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기억과 기억의 메타포

김남시 2003. 12. 24. 19:23
우린 기억이라는 인간활동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우리 머리 혹은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저 복잡한 인지과정을 우린 다만 비유적으로, 즉 메타포를 통해 이해할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서양 철학사에서 기억의 문제를 다룬 모든 철학자들은 그가 기억을 이해하기 위해 채택한 메타포의 틀을 통해 기억에 얽힌 인식론적 문제들을 설명할수 밖에 없었다.

서양 사상사에서 등장했던 대표적인 기억의 메타포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창고의 메타포이고 다른 하나는 밀납 서책의 메타포다. (Gedächtnis und Erinnerung ; Ein interdisziplinäres Lexikon, 2001, "Gedächtnismetapher") 이 두가지 메타포의 차이는 기억을 그곳에 물건,사건, 이미지들을 보관하는 창고와 같은 공간으로 이해하느냐, 아니면 이미지, 사건, 이름 등을 그곳에 기록하는 서판으로 이해하는냐의 차이이다.

이 두 메타포는 나아가 기억이 특정한 장소에 '보관'되는 것이냐, 아니면 '기록'되는 것이냐라는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의 차이를 대별해준다. 기억이 보관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과거의 지각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에서 특정한 기억을 찾아내는 작업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기록되는 것이라면 과거의 기억을 상기하는 작업은 기록되어 있는 기억의 문자를 읽고 해독하는 작업으로 이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기억에 대한 서로다른 이해방식은 기억과 지각, 상기 등에 관한 인간 인식 전반에 대한 서로 다른 설명과 이해를 낳을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기억의 동굴, 헤겔의 탄광, 보르헤스의 도서관 혹은 기억의 극장의 메타포들은 모두 기억을 그것이 보관되는 장소와 연관시켜 이해한, 서양 기억술의 전통적 공간화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

기억을 문자로 이해한 로크나 프로이드, 기억의 책, 플라톤의 영혼의 밀납서책 등은 모두 기억을 기록과 해독의 맥락 속에서 이해한 메타포들이다.

오늘날 발달된 복제와 기억매체들을 이해할 때에도 우린 저 오래된 기억의 메타포적 전통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다.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는 기억해야할 정보를 '기록'하는 서책인가, 아니면 다만 전기적 신호를 보관하는 장소인가. CD와 DVD는 또 어떤가.

동양에서 기억은 과연 어떤 메타포를 통해 이해되었을까? 우리의 선조들은 기억을 무엇으로, 어떤 모습으로 표상했을까? 잠시 손에 쥐고 있던 '티끌'? 입안에 담아둔 한숨? 뱃속에 들어가 변으로 배출되는 음식물?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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