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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페티시즘

김남시 2007. 3. 5. 07:07

 

프로이드에게 패티시즘은 성적 일탈 „die sexuellen Abirrungen“, 중에서도 성적목표에 있어서의 일탈 [1]이다. 페티시즘이 성적목표에서의 일탈 Abweichung’이라는 말은 무언가 정상적인 성적목표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프로이드에 의하면 정상적인 성적목표란 짝짓기라고 일컫어지는 행위 시에 일어나는 성기의 결합 Vereinigung der Genitalien“ 이며, „ 행위는 성적긴장을 해소시키고 성적충동 sexual Trieb 일시적으로 가라 앉히기 Erloeschen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다.“[2] 말하자면 페티시즘은 여러가지 외적 혹은 내적 조건들로 인해 상대방 성기와의 결합이라고 하는 정상적 성적 목표의 실현이 좌절되었을 등장하는 성적일탈이다.  

 

상대의 성기와의 결합을 목표로 하는 성적충동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던 억압되어 좌절되게 되면 충동은 자신이 좌절된 지점을 자신의 성적목표로 재설정[3]하게 되는데, 이를통해 본래의 성적 목표인 성기 대신 다른 대상이 자리에 들어서게 되고 이것이 패티시즘이라는 성적일탈을 낳는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발을 성적흥분의 대상으로 삼는 패티시즘은 원래의 성적 대상인 성기에 아래로부터 접근하려던성적충동이 금지나 억압을 통해 과정 중에 멈추어지게 됨으로써 패티시로써의 발이나 신발에 집착[4]하게 되어 일어난다. 여기서 발이나 신발은 곳에로의 도달이 억압되고 좌절된 성기의 대체물[5] 등장하며 이를통해 패티시즘적 성적 일탈자들에게 발이나 신발은 본래의 성적 대상인 성기 만큼이나 성적 충동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프로이드가 이런 패티시즘이 전적으로 병적인 것이 아니라 정상적 사랑관계에서도, 특히 사랑에 빠졌을 [6] 에도 고유하게 등장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페티시즘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의 모든 그의 손가락, , 다리, 머리카락 등의 육체의 특정한 부분 아니라 헤어 스타일, , 안경, 신발 그의 육체를 둘러싼 물건들, 나아가 그의 목소리, 걸음걸이, 웃는 혹은 커피를 마시는 모양 특정한 행동방식들 들에서 긴장과 사랑의 충동을 느끼는 흔히 우리가 눈에 콩깍지가 씌였다라고 말하는 - 데에도 작용하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사랑에 빠진 자를 긴장하고 흥분시키는 것은 성적결합을 위한 신체부분 , 상대의 성기 상대와 관련되어 있는 다른 대상들[7]로까지 넘쳐버림Überschreitung„ 으로써 생겨난 것으로, 이를통해 성기의 결합이라는 원래의 성적 목표엔 적합하지도 않는 Ungeeigneter“  대상들이 마치 성기인 것처럼 과대평가 Überschätzung„ 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  , 모든 사랑에 있어서 고유한 페티시즘은 본래 성적목표의 대상인 성기가 아닌 대상들에 가상적인 성기적 특성 투사됨으로써 대상들이 우릴 자극하고 흥분하는 성기적 대상으로 등장하는데 본질이 있는 것이다.

 

이런 프로이드의 이론을 염두에 둔다면 우린 프로이드가 자신의 논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파우스트의 대목 – „그녀 가슴에 매고 있는 목수건을, 그녀의 양말 대님을 내게, 사랑의 쾌락을 위해 마련해 다오.“ –  속에 함축되어 있는 깊은 성적함의를 감지할 있는데, 이런 페티시즘적 사랑의 표현은 그러나 괴테에게서만 발견되는 아니다.  <일방 통행로> 실려있는 아래 발터 벤야민의 짤막한 [8] 좌절된 성적목표의 대체물로 등장하는 페티시즘적 사랑의 대상이 사랑하는 자를 어떠한 긴장 속으로 몰아 넣는지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결점들에만,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 얼굴에 있는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헤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들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더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 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를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리 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걸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있다. 우리 눈을 못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 무리의 새 떼 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 속에서 펄럭이며 날아 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없는 제스쳐와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 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곁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바로 여기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화살처럼 빠르게 그를 동요시킬 경배자의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9]

 

프로이드의 사랑에 대한 패티시즘 이론을 마르크스의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에 대한 논의와 비교해 보는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그건 그를통해 마르크스의 사랑론이 가지고 있는 모순적 긴장감을 읽어낼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 마르크스에게 상품이 갖는 페티시즘적 성격은 원래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사용가치로 규정되던 물건들이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속에서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책상을 만들기 위한 나무라는 감각적 물건은 그것이 상품으로 등장하자마자 감각적이면서도 초감각적인 물건으로 변신[10] 하게 되는데, 그건 상품으로서의 물건이 노동시간으로 측정되는 거기에 투여된 인간의 노동력 생산자들의 관계라고 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눈에 보이지 않는 교환가치로써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통해 인간의 두뇌의 생산품들은 스스로 삶을 부여받은 것처럼 등장하게 되며, 서로 서로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자립적인 형태를 지니게 된다....나는 이를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자 마자, 그리하여 상품생산과 분리될 없게 되자마자 거기에 달라붙게되는 페티시즘이라고 부른다.“[11]

 

마르크스에게 있어 이런 상품 페티시즘은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속에서 보편적 상품[12]으로 등장하는 돈의 페티시즘과 직접적 연관을 가지고 있다. 돈의 페티시즘적 성격은 첫째, 다른 상품들의 교환을 매개해주는 매체에 불과한 돈이 마치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자체 속에 지니고 있는 것처럼 등장하게 되는 - „돈의 마술 Magie des Geldes! “[13]- 데서 드러난다. 말하자면 자체론 아무런 사용가치도 없는 금속과 종이 쪼가리(화폐) 그와 교환될 있는 다른 상품들의 가치를 대체함으로써 마치 자체로 상품들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과대평가되는 데에 돈의 패티시즘이 존재하는 것이다.

 

1844 <경제철학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이러한 돈의 패티시즘이 어떻게 돈의 소유자에게로까지 전이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와 교환되는 상품들의 가치가 자체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돈에로 넘쳐버림으로써 생겨나는 이러한 돈의 일차적 패티시즘 나아가 돈의 소유자에게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과 본질을 가상적으로 가지게 해줌으로써 패티시즘을 일으킨다. 

 

« 돈이 있는 , 그것이 , 돈의 소유자 자체다. 돈의 힘이 만큼 힘도 크다. 돈의 특성은 소유자의 특성이자 본질적 힘이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있는지는 결코 나의 인간적 특성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다. 나는 못생겼지만 가장 아름다운 부인을 있다. , 나는 못생기지 않은 것인데, 왜냐면 못생겼다는 사실의 작용이, 끔직한 힘이 돈에 의해 제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인간적 특성에 따라 절름발이이지만 돈은 내게 스물네개의 다리를 갖추어 주고, 따라서 나는 절름발이가 아니다. 나는 질이 나쁘고, 음흉하며, 양심과 생각이 없는 인간이지만, 돈이 추앙받는 소유자도 추앙받는다« [14]

 

돈으로 교환될 있는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자신 속에 체현하고 있는 돈의 페티시즘은, 여기에서 이제 돈의 소유자에게 원래 결핍되어 있던 특성과 본질들을 부여해주는 2차적 패티시즘으로 전이된다. 못생기고, 절름발이이며, 질이 나쁘고 음흉한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스물 개의 다리와 사람들의 추앙을 가져다 주게 하는 돈은 이를통해 원래 소유자의 인간적 특성과 본질에 적합하지 않은것들을 그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를 원래보다 과대평가되게 하는 패티시즘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크스가 돈의 패티시즘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곧이어 사랑에 대한 언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적 상품관계 속에서 돈의 패티시즘이 소유자의 인간적 특성과 본질을 과대평가하게 하며 그를통해 그의 본래적 특성과 본질에 상응하지 않는 허위적가상을 부여한다면, 인간에 대한 이런 허위적 가상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사랑 관계는 허위적이며 왜곡된 것일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 하에서 마르크스는 그가 비판하고 있는 패티시즘적 사랑관계에 대해 그의 인간적 사랑관계 대비시킨다.

   

« 인간을 인간으로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인간적인 관계로 전제한다면, 너는 사랑을 다만 사랑으로만 , 신뢰를 신뢰로만 교환할 있다. 너가 예술을 즐기고자 한다면, 자신이 예술적으로 교양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너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행사하려 한다면, 너는 실지로 다른 이들에게 자극을 주고 그들을 발양시키는 인간이어야 한다. 사람들 그리고 자연- 대한 너의 모든 관계들은 특정한 너의 의지의 대상에 상응하는, 너의 실제적인 인간적인 삶의 표현이어야 한다[15]

 

여기서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인간적 사랑관계 자본주의적 상품관계가 만들어내는 모든 패티시즘적 성격이 제거된 인간관계에 기초해 있다. 패티시즘의 본질이 대상 (혹은 인간) 원래 가지고 있지 않은 특성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장과 잉여의 창출 있다면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랑관계에선 원래 존재하지 않는 것을 허위적으로 과장시켜 그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잉여적 특성과 본질 만들어내는 패티시즘적 메커니즘은 제거되어야 한다. 속에서 인간의 모든 관계들이 자신의 실제적인 인간적 삶의 표현이어야 하는 , 사랑은 실제적 인간적 삶의 표현 온전한 만남이어야 한다. 

 

마르스크의 이러한 사랑관 속에 평등한 교환 대한 마르크스의 요구를 읽어내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가 꿈꾸는 인간적 관계 속에서 사랑이 다만 사랑으로만, 신뢰가 다만 신뢰로만 교환 있어야 한다고 말할 마르크스는 평등하고 인간적이어야 교환을 가로막고 왜곡시키는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본주의적 상품관계가 노동자의 노동력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불평등한 교환관계를 만들어낸다면, 그에 근거한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은 사랑이 다만 사랑으로만교환되지 못하게, ‘신뢰가 신뢰로만 교환되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극복되어야 것은 사랑을 사랑으로만, 신뢰를 신뢰로만교환되지 못하게 하는 자본과 상품의 메커니즘이지 교환 자체가 아니다. 마르크스가 꿈꾸는 사랑은 교환관계를 떠난, 이상화된 낭만주의적 사랑이 아니라 상품과 돈의 패티시즘을 통해 왜곡된 교환관계의 극복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등한 인간들 사이의 합리적이고 공평한 교환관계에 근거해있다. 바로 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유는 전적으로 근대적 특성을 갖는다.  

 

그러나, 패티시즘이 없는 사랑을 우리는 견뎌낼 있을까 ?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인간적 특성과 본질에만 의거한 평등하고 그래서 건조한교환으로서의 사랑은 우릴 불안과 좌절로 몰아가지는 않을까? 패티시즘적 과대평가 통해 보충되지 않는다면 과연 나의 못생기고, 절름발이이며, 결핍된 인간적 특성이 다른 이의 사랑을 불러일으켜 있을까 ? 패티시즘을 통해 매개되지 않은 나의 벌거벗은’ nuda 가치가 어떤 사랑과도 교환되지 못할 만큼 무가치한 것이라면? 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답은 냉혹하리만치 차갑다.

 

« 너가 사랑을 불러내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면, 너의 사랑이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생산해내지 못한다면, 너가 너의 사랑의 표현을 통해 자신을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기력하며ohnmächtig, 하나의 불행이다. »[16]

 

무기력과 불행을 견뎌 만큼 강한 자아를 갖고 있지 못한 우리들은,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육체를 수술을 통해 뜯어 고치고, 값비싼 명품들로 육체를 포장하며, 어떻게든 많은 돈을 벌려고 몸부림치면서 우리의 결핍된 자아를 패티시즘적 과대평가 보충하려고 한다.         

 



[1] 프로이드가 처음으로 페티시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1905)에서 페티시즘은  <성적일탈> Die sexuellen Abirrungen 이란 제목의 논문 두번째 성적 목표에 있어서의 일탈“ Abweichungen in bezug auf das Sexualziel 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2] S. Freud :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S.26.

[3] S. Freud :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S.32.

[4] S. Freud :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S.32.

[5] 프로이드는 발이 여자(어머니) 성기의 대체물로 등장할 있는 것은 여자(어머니)에게도 성기가 달려있을 것이라 믿는 유아적 성적환상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S. Freud :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S.32.

[6] S. Freud : Drei Abhandlungen zur Sexualtheorie, S.30.

[7] 성적목표의 본래적 대상인 성기와 성기의 대체물로 등장하게 대상들이 인접성을 중심으로 하는 환유적 관계 Metonymie 맺어져 있다는 것은 주지하듯이,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과 나아가 라깡의 성이론에서도 중심적 위치를 갖는다.  

[8] 벤야민이 글이, 본래적 성적목표, 성기적 결합이 좌절된 상대인 아샤  라시스를 향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우리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확인할 있다. 글은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벤야민이 자신이 연모하던 아샤 라시스에게 읽어주었던 첫번째 글이다. 발터 벤야민 <모스크바 일기> (김남시 ), 44 참조.  

[9] Walter Benjamin : Einbahnstrasse, S.20.

[10] Karl Marx : Das Kapital I, 4. Der Fetischcharakter der Ware und sein Geheimnis. S.65.

[11] Karl Marx : Das Kapital I, 4. Der Fetischcharakter der Ware und sein Geheimnis. S.67.

[12] Karl Marx : Das Kapital I, zweites Kapitel. Der Austauschprozess. S.82.

[13] Karl Marx : Das Kapital I, zweites Kapitel. Der Austauschprozess. S.84.

[14]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S. 193. Vg. MEW Bd. 40, S. 564.

[15]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S. 198. vgl. MEW Bd. 40, S. 567.

[16] Karl Marx: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S. 198. vgl. MEW Bd. 40, S. 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