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작가 M 씨 (창작꽁트)

김남시 2003. 7. 29. 17:58
약간 보완했습니다.--------------------------------------------------------------------------------------------------

중견작가 M은 무언가 색다른 작품을 쓰고 싶었다. 그간 발표했던 작품들이 몇개의 명망있는 문학상을 받고,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는 불만스러웠다. 작가로써 글을 쓴다고 하는 행위가 갖는 한계가 너무도 자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예술의 본질을 드러내는 그런 작품을 쓰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중 그는 논란이 되었던 한 피아니스트의 예술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그 예술가는 청중들이 기다리고 있는 무대에 나타나 인사를 하곤, 피아노 앞에 앉아 40여분 간 침묵하다 피아노 뚜겅을 닫고 무대 뒤로 들어가 버리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연주가 시작되길 기다리던 관객들은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그의 침묵이 지속될수록 놀라움과 분노로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급기야 야유가 터져나왔다.

이후 기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예술가는 자신은 당일 연주 예정곡이었던 쇼팽의 에튀트를 ‚머리 속으로‘ 연주하고 있었으며, 그 보이지 않는 연주를 통해 ‚연주의 본질‘에 도달하고자 했었다고 밝혔다. 그에 의하면, 청각적으로 드러나 연주되는 음악이란 사실상 악기와 연주자, 그리고 그의 컨디션 등의 개인적, 물질적 조건에 의해 제약되고 한계지워진 것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예튀트의 본질은 그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눌러 물질적으로 재현되기 이전에 ‚그의 머리 속에서 연주되는‘ 에튀트의 이념 속에 존재할 것이었다.

그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글을 통해 드러나는 자신의 작품에 늘 한계와 부족함을 느끼고 있던 작가 M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다. M은 곧바로 이 원리를 자신의 창작행위에 적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가 가장 먼저 실행했던 것은 그가 갈구하던 ‚본질적 예술 작품‘이 될 소설을 구상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껏 그 어느 위대한 소설가도 달성한 적 없었던 거대한 스케일과 광대한 역사적 배경을 , 괴테의 파우스트를 능가하는 심오한 사상적 깊이를 갖는 한 편의 소설을 구상해 내곤 스스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자신 작품 속의 주인공이 겪는 파란만장한 삶의 깊이에 침잠했으며, 스스로 그 어느 현자도 깨닫지 못했던 삶의 원리를 터득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이번 작품이야말로 천오백년 인류의 문학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 될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을 쓰고 있다고 발표한 후 10여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권의 책도 출판되지 않자 많은 비평가들과 문학기자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평소에 최소 1년에 2권 정도의 소설을 출판해오던 그였기에 그들의 수군거림은 더욱 컸다.

평소 그에게 비판적이던 비평가는 이제 그의 예술적 재능은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는 더 이상 어떤 글도 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이들은 명망있던 한 작가의 죽음을 이야기했고, 왜 정상을 향해 나아가던 작가가 갑작스럽게 절필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추측하였다. 급기야 그가 속해있는 문인협회에서는 그를 다음 해 한국의 현대 작가 리스트에서 제외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 M은 자신의 저 위대한 작품의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일생의 필작을 위해 그는 자신에게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였다. 오랫동안 밤을 새고, 식사를 거르는 것이 그의 일상이 되었고, 사람들과의 교제도, 다른 문학인들과의 만남도 전폐하고 오직 그 위대한 작품의 창작에만 매달렸다.

언어의 제약을 받지 않으니 그의 작품은 자유로운 이념의 공간 속에서 생생하게 전개될 수 있었고, 적절한 언어를 찾아내기 위해 소비해야 했던 시간과 에너지들은 이제 사건과 인물들의 필연적 동기들을 다듬는데 투여될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서 창조된 주인공은 어떤 표현의 제약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었고 , 이를통해 작가는 자신의 소설 주인공의 사상과 감정에 완전히 동화될 수 있었다.

주인공이 깊은 실연의 상처를 받았을때 작가는 스스로가 목을 매어 자살하고 싶을 정도의 고통스러움을 느꼈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이 도달한 깊은 삶의 철학에 작가 스스로도 경탄해 마지 않았다. 언어라는 껍질 속에서 허덕이며 괴로와하던 작가 M은 비로소 완전히 자유로운 창조자로서의 경이로운 기쁨에 충만할 수 있었고,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사라져야 했던 심오한 사상들은 감추어져 있던 삶과 세상의 깊은 비밀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스스로 감격과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12년만에, 글로썼다면 20 여권에 해당하는 저 방대한 소설을 머리 속으로 탈고한 순간 그는 이제 더이상 이보다 더 깊이있고, 훌륭한 예술작품은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이 12년 전 꿈꾸었던 완벽한 예술작품의 본질에 도달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글과 종이, 혹은 컴퓨터라고 하는 물질적 한계에 의해 제약받지 않은 순수한 예술의 이념 그 자체가 그에 의해 창조되어 바로 지금 그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 M이 세계를 창조한 신에 버금갈 창조의 기쁨에 들떠있는 동안, 12년 동안 쇠약해진 그의 육체는 그간의 긴장감을 잃고 갑자기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작가 M과 마지막으로 통화했었던 친구이자 문학 비평가 P씨에 따르면 작가 M이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자신이 인류의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을 방금 완성했음을 알려왔다고 말했다. 작가 M의 집을 방문한 비평가와 신문 기자들은 그가 자신의 작업실 바닥에 쓰러진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를 검시한 의사는 심한 수면부족과 과로에 따른 심장마비가 사인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작업실 책상과 책장 어느 곳을 뒤져도 그가 말했던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하고 과로와 수면부족에 시달리던 늙은 작가가 환각과 정신이상에서 내뱉은 말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그의 이름은 문인협회가 출간한 „한국의 현대작가 명단“ 중 ‚작고작가‘ 란 한 곳에 그가 생전에 쓴 8권의 소설 제목과 함께 조그맣게 실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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