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수 있는 세계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읽고

김남시 2005. 10. 25. 21:31

젊은 시절의 글에는 두려움이 없다. 거기엔 자신의 욕망이, 자신의 열정이, 그리고 열정을 부끄러워하는 수줍은 억압이 동시에 존재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질 없다는, 아니 누군가에게 사실은 보여지기를 바라는 속엔 그래서, 풋기어린 솔직함이 있다, 혁명과 사랑과 열망이 있다.

 

나이가 들면서 글은 팽팽한 욕망과 감춤의 긴장감을 잃는다.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질 있으며, 아니 누군가에게 보여져야만 한다. 그래서, 거기엔 삶의 과정을 통해 나에게 들쒸워진, 나의 위치와 나의 지위와, 나의 입장에 걸맞는 적절한 규제가 작용한다. 글은 다듬어지고, 감추어지며, 의도에 따라 가공된다.

 

그러나, 자기와의 대면으로서의 글은 가슴 깊은 곳에 눌러붙은 수치와 욕망을 완전히 감추어둘 수는 없다. 말과 , 문장과 문장 사이를 비집고 부끄러운 열망과 수줍었던 과거는 그래서, 얼핏 얼핏 꿈틀대는 자신의 몸통을 드러내고 만다. 그렇게 드러난 속살은 그래서, 사실은 모두가,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삶의 깊은 비애의 흔적이다. 그런 글을 읽는 것은 애처러움으로 인해 고통스럽다.

 

황지우의 글이 주는 불편함은 여기서 기인한다. 이상 그를 자극할 아무 욕망이 남아있지 않음으로 인해 이상 자신의 삶의 욕망을 목청껏 외쳐보지도, 그를 고문하던 세상 속에 자리잡고 살아감으로 인해 이상 세상을 향해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게 되어버린 중년의 삶은, 우리 삶의 괘적이 갖는 비애로움의 전형을 이룬다. 그러나, 그가, 그의 글이 살아남은 자로서의 수치스런 부끄러움을, 그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화평스러운 안위를 견디지 못해 갸날픈 한숨 조각을 내쉴 , 우린 긴장한다. 사회인으로서의 그와 시인으로서의 그가 벌이는 한바탕의 숨죽인 싸움이, 가려놓은 칸막이 사이로 흘끗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시인인지라 이렇게 드러난 부끄러운 싸움을 굳이 다시 감추려 들지 않는다.

 

김훈은 결코 부끄러운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글엔 삶의 비애와 사라져가는 것들의 회환, 자연질서가 갖는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는 있지만, 정작 인간 김훈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해, 그의 가슴을 통해 말해진 같은 문장들은 사실은 그의 것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었던 경우는 가난한 산골의 아이들이 번쩍거리는 그의 비싼 미제 산악 자전거를 부러워할 그가 느꼈다는무안함정도일 것이다.

 

그의 글은 유려하다. 그의 글엔 우릴 불편하게 하는 부끄러운 욕망과 현실의 싸움이 비잡고 나올 틈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깊은 울림을 갖는다. 그러나, 울림은 우리 자신의 부끄러움을 상기시킴으로써 생겨나는 불편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욕망할 것도 없는, 그래서 안전한 위치에 있는 우리가 양주를 마시듯 즐길 있는 편안한 울림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대해 모를 열정을 가질만큼 젊지도 않으며, 까닭모를 반항과 피해의식으로 세상을 향해 공격을 퍼부어 만큼 가난하지도, 못배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여행하면서 바라보는 삶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가 그 삶속에 배여있는 고통들에 직접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