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역사와 공간

김남시 2003. 4. 5. 03:00
도식화된 연표나 시간 테이블들로만 역사를 접했던 우리는 종종 그 역사적 사건들이 늘 언제나 특정한 공간과 장소에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우리는 마치 역사가 우리가 사는 곳과는 동떨어져 있는 보이지 않는 저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만 시간적 순서에 따라 나열해 놓은 도표 같은 것으로 느낀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역사와 그 역사를 이루는 사건들은 늘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특정한 장소, 특정한 거리,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일상적 삶은, 더구나 역사적으로 별볼일 없는 존재인 우리들의 삶은 대개의 경우 저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역사적 장소'와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역사는 항상 내가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닌 '저기' 다른 장소와 다른 공간에서 발생한다. 어쩌면 역사는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러나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아니다. 나는 지금 이시각 만들어지고 있는 역사와 현재라는 시간을 공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저 역사적 '장소'는 공유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역사는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으로만 여겨진다.

늘 저 멀리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로 인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로 파악하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이곳, 여기가 아닌 저기, 저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를 우리는 마치 우리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어떤 자연 현상 같은 것으로 느낀다. 마치 역사는 저 아라비아 사막 어디에선가 늘 일어나고 있는 작은 모래 폭풍과 같다. 그것이 우릴 덥치지 않는 한 우리는 역사로부터 '안전하다'.

지금, 현재, 우리가 있는 '이곳'이 아주 가끔씩 역사가 생성하는 장소가 되는 때가 있다. 1980년 5월 광주 도청 앞 광장에 집결했었던 시민들이나 1992년 월드컵 준결승을 시청앞 광장에서 함께 관람했던 사람들, 그리고 1992년 겨울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 촛불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역사는 그들이 있는 '여기, 지금,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바로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통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 고양시키는 하나의 경이로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에서, 다른 곳에서라면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존재로 남아있었을 우리는, 지금 현재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역사적 존재로 고양되는 것이다.

역사 속에, 역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는 그리하여 소위 '역사적 장소'에 가 있고자 하는 욕구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에 함께 가 있고 싶어한다. TV로도 볼 수 있는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구지 공연장에 가서 보고 싶어하는 욕구, 한국팀의 4강 진출이라는 사건을 경기장에서 혹은 시청 앞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욕구,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거리에 촛불을 들고 나서고자 하는 욕구들은 모두 역사적 장소에 참여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 고양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초월적 욕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 역사적 장소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를 위해선 역사가 일어나는 장소 뿐만 아니라 그 역사가 발생하고 있는 시간이라는 두 가지 조건이 다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시각 역사적 장소에 참여할 수 있는 행운을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역사적 존재로 체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건 역사적 장소를 방문하는 일이다. 우리는 역사가 일어났던 시간에로 돌아가 볼 수는 없지만, 그 역사가 일어났던 장소들은 방문할 수 있다. 역사를 이루었던 사건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것이 일어났던 장소들은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소는 그 역사성을 통해 '아우라'를 얻는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존속하는 장소는 그를통해 역사를 증거하는 증거물이 된다. 자신의 개인적 역사가 존재했었던 '장소'들이 우리에게 주는 아우라는 그 장소가 우리 삶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던 장소,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골목, 내가 다녔던 학교, 나아가 동료들과 어깨 걸고 노래와 구호를 외쳤던 거리... 이 장소들은 내게 말을 걸고, 나의 잊혀져 가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해 줌으로써 나의 삶을 역사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곤, 나의 지금 현재가 나의 삶의 역사라는 장 속에 위치하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한다.

우리가 나의 개인적 삶의 역사를 넘어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건들을 그들이 일어났었던 장소들 속에서 떠올려 낼 수 있다면 역사적 장소는 또한 우리에게 자신의 아우라를 열어 보인다. 5.16 쿠데타 때 쿠데타 군의 탱크가 주둔해 있던 광화문 거리,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졌던 밀실, 계엄군에 맞선 시민들의 집결지였던 광주 도청앞 분수대,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수만의 깃발이 휘날리던 서울 시청앞 광장들은 그곳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을 기억하는 우리들에게 말을 걸고, 잊혀져 가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역사적 연속성 속에 위치시킨다.

자신들에게 불쾌한 역사적 기억을 망각하고 싶어하는 부정의한 권력들이 늘 그 역사적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들을 먼저 없애려 하는 것은, 그 장소가 사람들에게 일깨워 줄 역사적 연속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고층 빌딩, 더 넓고 새로운 거리, 멋진 초 현대식 건물들로 대체되어 버리는 역사적 장소들은 모든 장소의 역사성을 새 것과 새로운 것에 대한 신경질적인 강박으로 대체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을 역사적 연속성으로부터 탈각시킨다. 과거로부터 등을 돌리고 보이지도 않는 미래만을 향해 돌진하게 하는 소위 발전의 동학은 그런 점에서 오히려 보수적이다. 발 앞에 쌓이는 과거의 폐허를 바라보면서 미래를 향해 뒷걸음질 쳐 나아가는 역사의 천사(발터 벤야민, 역사철학테제)는 한 손에 저 과거로부터 이어진 보이지 않는 역사의 실타래를 거머쥐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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