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칸트가 1797년 출간한 „도덕 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에서 전개하고 있는 부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얼마나 과격하고도 센세이셔널한 것이었는가가 분명해진다. 칸트는 이 책에서 부부에 대한 전통 기독교적 가르침을 명백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당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의 혁명적인 부부관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칸트는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적으로 확립되어왔던 부부 관계의 목적에 의문을 제기한다. 부부란 정말 다만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인가? 이에대해 칸트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항상 자연의 목적일 수 있을지는 모른다...그러나 부부관계를 맺는 인간이 이 목적을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관계 맺음의 정당성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더 이상 아이를 낳지않게 된다면 부부관계는 곧바로 스스로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Kinder zu erzeugen und zu erzielen mag immer ein Zweck der Natur sein...aber dass der Mensch, der sich verehelicht, diesen Zweck sich vorsetzen müsse, wird zur Rechtmäßigkeit dieser seiner Verbindung nicht erfordert ; denn sonst würde, wenn das Kinderzeugen aufhört, die Ehe sich zugleich von sich selbst auflösen."[1]
기독교가 부부의 존립 목적을 아이의 산출로 국한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성이 갖고 있는 저 복잡한 문제들 때문이다. 충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비록 그들이 부부, 곧 서로 다른 성사이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육체적 쾌락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부부사이의 성교는 다만 후대를 잇기 위해서만 허용될 뿐이며, 오직 그것만이 부부의 목적이어야 했다.
정언명법의 철학자 칸트에게 이러한 종교적 가르침이 너무나 위선적으로 느껴졌던 것일까. 칸트는 부부를 성적인 것에 그 목적을 갖는 공동체의 하나로 본다. 이 „성 공동체 Geschlechtsgemeinschaft (commercium sexuale)„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성기관과Geschlechtsorgane 성적 능력들을 상호적으로 사용“„wechselseitigen Gebrauch, den ein Mensch von eines anderen Geschlechtsorgane und Vermögen macht."[2]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인간들은 다른 인간의 성기를 „사용“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성적 쾌락과 향유를 위해서다. „한 성이 다른 성의 성기를 사용하는 자연적인 성기의 사용은 곧 향유이다.“ „der natürliche Gebrauch, den ein Geschlecht von den Geschlechtsorganen des anderen macht, ist ein Genuss“[3].
무척이나 흥미로운 사실은 칸트가 이러한 성 공동체에 서로 다른 성, 곧 이성관계 뿐 아니라, 동성관계, 나아가 인간과 동물과의 성적관계까지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에게 이 후자, 즉 동성 관계와 수간은 ‚비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긴 하지만 말이다. „성 공동체에는...자연적인 (그를통해 자신과 동일한 존재를 산출해낼수 있는) 성기의 사용과 비 자연적 사용이 있다. 동일한 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성기의 사용이나 인간-종과는 다른 동물에 대한 성기의 사용은 비 자연적 성기의 사용이다.“ „Geschlechtsgemeinschaft ist ...entweder ein natürlicher (wodurch seines Gleichen erzeugt werden kann), oder unnatürlicher Gebrauch, und dieser entweder an einer Person eben desselben Geschlechts, oder einem Tiere von einer anderen als der Menschen-Gattungen“[4].이를 통해 우리는 이미 당시 칸트가 이미 동성적 성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과의 성적관계도 알고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동성관계와 동물과의 성관계를 비 자연적 성기 사용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칸트는 부부 관계라는 것이 다름아닌 성적 공동체임을, 말하자면 성적 향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관계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를통해 부부는 칸트에 의해 „서로 다른 성을 가진 두 사람 사이에, 그들의 성적 특성들을 평생동안 상호적으로 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맺어진 관계“ "die Verbindung zweier Personen verschiedenen Geschlechts zum lebenswierigen wechselseitigen Besitz ihrer Geschlechtseigenschaften."[5] 로 정의된다.
물론 칸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관계는 종교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사회적인 책임을 갖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쾌락을 위한 목적으로 서로의 성적 특성들을 상호적으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부부간의 계약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법칙에 의해 필연적인 계약이다. 다시말해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성적 특성에 따라 상호적으로 즐기려고 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부부관계를 맺어야 하며, 이는 순수 이성의 정당한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것이다.“ "Es ist nämlich, auch unter Voraussetzung der Lust zum wechselseitigen Gebrauch ihrer Geschlechtseigenschaften, der Ehevertrag kein beliebiger, sondern durchs Gesetz der Menschheit notwendiger Vertrag, d.i. wenn Mann und Weib einander ihren Geschlechteigenschaften nach wechselseitig genießen wollen, so müssen sie sich notwendig verehlichen, und dieses ist nach Rechtsgesetz der reinen Vernunft notwendig."[6]
부부가 더이상 신에 의해 맺어진, 그리하여 인간의 손으로는 해체되지 못할 그런 관계가 아니라 다만 성적 향유를 위해 만들어진 공동체라고 한다면,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부는 „인간성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인 계약“의 관계가 되어야 할까? 혹 칸트는 이 지점에서 다시 기독교적인 부부윤리에도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부부 계약에 관한 칸트의 요구는 그러나 신에 의해 맺어진 부부의 불가침성이라는 종교적 가르침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침해해선 안될 인간의 개체성이라는 칸트의 이념으로 부터 도출되어 나온 결론이며, 바로 이것이 칸트의 부부에 대한 생각을 종교적 윤리와 구별시켜 주는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다른 이의 성기를 사용“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사물화가 일어나는데, 이는 상호적인 사용과 소유를 보장하는 계약을 통해서만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조금은 패티시즘적으로 들리는 논증을 통해 펼쳐나간다.
칸트는 우리에게 성적 쾌락을 가져다 주는 대상이 사실상 한 명의 완전한 개인이 아니라 다만 그가 가지고 있는 „성기“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는 위의 성공동체에 대한 정의에서도 드러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적인 향유를 목적으로 하는 성 행위시에 우리는 성 행위 파트너의 성기만을 사용하는 것이다. 거꾸로 보자면 여기서 파트너의 성적 쾌락을 위해 자신의 성기를 제공하는 개인은 이를통해 자신 육체의 한부분으로 환원되어 사물화되는 것이다. „한 성이 다른 성의 성기를 사용하는 자연적인 성기의 사용은 곧 향유이다. 이때 한 명은 다른 이에게 자신 육체의 한 부분을 제공한다. 이 행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물로 만들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개인에 대한 인간성의 권리와 모순을 일으킨다. „ „Der natürliche Gebrauch, den ein Geschlecht von den Geschlechtsorganen des anderen macht, ist ein Genuss, zu dem sich ein Teil dem anderen hingibt. In diesem Akt macht sich ein Mensch selbst zur Sache, welches dem Rechte der Menschheit an seiner eigenen Person widerstreitet.“[7]
칸트에 의하면 성행위에 있어서의 이러한 인간의 사물화, 그를통해 일어나는 개체성의 훼손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통해서만 보상되고 상쇄될 수 있다. 곧,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 의해서 사물처럼 소유되고, 바로 이 개인이 다시금 그 상대를 소유함을 통해. 이렇게 함으로써만 개인은 다시 자기 자신을 되찾고 그의 개체성은 회복되게 된다.“ "dass, indem die eine Person von der anderen, gleich als Sache, erworben wird, diese gegenseitig wiederum jene erwerbe ; denn so gewinnt sie wiederum sich selbst und stellt ihre Persönlichkeit wieder her."[8]
성적 향유를 위한 성 행위란 자신 육체의 일부를 상대에게 제공하고, 자신은 또한 상대의 그것을 제공받는 상호적인 성기 소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러한 상호적이고 평등한 소유만이 성행위 시 발생하는 인간의 패티시즘적인 사물화를 극복하고 그를통해 손상된 인간성과 개인의 개체성을 회복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 조건인 것이다. 부부계약은 바로 이러한 상호성과 평등성을 사회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상대의 향유를 위해 한 성이 자신을 제공하고 제공받는 행위는 부부라고 하는 조건하에서만 유일하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며, 나아가 바로 이 조건하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folglich ist die Hingebung und Annehmung eines Geschlechts zum Genuss des andern nicht allein unter der Bedingung der Ehe zulässig, sondern auch allein unter derselben möglich.“[9]
[1]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2]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3]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4]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5]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6]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4.
[7]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8]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9] I. Kand : Die Metaphysik der Sitte,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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