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책 속에 숨겨진 책 : 발견된 발터 벤야민의 글들

김남시 2004. 4. 5. 07:01

벤야민의 글들과 그리고 그 글들이 1978년부터 출판되기 시작한 발터 벤야민 선집에 수록되는 과정은 그 자체가 그야 말로 하나의 미로찾기 작업과 같았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글들이 뜻밖에 발견되는가 하면, 이미 출판되었던 동일한 글의 다른 수정본이 발견되기도 했다. 나아가 동 베를린에 보관되어 있던 벤야민의 원고들은 이후 동서 베를린 사이의 긴장이 해소되고 나서야 비로소 쥬어캄퓨 판의 편찬자에게 공개되게 된다. 벤야민이 생전 자신의 친구들에게 선물했었던 글들이 그들의 사후 그들의 서재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예를들어 게로숌 숄렘이 죽은 후 그의 서재에서 „사랑에 대한 대화“와 „켄타우르스“의 원고가 발견되었고, 호르크하이머가 죽은 후 그의 서재에서도 „기술복제 시대 예술작품“의 중간 수정본이 발견되었다. - 혹은 고서적상의 손을 통해 다른 여러 사람들을 거친 후 벤야민 선집 편찬자에게 전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극적인 것은 파리 국립도서관 서가 속에 숨겨져있던 벤야민의 원고가 40여년 만에 발견된 사실이다. <에로티즘>의 저자 조지 바타이유는 발터 벤야민이 파리를 탈주하기 전 그의 중요한 저작들의 원고 - 파사진 베르크의 수기와 타이핑 본, 보들레르에 대한 출판안 된 글들 - 를 파리 국립 도서관에 숨겨놓았다. 그것은 1940 년 초 여름 탈주를 기획하던 벤야민이 그에게 보관을 부탁한 것이었다. 국립 도서관의 수만권의 책이 꽂혀있는 장서 가운데 꽂혀 숨겨진 벤야민의 원고는 다행스럽게도 파리를 점령한 나찌 비밀 경찰들의 눈을 피해 오늘날 우리에까지 도달하게 된다.

 

1945년 바타이유는 이렇게 숨겨 놓았던 파사지 베르크의 원고와 수고를 벤야민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피에르 미삭 pierre Missac에게 전달하고 그는 다시 이 원고를 미국에 있던 아도르노에게 전해주도록 시도하다가, 1947년 초에야 드디어 파리에 있는 미 대사관 직원의 부인을 통해 뉴욕의 아도르노에게 전달된다. 그러나, 이후 이 원고가 벤야민이 바타이유에게 보관을 부탁했던 모든 원고들이 아님이 밝혀진다. 바타이유는 벤야민의 원고를 파리 국립 도서관 여기저기 분산시켜 숨겨놓고 나서 자신이 숨겨놓았던 몇 개의 뭉치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파리 국립도서관 책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벤야민의 원고뭉치는 이후 1981년 7월에서야 이탈리아의 벤야민 연구가인 Giorgio Agamben에 의해 발견된다. 그렇게 발견되기 까지 약 40년 이상 파리 국립도서관의 책들 사이에 숨겨져 있던 벤야민의 원고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 대한 독일어 본과 브레히트 시에 대한 논평, 그리고 „이야기꾼“의 원고였다. 1

책들은 책 들 사이에서 숨겨져 있기도 한다! 도서관 서가에 꽂혀져있는 수만, 수십만의 책들이 그 사이에 다른 책들을 숨겨놓는 은닉 장소가 된다. 책 속에 숨겨져 있는 책! 벤야민 원고들의 수집과 발견, 그것의 출판의 과정은 그 자체가 정치, 역사적, 문헌학적 나아가 인간학적 관점들이 녹아있는 훌륭한 문화학적 연구대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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