파트너에 의해선 그의 무관심과 배려없음,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음의 징표인 것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열정적인 사랑 말고는 그 아무 것도 필요없다라고 말하는 근대적 사랑의 의미론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이는, 이다지도 많은 사랑에 관한 지침서와 충고들, 소위 남자 혹은 여자의 본심에 관한 수 많은 보고서들, 나아가 연애 혹은 파트너 관계 전문 상담사들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S : 이전에 올렸던 니클라스 루만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다시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