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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된 믿음은 기독교 만의 것인가. 지젝의 <인형과 난장이>

김남시 2007. 9. 16. 06:17

 

 

지젝은 오늘날의 믿음을 소위 유예된 suspendierte/혹은 부인된 geleugnete믿음으로 특징지운다. 그건 나는 정말로 그걸 믿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문화의 부분으로 그를 행한다.“[1]라는 태도로 정식화된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가고, 세례를 받고, 곳에서 결혼을 하고, 나아가 죽어 교회 묘지에 안장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교회와 성경의 가르침들을 진지하게 실지로 믿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나는 안다, 그렇지만…„이라는 아이러니적 태도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대자적인 반성적 태도) 가지고 그들의 삶의 상징적 질서에 속하는 모든 종교적 활동들을 자상한 남편이자 모범적 직장인등의 역할을 연기하듯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지젝이 말했듯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실습하고 있는데, 다시말해 우리의 일상적 실천에 근거로 놓여있는 구조로써의 믿음에 의지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믿음에 대해 조롱하고 있다.“[2]

 

그런데, 오늘날 믿음이 이상 자신의 진지한 삶의 가치관이 아니라 다만 하나의 문화처럼 실습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은 단지 서구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니면 유예되고, 부인된 형태로만 유지되는 믿음은 이슬람을 포함한 다른 종교들에도 해당되는 것일까?  질문에 대해 지젝은 일견 후자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하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 대한 담론들이 전제하고 있는진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타자라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자살테러를 벌이는 이슬람인들은 우리가 그들에 대해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후에 70명의 처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파라다이스로 것이라고 정말로 진지하게 믿고있는주체들이 아니라, 오히려 회의와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 봉착해 그들의 믿음을 과시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나려는[3]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회의적 주체들이다. 그들 역시 믿음과 관련해 우리 만큼이나 불확실하고 유예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 „나는 내가 정말로 믿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를 희생시키는 행위를 통해 나의 믿음을 증명하려 한다“ – 따라서 그들을 우리와는 다른 너무 진지하게 믿고있는 자들이라고 여기는 것은 타자들을 무엇인가를 알고있는 것으로 상정된 주체 the subject presumed to know“ [4] 변모시키는 이데올로기다.   

 

지젝이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듯 실지로 오늘날 서구를 위협하고 있는 이슬람 테러를 그들의 근본주의적이고, 반성적, 비이성적인 믿음 연결시키는 배후에는, 자신들을 합리적 이성 자리에 위치시키고 비유럽의 타자들을 반대편에 세워놓았던 유럽 중심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이미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서도 찾을 있는 유럽의 뿌리깊은 이슬람주의는 유럽 중심주의적 역사철학을 거치면서 이슬람을 계몽적이고 반성적인 이성에 대립하는 전체주의적이고 열광적인 비이성적 종교로 낙인찍었는데, 예를들어 <역사철학강의>에서 헤겔은 모하메드주의 Mohammedanismus 단지 알라 하나를 섬기는 것을 유일한 궁극목적으로 하며 그를 거대한 열광으로 추구하는 광신주의 Fanatismus“ [5] 종교라고 규정한다. 오늘날 서구 사회가 이슬람 테러의 원인을 사회, 역사, 정치, 경제적 맥락 속에서 찾는 대신 끊임없이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의 근원주의적인 비합리성과 과격함에서 찾으려 하는 데에는 예를들어, 얼마전 교황의 이슬람 발언처럼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작용하고 있다.     

 

유럽 중심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지젝이, 이슬람 종교인들에게 맹목적인 믿음 전가하는 대신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유예되고/부인된 믿음 가진 존재라는 인정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정당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유예되고/부인된 형태로, 아이러니적 태도를 통해서만 실행되고 유지되고 있는 믿음은 단지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상 지구적 상황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말하자면 오늘날 유럽의 기독교도 아니라 불교인, 이슬람인, 힌두교인 모든 다른 종교인들 역시 이상 이전과 같은 진지하고 확신에 믿음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는, 매해 빠뜨리지 않고 제사와 차례를 지내면서도 그렇다고 정말 조상의 혼이 음식을 흠향하러 온다고 믿지않으며, 입시를 앞두고 드리는 어머니의 불공이 정말 수능 점수를 늘려줄 것이라고 믿지않는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도  확인할 있는 일이다. 이처럼 유예되고/부인된 믿음 형태가 단지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면, 지젝처럼 그것의 역사적 기원을 유대교/기독교적 전통에서 일어난 어떤 단절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출발에서부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이는 근대 이후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마법화과정의 결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은 이러한 유예되고/부인된 믿음의 형태가 전적으로 기독교만의, 보다 정확히 말해 파울루스에 의해 이루어진 유대교와의 단절로부터 이루어진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는 소위 근원적 기독교 신비주의적이고 이교도적인다신론적, 나아가 유대교적 전통으로부터 구별하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과제는 그리스도를 신비화하는 기독교 전통으로부터 진정한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시켜 내는 것이다.“[6]  지젝이 구제해내려고 하는 이러한 진정한 기독교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을까? 지젝에 따르면 그건 파울루스 성자를 통해 기독교가 이전까지의 모든 형태의 공동체주의와 단절함으로써 처음으로 내에서 모든 인종적 차이들이 힘을 갖지 못하는 자유로운 믿는 자들의 공동체[7] 만들어냈다는데에 있다. „인종적 차이와 무관한 믿는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 통해 기독교가 유대 민족만의 민족 종교에서 보편적인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자체는 전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새로운 것은 이에대한 지젝의 라캉적/정신분석적해석에 있다. 흥미로운 해석에 따르면 유대교적인 인종적 공동체에서 기독교적 자유로운 믿는 자들의 공동체로의 전환은 거대한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그와 관련해 생겨나는 집단적 죄의식으로부터 공동체를 벗어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다.    

 

유대적 또는 신비주의적이고 영지주의적 전통(지젝은 이들을 서로 엄밀히 구별하지 않는다!)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음란한 거대 타자의 욕망 작동시킴으로써 공동체를 아버지 살해라는 집합적 죄의식에 묶인 운명 공동체[8] 만들고 있었는지, 그리고 파울루스는 어떤 전략을 통해 유령적이고 비밀스러운 유대적 새로운 기독교적 사랑으로 전환시켰는지에 대해 지젝은 수많은 저자들을 인용(도용[9]?)해가며 어지럽게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이에대한 상세한 소개는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타자가 나에게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정작 그의 욕망이 무엇인지는 모르는[10] 상황을 만들어냄으로써 공동체가, 스탈린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던 소비에트 시절처럼, 내부의 개인들을 유령적이고 판타스마틱한초자아의 지배하에 묶어두는 이러한 메커니즘에 대해선 이미  <Homo Sacer> (이탈리아어 초판 1995, 독일어  2002)에서의 조르지오 아감벤이 훨씬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아감벤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positiv내용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규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명료하고 모호하게 그들을 향해 등을 돌림 abbandono“으로써 오히려 사람들을 강하게 주권자의 속박 Bann 묶어두는 법의 [11] 대해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이를 카프카의 단편들을 통해 구체화시켜 있다. 주지하듯 카프카의 세계 속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배하에 있는 법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의식하고 있지만 정작 그들에겐 법의 구체적 내용은 숨겨져 있는 비밀’(„Zur Frage der Gesetze“)이며, 그를 알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 좌절당한다. („Der Prozess, Schloss“) 우리를 향해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곳에로의 접근이 차단 („Vor dem Gesetz“)되어 있는 ,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말하기가 기대되는 곳에서 오히려 침묵하고 있는 („Das Schweigen der Sirenen“) 법은 그러나 바로 그러한 열려있는 성격으로 인해 커다란 힘으로 사람들이 법의 이름앞에 속박되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을, 오직 자신만 (Vor dem Gesetz) 호출하는 법에 응답하고 그에 다가가려는 와중에 오히려 이전엔 없었던 죄의식 얻고, 바로 죄의식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판결을 받아들인다. 어느날 아침 난데없이 체포되는 K 결국 끝까지 알아내지 못하는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기위해, 동시에 자신의 결백 (결백? 무엇으로부터?) 밝히기 위해 벌이는 반응 속에서 오히려 죄의식을 얻으며, 법의 성문 앞에 있던 시골 사람은 바로 열려있는 성문으로 인해 법의 속박 Bann 붙들려 죽을 때까지 곳을 떠나지 못한다.[12]

 

그렇다면 지젝이 유대교적이자, 신비주의적 전통과 관련시키는 이러한 법의 힘으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벗어날 있을까? 파울루스의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가 이러한 유대적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믿는 자의 공동체 달성하기 위해 채택한 전략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건 법을 파괴적으로 부정하거나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거리를 취함[13]으로써 법이 스스로 보류되고 힘을 잃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지젝에 의하면 이것이 고린도 1 7 29절에 등장하는 파울루스의 가르침이었다. „모든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던 상태를 유지하십시요형제 여러분, 내말을 명심하시오.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것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것처럼, 즐거워하는 사람은 즐거워하지 않는 것처럼, 물건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세상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자는 이득을 얻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십시오. 그건 세상의 본질이 몰락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14] 카니발적인 도취에서처럼 존재하는 사회적 규범과 법을 과격하게 탈각시키는 이교도적 방법과는 달리 마치 그를 따르지 않는 듯이 법을 따르라[15] 말로 정식화될 있는 이러한 유대적-파울루스적인 방법, 지젝에 의하면 바로 이것이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적 법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결국 법의 힘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던 전략이었다.  

 

마치 그를 따르지 않는 듯이 법을 따르라 이러한 파울루스적 전략과 오늘날의 유예된 믿음의 형태, „나는 진지하게 그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단지 하나의 문화로써 그를 따른다.“ 사이에 그리 간격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거대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획득하려던 기독교의 전략은 커다란 사회, 역사적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 아이러니적 거리감을 가질 없었던 카프카의 등장인물들이 너무도 진지하게 내용조차 알지 못하는 법의 제스쳐를 따르고 있었다면, 오늘날의 종교인들은 종교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그런 자기 자신에 대해 조롱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커다란 반성적 거리감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또한 많은 사람들이 우려스럽게 종교의 위기 이야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젝은 아이러니할 정도로까지 반성적이 믿음을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16] 입장에서 환영하고 있으며, „정말 우리는 신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17]라는 마지막 질문을 통해 암시하듯 궁극적으로는 그런 믿음 자체를 해소시키길 원하는 보인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종교비판이 지젝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지젝이 책에서 취한 전략은 내가 보기엔 무척이나 모순적이고 혼란스럽다. 지젝의 입장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종교가 진리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고 있다는 관점에서 진행되어온, 맑스에까지 이어지는 계몽주의적 종교 비판의 토대를 떠나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에 대한 비밀스러운 향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민주주의자와 좌파 지식인들을 모두 비판하면서도 스스로를 진정한 유물론자 칭하고 싶어하는 지젝, 모든 종류의 소외를 지양해 사회를 자기 자신에게 투명한 신체로 만들려는 맑스주의적 비판[18] 맞서 상상적 픽션[19] 최소한의 소외 상징적 질서의 불가결한 조건으로서 옹호하려는 지젝의  내가 보기엔 자기 모순/자기 분열적 태도는 그의 종교비판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지젝이 서구화된 불교 스즈끼의 불교“, 나아가 거대 타자의 욕망에 붙들려 있는 유대적 공동체 비판하면서 보여주는 계몽주의적 종교비판의 제스쳐는, 기독교적인 단절 갖는 유일 무이성 자기 반성성 강조하는 태도로 이어지고 있는데, 메시지는 결국 다른 모든 종교들도 파울루스의 기독교적 단절의 모범을 따라 스스로를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지젝의 현란한 외적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지젝의 메시지는 이러한 점에서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헤겔적 유럽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 육화한 , 예수를 통해 비로소 정신이 속에서 반성적 자기의식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기독교를 유일한 계시종교Die offenbare Religion „  이해하는[20]  종교에 대한 헤겔적 유럽 중심주의를 지젝은 라캉적 담론 재포장해 내놓고 있는 것이다.

  

사족 : 책에 보론으로 붙어있는 오늘날의 이데올로기라는 제목의 글은 조금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Überraschungsei 대한 지젝의 사변으로 시작한다. Überraschungsei 달걀 모양으로 뒤덮여 속엔 작은 장난감이 들어있는 초콜렛으로 독일의 모든 슈퍼나 가게의 계산대 옆에 진열되어 있다. 책의 한국어 번역자가 단어를 어떻게 번역했을까가 정말 궁금하다. 그는 Überraschungsei 먹어 보거나 가지고 놀아 적이 있었을까?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에서 스스로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이, 현재는 박물관에 있는 카이저 파노라마 들여다 보지 않은 사람이, 쿠르메 거리에 있는 수영장을 방문해 보지 않은 사람이 모든 장소들에서 이루어진 어린시절의 기억을 회고하고 있는 발터 벤야민의 <베를린의 유년시절> 제대로 이해해 번역하기 힘든 것처럼, Überraschungsei 직접 보거나 체험해보지 않은 사람은Überraschungsei 가지고 벌이는 지젝의 사유의 곡예 비어있는 내부, 초콜렛을 성급하게 뜯어내는 아이들, 속의 작은 장난감 등등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텐데...         

 

 

   

 

    



[1]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Das Christentum zwischen Perversion und Subversion, Shurkamp 2003, S.9.

[2]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60.

[3]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61.

[4]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61.

[5] G.W.F. Hegel : Vorlesung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S. 428 ff, Der Mohammedanismus.

[6]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1.

[7]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34.

[8]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34.

[9] 1991 독일어본이 출판된 < 증후를 자신처럼 사랑하라 Liebe Dein Symptom wie Dich selbst>  1976 출판된 오스트리아의 정신치료학자 Paul Watzlawick <실제는 얼마나 실제적인가 Wie wirklich ist die Wirklichkeit> 사이에는 지젝이 책을 참조하고 읽었음에 분명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많은 유사점들이 존재한다. 예를들어 지젝은Watzlawick 어떻게 과거를 회고하는 우리의 현재가 과거에 사후적으로 영향을 끼칠 있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인용(S.232)하고 있는 Fredric Brown 소설 <실험> 동일 문단을 유사한 맥락에서 인용(S.18-19)하고 있으며, 또한 지젝의 카프카 인용과 그에대한 해석은 Watzlawick   책에서 인용하는 카프카의 < 앞에서> 매우 유사한 논의를 전개시키고 있다. 나아가 Watzlawick 책에서 증권 시세가 오를 것이라는 소식 실지로 증권가격을 상승시키거나 어떤 물건이 부족해질 것이라는 소문이 사재기를 부추켜 실지로 물건이 부족하게 만드는 등의 사례를 통해 인간의 심리가 어떻게 실제 자체를 불러낼 수도 있는지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또한 지젝이 유사한 사례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 증후를 사랑하라> 에서 한번도 Watzlawick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다만 우연적인 것이었을까? 그러나 지젝이 올해 사망한 대중적 심리치료/철학자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형과 난장이>에서 지나가면서 그의 이름을 슬쩍 언급 (S.26)하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10]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33.

[11] Giorgio Agamben : Homo Sacer, Die souveräne Macht und das nackte Leben, 2002, S.39ff.

[12]  아감벤은 카프카의 < 앞에서>에서 결국 법의 문을 닫히게 했던 시골사람의 끈질기고 참을성 있는 전략 법의 속박 Bann으로부터 벗어날 있는 가능성으로  읽고있다.  Giorgio Agamben : Homo Sacer, Die souveräne Macht und das nackte Leben, 2002, S.66 ff. 

[13]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14.

[14]  I. Korinther 7.20, 7, 29-31.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13.

[15]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15.

[16]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8.

[17]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90.

[18]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80.

[19] Slavoj Zizek : Die Puppe und der Zwerg. S.173.

[20] G.W.F. Hegel : Phänomenologie des Geistes, S. 552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