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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사적소유, 폭력 (2)

김남시 2007. 10. 23. 03:18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와 폭력  

 

맑스가 <소위 시초축적> 장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본원적 사적소유 생겨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생겨나게 되었는가이다. 부지런한 개인의 노동에서 기원한 본원적 사적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권리 Naturrecht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맑스는 정치 경제학자들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관련해 맑스는 이들 정치경제학자들과 단호히 결별한다. 정치경제학자들이 소위 시초축적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본원적 사적 소유의 정당한 역사적 계승물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를 정당화시키려 하는데 반해, 맑스는 전자와 후자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과 불연속,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주장을 반박한다.

 

맑스에게 있어 본원적 사적소유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사이의 단절과 불연속은 무엇보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행 과정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에서 드러난다. 맑스에 의하면, 개인적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본원적 사적소유가 해소되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이행되는 과정엔 약탈, 종속, 강탈 살해 마디로 폭력이 커다란 역할을 수행[1]하였다. 그러한 폭력의 구체적 사례로 맑스는 15세기 이후 영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들을 제시한다. 어떻게 농민들이 무자비한 폭력과 약탈, 파괴를 통해 자신들의 토지로부터 축출되었는지, 그렇게 쫓겨나 걸인이 이들이 어떤 무시무시한 법령과 고문을 통해 임금 노동자로 규율화되었는지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역사 과정들이 보여주는 폭력성 맑스의 이론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정치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의 자연적 권리인 본원적 사적 소유와는 아무런 동질적 연속성도 가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의 폭력적 억압, 축출, 파괴, 부정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라는 말하기 위한 것이다. 본원적 사적소유에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의 이행이 이러한 폭력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나아가, 이행과정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 필연성에 반하는 인위적 개입과 조작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드러낸다. 개인의 노동에 의거한 본원적 사적소유가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자연적 권리로써 자체로 정당성을 지니고 있는 반해, 본원적 사적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이행하는 과정은 그와 같은 자연적 권리를 폭력적으로 약탈하고 억압함으로써 이루어진 자연적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생겨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자체로 자연적정당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에서 맑스가 자연권이라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관점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이러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부정Negation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소유에로의 이행을 자연과정의 필연성 의거해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데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맑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생산과 전유과정, 따라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das kapitalistische Privateigentum) 개인적이고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사적소유 (des individuellen, auf eigene Arbeit gegründeten Privateigentums) 첫번째 부정 Negation 이다. (이제) 자본주의적 생산은 스스로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mit der Notwendigkeit eines Naturprozesses자기 자신의 부정을 생산해낸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 Negation der Negation이다. 부정의 부정은 개인적인 소유 das individuelle Eigentum 다시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협업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협동 그리고 토지와 노동 자체를 통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의 근거 위에서이다.“[2]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가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의해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생겨나게 새로운 소유관계 자본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에 근거한 개인적 소유! - 자연과정의 필연성 통해 일어날 것이며, 따라서 이는 본원적 사적소유에 대한 폭력적 억압에 기초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와는 달리 스스로 완전한 정당성을 갖는 소유형태다. 본원적 사적 소유의 폭력적, 인위적 부정(첫번째 부정)으로 생겨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는, 자연 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일어나는 두번째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 자신의 잘못된 출생의 오점을 지양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다!  

 

폭력과 노동  

 

맑스의 이러한 논의는 많은 이론적, 실천적 물음들을 제기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새로운 사회적사적소유로 스스로를 부정하는 과정이 자연 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면 여기엔 아무런 폭력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때 요구되는 혁명적 폭력은 본원적 사적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이행할 요구되었던 폭력과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전자의 폭력이 자연과정의 필연성 이루기 위한 일종의 자연적, 따라서 정당한 폭력이라면, 후자의 폭력은 자연과정의 필연성 훼손시키는 인위적이고 정당하지 못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하지만 누가, 그리고 어떻게 폭력의 눈에 보이지 않는질적 차이를 구분하고 판가름할 것인가? 발터 벤야민의 폭력론[3] 관통하고 있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잠시 보류해두고, 우리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지양하고 도달된다는  새로운 소유형태를 지니는 사회가 어떤 모습의 사회일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자신의 노동에서 기인하는 본원적 사적소유가 맑스에게서도 인간의 자연적 권리로 인정되고 있는 ,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 근거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 권리에 대한 폭력적 억압과 부정에 의해 이루어진 것인 , 그런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지양하려는 움직임들은 훼손당한 본원적 사적소유를 회복하기 위한, 그리하여 폭력적으로 강탈당한 인간의 자연적 권리를 되찾아 오기 위한 해방운동으로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통해 도달되는 사회는 자본주의가 폭압적 방식으로 초래해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4] 극복하고 개인들이 자신의 생산 조건들과의 밀접한 관계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일 것이다. 거기에서 비로소 노동하는 자들은 자신의 행한 노동의 대가를 잉여가치의 형태로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에게 빼앗기는 대신, 온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향유할 있는 자연적 권리를 누리게 것이다.

 

그런데, 모든 행복한 유토피아의 전제로 자리잡고 있는 무엇인가가 우릴 꺼림찍하게 한다. 그건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도래할 새로운 삶에 필요 불가결한 근본 조건으로 놓여있는 노동이다.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온전하게 정당한 자신의 소유로 향수할 것을 약속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삶의 첫번째 전제 조건은 그가 노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사회가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 노동하는 노동자 대립 위에서 건설된 사회이기에 중요시된다. 누군가가 노동하지 않으면 그는 노동을 통해서만 얻을 있는 자연적 권리를 얻을 없으며, 따라서 노동의 대가를 향수할 자격도 갖지 못한다. 그가 세계가 제공하는 물질적 혜택을 얻을 있으려면, 아니 최소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는 노동해야만 한다! 모두가 노동해야만 먹고 자격을 얻을 있는 사회. 우리는 노동을 삶의 근본적 전제조건으로 삼는 이러한 태도가 „네가 얼굴에 땀을 흘려야만 빵을 먹게 될 것이다“(창세기 3 19)라며, 노동을 원죄를 저지른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길 요구하던 창세기 신화의 세속적 현실화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아가 우리는,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해 행해야 하는 도덕적, 사회적 의무로 내세우는 이 (유대/기독교적 기원을 갖는) 태도가 우리가 한 때 목청껏 외쳐부르던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야 처먹지 마라!“라는 구호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섬뜩한 것은 이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에 의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실업자나 구조조정으로 실직당한 해고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칼날이 되고 있음을 목격하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못하고) 있는 너희들이 사회적 불이익을 당하고,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며,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당연한 거다! 먹고 살고 싶으면 무슨 일이든 해라!“ 라고.

 

노동에 근거한 본원적 사적소유를 인간의 자연적 권리로 받아들이고 이를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대립시키는 맑스는 저 오랜 역사를 갖는 노동 중심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경제학의 시초축적이데올로기가 저 뿌리깊은 노동 중심주의에 근거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정당화시키고 있다면, 맑스는 바로 그 동일한 노동 중심주의에 입각해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비판한다. 그것이 정직한 노동의 댓가가 아니라 폭력과 강탈에 기인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논란을 제기하며 해결되기 힘든 많은 질문들을 남겨주었다. 그렇다면 폭력이 아니라 정직한 노동을 통해 밑바닥에서부터 자수 성가한 자본가의 소유는 정당한 것일까? 축적한 재산만 믿고 더 이상 일하지 않기는 커녕 세계화라는 경쟁조건 속에서 그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오늘날 자본가들의 노동은 그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그들이 자본가라는 이유로 이들의 모든 노동은 결국 타인의 노동에 대한 착취에 다름아닌 것일까? 그건 21세기의 자본가에게 자본주의 전사시절에 이루어진 선조 자본가들의 폭력을 원죄처럼 들쒸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659.

[2]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705. 자본론 2판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개인적인, 자신의 노동에 근거하고 있는 사적소유모두에 Privateigentum (사적소유)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자본론> 3 부터 엥겔스는 Privateigentum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를 지칭할 때에만 사용하고 이를 우리가 본원적 사적소유라고 지칭한 개인적 소유 das individuelle Eigentum“ 구분한다. 그를통해 <자본론> 3판부터의 해당문은 엥겔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수정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통해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다. 이는 사적소유 Privateigentum 부활시키지는 않지만개인적 소유 das individuelle Eigentum 확립한다.“ 

[3] 이에 대해선 <폭력, 아나키즘, 메시아주의> 참조

[4] Marx : Kapital, 24 Kapitel : Die so genannte ursprüngliche Akkumulation, Ullstein, S.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