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저장과 기억

김남시 2004. 6. 2. 06:46
저장은 내가 입력한 것이 내가 그것을 다시 필요로 할때 온전하게 다시 불러내어질 수 있는 무시간성을 특징으로 갖는다. 난 무엇인가를 저장하고, 그렇게 저장된 것은 이후 언제든지 내가 필요한 순간에 저장된 상태 그대로 다시 불러내어질 수 있어야 한다.

반면 기억은 내가 그것을 나의 기억 속에 담게된 순간과 그것을 다시 불러내어 상기하는 순간의 시간성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나의 기억은, 내가 그것을 불러내는 순간의 나의 현재의 상태, 정체성, 과거에 대한 판단, 기억하는 대상과 얽혀있는 감정상태 등에 의해 그때그때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재조직된다. 말하자면 기억에선 체험과 기억이 하나의 구조로 결합되는 것이다. 여기선 저장에서처럼 저장시킨 내용과 불러낸 내용 사이의 동일성이 문제될 수 없다.

많은 기술적 저장 미디어들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많은 것들을 '저장'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시대의 저장 미디어들이 저장된 것과 불러내어진 것 사이의 완전한 동일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면, 이제 발달된 저장 미디어들의 저장 기술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린 우리가 그것을 제때에 잊어버리지 않고 저장하기만 했다면, 언제든지 내가 필요할때 그것을 다시 불러내어 활용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대개의 경우 우리가 그것의 내용을 내 머리 속에 '저장'하고 있다는 의미다. 난 그것을 적절한 순간에 내 머리 속에 '저장'시켰으며, 그를 이제 다시 온전하게 불러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이러한 저장의 의미로 사용한다면, 우린 사실상 우리가 활용하는 저장 미디어들, 노트, 컴퓨터, 녹음기 등 보다 훨씬 비효율적이고 작은 용량의 저장 능력만을 가지고 있음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노트나 책, 컴퓨터나 녹음기가 '아는' 것을 결코 넘어설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이제 저장이 아닌 '기억'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우린 지금까지의 그 어떤 저장 매체도 갖지 못했던 인간만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의 기억은 그것이 기억된 시점과 불러내어진 시점에 따라 늘, 새롭고도 변화하는 다채로운 색깔을 띤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기억했던 과거의 사건,사람,지식들을 그를 기억해 내는 지금, 현재의 지평에 따라 창조적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이다.1

훌륭한 저장 미디어로서의 컴퓨터가 만일 이러한 '기억'의 능력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1년 전에 써서 컴퓨터 하드 디스크나 디스켓에 기억시켰던 글은 1년 후 내가 그 글을 다시 불러낼 땐 새로운 글로 숙성되어 있을 것이다. 1년 전 내가 기억시켜 놓았던 나의 생각은 1년 동안의 나의 새로운 경험과 성숙 혹은 변화를 반영하여 다른 분위기의 다른 글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 컴퓨터는 내가 예전에 썼던 글을 불러낼 때의 나의 감정상태를 감지하여 그 글을 적절히 변화시키기도 할 것이다. 10년 전에 내가 감동했었던 한장의 그림을 컴퓨터에 기억시켜 놓은 나는 1년 후 역시, 그 그림이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과 분위기로 바뀌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억과 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과 사진  (0) 2005.07.21
과거라는 이름의 혐의자  (0) 2004.07.14
책 속에 숨겨진 책 : 발견된 발터 벤야민의 글들  (0) 2004.04.05
이방인  (0) 2004.03.31
지식과 기억  (0) 2004.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