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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아나키즘, 메시아주의: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김남시 2007. 3. 30. 22:50
LONG

벤야민에 의하면 혁명과 전복을 통한 인간 사회의 역사는 하나의 법을 세우는rechtsetzende 폭력몰락하고 다른 폭력에 의해 대체되어 온 역사에 다름 아니다. „모든 법을 지키는 폭력은 자신을 유지하는 동안 자신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repraesentiert ‚법을 세우는 폭력을 그를 위협하는 폭력들을 억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약화시키는데, 이를통해 새로운 폭력이나 이전에 억압되었던 폭력이 지금까지의 법을 세우는 폭력에 승리를 거두고 새로운 법을 그것 역시 새로이 몰락할 정초[1]하는 것이다.

 

폭력을 모든 법적 질서의 근원으로, 인간 사회의 역사를 법을 세우는 폭력의 몰락과 대체의 역사로 보는 발터 벤야민의 사상은 그러나, 그 외관상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나 아나키즘과 결정적으로 구별된다. 그건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이 현존하는 법적 질서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는 rechtsetzende, 신화적 폭력 mythische Gewalt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에 의하면, 부르조아 민주주의 국가건,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국가건, 아니면 푸르동이나 바쿠닌의 노동자 결사체 Assoziation’[2] 건 상관없이 신화적 폭력을 통해 세워질 새로운 법적질서는 인간의 단순한 삶(생존)das blosse Leben’[3]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를 넘어선, 인간의 신성함 die Heiligkeit des Menschen (Homo Sacer)에 걸맞는 살아있는 것 das Lebendige을 위한[4], „정당한 인간 der gerechte Mensch“[5]정의 Gerechtigkeit“의 도래를 약속하지 못한다. 그건 새로운 법질서 수립 Rechtsetzung 에 근거로 놓여있는 신화적 폭력은 자신이 목표로 하던 것 Bezweckten을 법으로 설정하는 순간 폭력을 폐위 abdankt하지 않으며..,폭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내적으로 폭력과 결부되어있는 목적을 권력 Macht의 이름 하에 법으로 정립[6]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법 질서의 수립이 이처럼 그를통해 정립된 법을 직접적 폭력의 과시 Manifestation’를 통해 보장해야하는 권력수립 Machtsetzung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한, 거기엔 평등 Gleichheit이 아니라 기껏해야 평등한 크기의 폭력들만이 존재[7]하게 될 것이다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이러한 신화적 폭력에 대해 순수한 직접적 폭력reine unmittelbare Gewalt“ 신적 폭력 göttliche Gewalt[8]을 대립시킨다. 신화적 폭력이 법을 세우고 rechtsetzend, 경계를 설정하고, 그를통해 인간을 빚지게 하고 verschuldend, 죄를 짓게 한다면 suehnend, 신적 폭력은 법 자체를 파괴하며 vernichtend, 경계를 없애버리고 그를통해 인간이 죄로부터 벗어나게 entsuehned 한다.[9] 법을 세우는 신화적 폭력이 필연적으로 그 법을 지키는 폭력을 통해 인간을 위협[10]하고 drohend, 피를 흘리게 한다면, ‚피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치사적 lethal’[11]인 신적 폭력은 법적 폭력 자체를 해소시킴으로써 인간을 법으로부터 해방시킨다. 

 

벤야민은 우리에게 저 신화적 폭력을 대처하고 도래해야 할 메시아적 신적 폭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를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만일 그가 저 메시아적 해방의 상태를 구체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면 그건 결국 신화적 폭력에 호소해야 하는 긍정적 유토피아 이념이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린 저 신적폭력이 주재하는 세계의 모습을 그의 언어이론을 우회해서 추상적으로 나마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언어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드러내는 순수한 이름언어 Namesprache와는 다른, ‚선과 악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대상을 판단하고 urteilend, 판결을 내리는 richtende, 수단으로서의 언어[12]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대상이 옳은가혹은 그른가를 말하는 판단의 언어는 인간이 원죄와 더불어 구체적인 것이 자신을 전달하던 직접성 (수단일 수 없음) Unmittelbarkeit,곧 이름을 떠나서 모든 전달의 수단화 (간접성) Mittelbarkeit의 심연, 곧 수단으로서의 언어, 무의미한 언어, 헛소리 Geschwaetzes의 심연으로 빠져듦[13]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이를통해 언어는 자신의 이름 속에서 스스로를 전달하던 직접성을 상실하고 자신 외부에 있는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대상을 옳은 것그른 것’, ‚선한 것악한 것으로 판정하는 언어 이는 법의 본질이기도 한데 - 는 그 언어를 그 언어 외부에 존재하는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유지하고 강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다. 이는 신화적 폭력을 통해 수립된 특정한 법 질서 내에서 폭력 - 법을 지키는 폭력 이 자신의 목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과 동일히다. 여기서 신화적 폭력의 목적과 그를 실현시키기 위한 수단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이는 법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화적 폭력과 더불어 법 자체를 해소시키는 신적 폭력은 폭력을 수단으로 해서 지켜야 할 목적을 자기 외부에 따로 가지고 있지 않다. 신적 폭력이 자신의 순수한 직접성을 발양하고 드러내는 것Manifestation은 그 자체가 이미 신적 질서라는 목표가 실현되고 있는 상태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이 다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전환시키는 schlatende“ 폭력이라고 한다면 신적 폭력은 „waltende“[14] , „주재하면서 지배하는폭력이라고 부른다.    



[1]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202.

[2] Daniel Guérin : Anarchismus. Begriff und Praxis. S.40.

[3] 이런 단순한 das nackte Leben 최고의 정치적 척도와 목표로 내세워졌을 생겨나게 위험성을 Giorgio Agamben 나찌즘과 파시즘의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경고하고 있다. G. Agamben : Homo Sacer, S.20. 그러나 이는 혁명 소비에트의 생존과 존속을 위해 사회주의 혁명의 이념을 후퇴시키고 히틀러와 조약을 맺었던 소비에트 스탈린 정권에도 동일하게 해당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트로츠키는 혁명기지의 공고화라는 미명하에 국제 혁명의 목표를 포기한 스탈린의 일국적 사회주의모델이 어떻게 필연적으로 소비에트 관료조직의 보수화와 일국적 메시아주의 nationaler Messianismus’ 귀결되는지 날카롭게 비판한 있다. Leo Trotzki : Die permanente Revolution, S.152.              

[4]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200.

[5]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201.

[6]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8.

[7]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8.

[8]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9.

[9]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9.

[10] „die rechtserhaltende Gewalt ist eine drohende.“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88.

[11]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9.

[12] Walter Benjamin : Über Sprache überhaupt und über die Sprache des Menschen, GS II-1, S.153.

[13] Walter Benjamin : Über Sprache überhaupt und über die Sprache des Menschen, GS II-1, S.154.

[14] 쟈크 데리다는 벤야민의 마지막 문장에 등장하는 단어 waltend 벤야민의 이름 Walter 연결시키고 있는데 - Jacque Derrida : Gesetzeskraft. 1991, S.114  - 이는 벤야민이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의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내용없는 수사학적 기교라는 인상을 주지 않을 없다. 그건 Walter라는 이름 자체가 walten – 지배하다, 주재하다 - 이라는 동사에 어원을 갖는 주재자 혹은 지배자라는 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사 walten 을 벤야민의 이름 Walter 와 연결시키는 데리다의 이 제스쳐가 갖는 부조리함은 그가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폭력과 나찌의 최종 해결책Endloesung“,유대인 말살 사이의 내연적 유사성을 지적하는 지점 위의 책, S.123 –  이르면 최고에 달한다. 그렇다면 벤야민은 비밀리에 자신을 메시아적 신적 폭력의 주재자 혹은 설파자로 정의함으로써 결국 나찌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도 내적 책임이 있다는 말인가. 책에서 해체주의자 데리다는 벤야민 이론에 내재되어 있는 아나키즘적 비판주의에 맞서 현존하는 질서와 도덕을 옹호하는 보수 주의자로 등장하고 있다.  

ARTICLE

 

벤야민의 글 <폭력 비판을 위하여>에서 폭력일반에 대한 평화주의적, 반폭력주의적 논거를 얻으려 하는 사람은 크게 실망하고 돌아설 것이다. 오히려 그는, 폭력을 인간 사회의 법[1]적 질서의 근원적 출발점으로 삼고도 모자라 (신적)폭력의 도래를 메시아적 질서를 통해 이루어져야 할 정의의 근본으로 자리 매김하려는 벤야민의 의도에 놀라움과 경악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이 글의 제목 - „폭력비판“ - 이 연상시키는 것과는 달리 이 글 속에서 등장하는 벤야민은 모든 종류의 폭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를 휴머니즘적 관점에서 비판하는 나이브한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벤야민은 여기서 폭력적 수단말고 사람들 사이의 서로 대립되는 이해관계의 조정을 위한 다른 수단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이며 나아가 사실상 모든 법적약속 Rechtsvertrag은 그 근본에 있어 폭력에 기인[2]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모든 법적약속은 그 당사자들에게 상대가 그를 위반하게 될 경우 그에게 어떤 형태로의 폭력행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3]를 부여하고 있으며 법의 효력은 바로 그런 폭력에의 약속에 의거해서만 발휘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벤야민은 사람들 사이의 사적 Privatpersonen 관계에서 생겨나는 갈등을 원리적으로 폭력을 차단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속에선 원리적으로 폭력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언어[4]에서 찾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 언어도 그를통해 속아 넘어간 사람이 그를 속인 자에게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까지 배제하지는 못하며 이로인해 법은 그 전엔 법적 판정의 소관이 아니었던 거짓말과 남을 속이는 일까지 법으로 금지[5]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모든 법적 질서들이 사실상 폭력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하여 현재 통용되는 법 속에는 저 근원적 폭력이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벤야민에게 있어선 휴머니즘적, 평화주의적 관점에서 비판되거나 역사철학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벤야민은 한 국가의 모든 법과 제도들의 근원을 이루었던 폭력 그가 법을 세우는 폭력rechtsetzende Gewalt 이라 부르는 – „법 제도 속에서 잠재적으로 계속 현존하고 있다는 의식이 사라져 가는 것쇠퇴 Verfall의 과정[6]이라고 본다. 그가 저 근원적 폭력의 역사적 기능의 쇠퇴[7]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핵심인 의회 Parlament인데, 벤야민이 보기에 원리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자 국민의 결정권을 대변하고 있는 의회는 오늘날, 자신이 부르조아 혁명이라는 법을 세우는 폭력에 근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신의 근원적 폭력의 의미를 망각하고는 정치적 결정에 있어 모든 폭력적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한 애처러운 연기 jammervolles Schauspiel“[8]를 벌이고 있으며, 그를통해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타협안들만을 양산해 내는 기구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잊혀질 만하면 서로 물리적, 폭력적 난투를 벌임으로써 의회의 폭력적 근원을 상기시켜주는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철학적 차원에서도 세계에 내세울 만한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들이 몸을 날리면서까지 벌이는 저 애처러운 연기의 결과물이 폭력없는 유럽 의회의 타협안들보다 훨씬 못한 찌꺼기 타협안만 아니라면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하는 벤야민의 입장은 따라서 군대나 경찰의 폐지를 주창하는 평화주의자나 아나키스트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벤야민에 의하면 경찰은 한 국가 내에서 통용되고 있는 법을 그 내부로부터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법을 지키는 폭력 rechtserhaltende Gewalt’의 대표적 사례다. 평화주의자들에게 경찰이 법으로 보장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폭력적 국가기구로, ‚절대적 자유를 위해 모든 공공적 법적, 제도적 질서와 기구들을 철저히 파괴[9]하기를 주창하는 아나키스트에겐 부르조아 국가의 본질적 억압성을 대변하는 존재로 여겨졌다면, 벤야민에게 경찰은, 폭력은 타당한 목적의 수단으로써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도그마가 근본적 모순관계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폭로해 보여주는 사례다.

 

법치 국가에서 경찰은 이미 법을 세우는 폭력rechtsetzende Gewalt에 의해 - 만들어져 통용되고 있는 법을 지키는 폭력이다. 그러나, 수많은 특정한 상황들 속에서 경찰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모두 일일이 규정하지 못함으로 해서 법은 경찰에게 구체적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권한 (Verordnungsrecht)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를통해 원리적으로는 법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경찰의 폭력은 동시에 많은 경우 그 법을 넘어서 있다. 이처럼 법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법을 초월해 있는 경찰의 폭력은 이를통해 사실상 법을 지키는 폭력법을 세우는 폭력사이의 본질적으로 불명료하고 경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10]

 

여기서 벤야민은 경찰에게 법의 내부에서허용된 폭력만을 행사하기를 요구하는, 그리하여 법을 넘어서는 경찰의 폭력을 그 법의 이름으로 처벌하기를 – „폭력경찰 처벌하라!“- 요구하는 법치 주의적 폭력 비판자가 아니다. 벤야민의 입장은 이러한 체제 내적 폭력비판을 훨씬 넘어서 있다. 그건 벤야민이 폭력을 모든 인간의 법적질서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절대화시키고는 거기에 메시아적, 신적 폭력의 임재를 대립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폭력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이면서 동시에 초월적인 성격과 관계한다.

 

모든 법적 질서가 그 근원에 있어 폭력에 기초해 있다면 그 법적 질서들은 자신을 세우기 위해 행사되었던 과거의 폭력 rechtsetzende Gewalt을 자신의 현재적 타당성을 통해 정당화시키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현재 행사되고 있는 폭력이 수단으로써 정당하냐 아니냐는 물음은 그 폭력이 법을 세우는 데 성공하느냐 마느냐 라는 미래적 결과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은 수단으로써의 폭력의 정당함Berechtigung운명적 폭력자체가 결정한다[11]고 말한다. 다시말해, 현재 통용되고 있는 법적질서들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저 근원적 폭력을 자신의 현존을 통해 정당화시키고 있다면, 이러한 법적질서에 맞서는 모든 폭력들의 정당함은 그것이 현존하는 법 질서를 무효화하고 새로운 법을 세우는 rechtsetzende 폭력으로 전환됨으로써 획득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국가는 그 어떤 것보다 현존하는 법질서에 대항하는 폭력에 대해 날카롭게 대응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통해 폭력은 현재의 법 질서를 언제라도 예외상황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주권자적 잠재성 Potenz[12]을 지니게 된다.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벤야민은 이러한 사정을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위 예외상황 Ausnahmezustand“이 사실상 예외가 아니라 현재에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는 상례적인 것 Regel’[13]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폭력은 한 국가의 법 질서 내부에 존재하면서도 순간 순간 그 법질서 자체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예외상황을 결정함으로써 법에 의해 규정되면서도 동시에 그 외부에 위치하는 Carl Schmitt의 주권자 der Souveraen[14]는 이제 벤야민에게선 현존하는 법 질서에 맞서 새로운 법을 세우는 폭력을 대립시킴으로써 끊임없이 예외상황을 만들어내는 집합적 주체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아나키스트 등 - 로 등장한다. 법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법을 넘어서 있는, 법을 지키면서도 erhaltende 동시에 법을 세우는 setzende 경찰의 폭력은 현존하는 법 질서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예외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국가의 필수적인 방어무기인 셈이다.

 



[1] 일반적으로 으로 번역되는  Recht 동시에 도덕적이고  법적인 권리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소문자로 쓰여져 recht 특정한 목적에 적합한“, ‚올바른’, „사실에 부합하는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벤야민의 글에 등장하는 단어는 위의 모든 의미들을 내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0.

[3]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0.

[4]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2. 언어 속에서 원리적으로 폭력을 차단하고 배제하는 갈등해결 수단을 발견하는 이런 벤야민의 생각으로부터 하버마스가 언어적 의사소통 이론을 발전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J. Habermas : Bewußtmachende oder rettende Kritik. Die Aktualität Walter Benjamins.     

[5]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2.

[6]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0. 주지하듯 이는 벤야민이 Carl Schmitt 정치이론을 수용함으로써 생겨난 생각이다. Carl Schmitt 1970년에 책에서도 근대 민주주의가 정치체제로 자리잡은 이후 권력이 인간의 의지에서 벗어나 기계처럼 자립화됨으로써 일어난 권력의 쇠퇴현상을 인간으로부터 권력의 소외라고 부정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Carl Schmitt :  Gespräch über die Macht und den Zugang zum Machthaber, 1994 Berlin, ff.29.  

[7]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9.

[8]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0.

[9] 예를들어 Michail Bakunin : Die Prinzipien der Revolution (1869) in Staatlichkeit und Anarchie, S.103.

[10]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89.

[11] Walter Benjamin : Zur Kritik der Gewalt, GS II-1, S.196.

[12] Giorgio Agamben 법적 질서의 내부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외부에 있는 주권자의 패러독스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자 Potenz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벤야민에게서 폭력이 갖는 내재적이면서도 초월적 성격과도 상통하고 있다. Girogio Agamben : Homo Sacer, ff.50.

[13] Walter Benjamin  :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VIII.

[14] Carl Schmitt : Politische Theologie. Vier Kapitel zur Lehre von der Souveränität, München & Leipzig 1934. S.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