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베를린

자유냐 안정이냐?

김남시 2001. 10. 29. 17:40
독일은 매우 안정되어 있는 사회다. 그건 독일인들이 무척이나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세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 사회보장제도 - 사회적 혼란과 불안요소를 방지하기 위해 전 사회가 그 책임과 비용을 분담하는 - 의 기틀을 도입한 이래, 아직까지도 그것은 독일사회의 안정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가 보장해주는 연금제도는 퇴직 후 죽을 때까지의 노후생활을 불안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실업자나 사회 부적응 자들에 대한 사회 재교육 시스템은 거의 무료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 및 직업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준다.

놀랄만큼 잘 조직되어있는 의료보험제도는 사고나 갑작스러운 병에 걸려도 당장 비용 걱정 없이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며, 독일 나아가 전 유럽의 도로상에서 일어난 자동차 고장과 사고에 대해 ADAC은 즉각 사고지점에까지 달려가 모든 사후처리를 도맡아 해준다.

안정을 희구하는 독일인들의 강한 경향은 그들의 철저하게 계획된 생활패턴에서도 드러난다. 버스 혹은 전차 정류장마다 붙어있는 차량시간표는 다음 번 버스 혹은 전차가 언제 이곳에 도착할 것인지를 1분 단위까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으며, 매달마다 집으로 날아오는 전화요금청구서에는 언제, 어디로, 얼마만큼 통화했는가의 내역이 1초 단위까지 계산되어 첨부되어 있다.

수도 및 전기, 난방비는 매년 꼭 세입자가 사용한 만큼 재 계산되어 차후부터의 집세에 재산정되며, 계량기 검침원이 집을 방문하는 시간은 이미 3-4주전에 공지된다. 극장이나 시립회관, 심지어 소규모 갤러리들에서 열리는 모든 크고 작은 문화 행사들의 일정은 이미 최소한 1달 전에 발행되는 팜플렛에 계획되어 실려있으며, 40여 개에 달하는 TV방송국 프로그램 역시, 매주 발행되는 TV잡지에 4주 분의 방영 계획이 빽빽하게 계획되어있다.

삶의 이러한 모든 사소한 일들에서부터 모든 것이 '계획되고 또 그대로 실행된다'는 것은, 개개인의 삶을 자신의 계획과 목표에 따라 조직하는 것을 가능케 하며, 이를 통해 이들의 삶은 예기치 못한 변경, 변동, 통지 등으로부터 안정적으로 보호된다.

미리 계획되거나, 잡혀있지 않은 돌출적 약속과 제안 등이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검표원이 지키고 서있지 않은, 아니 아예 상시 검표제도 자체가 없는 버스나 전차를 타면서도 반드시 티켓을 구입하는 것도, 예기치 않은 불시 검표에 삶의 안정감을 잃지 않으려는 독일인들의 삶의 습관으로부터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규칙은 우리의 삶을 안정적으로 지켜주기에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다!

그러나, 안정은 때때로 자유와의 양자 택일을 요구하며, 독일인들은 그때마다 대체로 불안정한 자유보다는 무기력한 안정을 택해왔다.

1868년 프랑스의 부르조아지들이 혁명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을 때, 독일의 시민계급은 그 자유가 동반하는 무질서와 혼란스러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공포를 혐오했다. 1차 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공황 속에서 끔찍스러운 불안정을 경험해야 했던 독일인들은 '독일, 아리안 종족의 안정과 번영'을 공언했던 히틀러에게 차라리 그들의 자유를 내주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이번 테러사건 이후의 분위기가 또한 그러하다.

시민들의 안정적 삶의 터전 이어야할 도시 한복판에서 발생한 대규모 테러는 독일인들의 불안감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 테러가 뉴욕 뿐 아니라 바로 독일의 도시 어딘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누려오던 계획적이고, 예측가능하며, 안정적이던 삶이, 예측 불가능한 외부적 폭력에 의해 언제든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의 공포를 수반한 불안감은 독일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잠자고있던 안정에 대한 갈망을 또다시 불러일으켰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그 안정적 삶의 동반자로 잘 살아오던 '외국인'들이, 갑자기 그들의 안정을 위협하는 외부적, 잠재적 혼란의 요소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내무부장관 오토 실리가 내놓은 계획에 의하면, 이제 독일에 오려는 모든 외국인들은 철저한 신분확인과 지문날인, 지속적인 관리와 통제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외국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저 테러사건이 이들의 안정심리를 부추 킨 이래, 국가에 의한 이메일, 전화통화 검열, 공공장소에의 감시 카메라 설치, 공항 등에서 더욱 강화된 검색, 관련 건물들 주변의 통행제한들을 이들은 잃어버린 안정을 되찾기 위해 치루어야 할 당연한 대가로 받아들이는 듯 하다.

많은 반대에 부딪친 이번 법안이 어떻게 귀결될것인가! 또한번 독일인들이 안정을 위해 자유를 포기할것인지...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