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3일 전의 일기, 3일 전의 세계 (습작)

김남시 2003. 8. 5. 18:38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써온 M은 중요한 삶의 고비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의 삶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많은 사건들, 더 많은 자료와 더 많은 인상들로 복잡해져 감에 따라 하루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하루 동안에 정리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하루 동안에 그에게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과,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로부터 받은 인상과 느낌들을 단 하루 만에 정리하고 글로 남기려다 보니, 풍요로운 삶에의 성찰과 이해로 가득차 있던 그의 일기는 어느때 부터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들만을 짤막하게 기록한 메마른 일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야근과 술자리, 다음날까지 처리해야 할 일들로 그의 저녁시간을 써야 할 일들이 많아지면서 아예 그 나마의 기록조차 남기지 못하는 날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렇게 정리되고 사색되지 않은 하루 하루의 일상이 결국 그 하루하루의 총합으로 이루어질 그의 삶 전체를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라는 그의 깊은 불안감이었다.

오랜 동안의 숙고 끝에 그는 일기쓰는 방식을 변화시키기로 마음 먹었다.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바로 그날 저녁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3일 동안의 정리와 사색의 유예기간을 거친 후 일기로 남기기로 한 것이다. 오늘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은 3일 후 그의 일기장에 기록될 것이며, 오늘의 일기장에는 3일 전의 일들이 기록될 것이다.

이를통해 그는 하루 동안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의미들을 3일이라는 기간 동안 충분히 사색하고 숙고하여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3일 동안의 유예기간을 통해 당장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사건과 만남들은 보다 분명한 형태로 그에게 다가올 것이며, 이제 그를통해 정리되고 기록되지 않은 채 읽지못한 신문지처럼 버려지던 자신의 삶의 시간들을 충분한 여유를 갖고 반추하고 사색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수 있을 것이었다.

그의 이 새로운 일기 습관은 그러나, 그의 삶에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변화를 서서히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이제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3일 전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반추하고 정리하는 것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의 하루 하루는 3일 전 그에게 남겨졌던 인상과 3일 전 그가 만났던 사람들, 3일 전 일어났던 사건들의 의미를 사색하는데 쓰여지게 되었다.

그의 정신은 그의 기억에 남겨진 3일 전의 과거로 향해져 있었고, 그가 이렇게 3일 전의 시간 속에서 머무르는 동안 그의 현재와 오늘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한채 무심히 그의 곁을 흘러 지나가 버리고 있었다.

그의 친구와 동료들은 그가 언젠가부터 늘 꿈꾸는 듯한 얼굴로 생각에만 잠겨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가 버스 정류장에 멍하게 서 있다가 집에 가는 버스를 놓치거나, 직장 상사에게 엉뚱한 대답을 하여 질책을 받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사람들은 늘 다른 생각에 빠져있는 그와 술자리를 같이하거나 함께 이야기하기를 꺼려했으며, 그의 직장 사장은 맡은 업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된 그를 위해 더이상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시간을 빼앗던 직장과 인간관계로 부터 단절되게된 M은 이제 더 많은 시간을 3일 전의 일들을 정리하고 사색하는데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약 1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밤 M은 자신의 일기가 또다시 점점 짧아져 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 마지막 몇 달간의 일기장에는 단지 ‚3일 전의 일을 정리하다‘는 짤막한 문장만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일기를 쓰기 위해 3일 전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단지 그가 그날로부터 또다시 3일 전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외엔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과 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식과 기억  (0) 2004.01.26
기억과 기억의 메타포  (0) 2003.12.24
작가 M 씨 (창작꽁트)  (0) 2003.07.29
역사와 공간  (0) 2003.04.05
수집가와 물건의 아우라  (0) 2003.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