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신성과 육체성

김남시 2000. 4. 8. 10:41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하니라.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24-29)

이제 막 자신의 무덤에서 부활한 예수의 머리와 손등엔 아물지 않은 상처의 흔적이 보인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밧줄로 묶여있었을 오른쪽 팔뚝엔 긴 흉터가 남아있고, 왼쪽 손등엔 그 '못 자국'이 보인다. 길고도 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예수는 지치고 힘든 표정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부활을 믿으려 들지 않는 제자에게 어느 정도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직도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오른쪽 옆구리의 상처를 양손으로 벌려 보이며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힐난한다. "네 손을 여기에 넣어 보아라. 그리하여 믿음없는 자가되지 말고 믿는 자가되라"

여기서, 예수의 상처, 예수의 찢어진 육체는 육체로서 부활한 예수의 실존성을 증명하는 징표다. 예수는 자신의 찢어진 살갗, 상처로써 자신이 육체로서 부활했음을 증명해 보이며, 우린 그의 부활을 그의 '상처'에 손을 집어 넣어 보고서야 믿는다. 그러나, 그의 상처가 우리가 그에게 저지른 폭력과 잔혹함의 흔적인 한, 이때 우리가 확인하는 건 죄없는 신의 아들에게 저지른 우리의 패악들이다. 십자가에 못박힘으로도 결코 사해지지 않은 저 끈질긴 원죄의 뿌리... 그리하여, 이제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우리 앞에는 우리 죄의 흔적이 재 등장한다. 우린 우리의 죄를 확인하지 않고는 그의 부활을 확인할 수 없으며, 예수의 부활은 우리가 저지른 죄가 사라지지 않고 그와 함께 부활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수의 육체라니! 알다시피, 예수는 육체적, 물질적 존재라기 보다는 영적, 정신적 존재로 더욱 우리에게 친숙하다. 그는 이 물질적 현세가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신앙의 재산 쌓기를 설파하였고,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찢어진 육체'를, 그것도 창으로 찔려 깊게 베어져 나간 옆구리의 상처를 손가락으로 벌려 보이곤,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말한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이리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는 자가되라"

최소한 이 장면에서의 예수는 그의 '찢어진 육체'가 상징하듯 육체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한다. 하나님의 독생자요 선지자인 예수는 그러나,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는'(요한 19:34) 육체를 지닌 존재이기도 했다. 그의 육체는 우리의 썩을 수 밖에 없는 살과 마찬가지로, 상처입고 ,찢어지며, 썩어 들어간다. 우린, 완전한 신적 존재였다면 충분히 피하거나 모면할 수 있었던 그의 고통이 바로 그의 육체에 의해 생겨난 것이란 걸 안다.


중세 화가들은 고집스럽게도, 부서지고, 찢겨지며, 불태워지는 육체들을 그렸다. 형벌로 다리 껍질을 벗기우고 있는 육체 <캄퓨세스왕의 재판>, 불에 달군 갈퀴로 온 몸을 긁히고 있는 성 조지, 2명의 하수인에 의해 돌려지는 물레에 마치 긴 호스처럼 내장을 뽑히우고 있는 성인, 발가벗겨진 채 마을 구석 구석을 끌려 다니다 마침내 나무 기둥에 묶여 불태워지고 있는 여인들.... 어떤 점에서 중세는 찢기고, 불태워지고, 절단되고, 부서지는 육체의 이미지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과장되게 예수의 육체적 상처와 피를 강조하고 있는 위의 조각 역시 이러한 중세의 즉물적 감수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다.


육체적, 인간적 존재로서의 예수의 존재는 그러나,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몸으로 육화된 그리스도를 둘러싼 논쟁은 동방과 서방의 그리스도교가 분열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었다. 유한하고 소멸하는 이 세계의 타자이자, 무한으로서의 신이 인간으로서 존재했다는 모순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이를 그리이스 철학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려 하였다. 곧,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는 '본질(ουσια)은 동일하지만 다만 그 실존(υποστασιξ)에 있어서만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4세기 아레이오스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초월적 존재로서의 신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기고 예수는 결코 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이단적' 사고방식이 기독교 세계의 신앙적 기초를 흔들리게 하자, 교황은 451년 제4회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의하여 그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이며, 인간성에 의해 우리들과 동일한 본질이고, 그 결합에 의해 2가지의 본성 속에서 혼합도 없이, 변화도 없이, 분할도 없이, 분리도 없이 존재한다. 이 결합에 의해 2가지의 본성의 차이가 제거됨이 없이, 오히려 각각의 본성의 특질은 보존되며, 유일한 위격 혹은 유일의 실존의 내부에 결합되어 있다'는 카루케돈 신조를 채택함으로써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다. 그리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이집트와 시리아의 교회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교회는 분열의 위험에 처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553년 뉴스티니아노즈 황제가 콘스탄티노포리스에 소집한 제5회 니케아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성상파괴운동'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슬람교 지역과 접해있던 시리아와 이집트 교회들은 인접해 있던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삼위일체'설이 다신론이자 우상 숭배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받아 왔다. 기독교의 가장 큰 대항 세력이었던 이슬람교로부터의 이러한 비판은 기독교 세계의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해왔는데, 이에 비잔틴의 황제였던 레옹 3세는 이슬람교에 의한 비판에 반박하고, 그리스도교의 정화를 위해 730년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성상파괴의 칙령을 발표하게 된다. 신성을 지닌 그리스도를 이 세계의 물질을 통해 묘사하려고 하던 아이콘에 대한 파괴는 곧, 인간적 존재로서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그의 신성만을 인정하려는 단성론의 배경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로부터 촉발된 성상 파괴는 9세기에 이르기까지 재연되는데, 그것이 완전히 종결하고 성상이 최종적으로 부활한 것은 843년 사순절의 일이다.


육체적 존재로서의 예수가 겪는 고통은 Matthias Gruenewald가 1515년에 그린 The Crucifixion에서 극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예수는 극단적 고통을 겪고 있는 육체로 대별되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의 손은 참혹하게 이지러져 있으며, 극한적인 고통으로 여기저기 불거져 나온 온 몸의 근육들은 생명이 꺼져가면서 서서히 경직되어 가고 있다. 그의 육체에는 죽은 자에게서 드러나는 검은 반점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해 온 몸에 퍼져가고 있다.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고통에 지친 예수는 원망스러운 듯 쓰러지려 하는 성모 마리아와 슬픔을 못이겨 두 손을 맞잡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내려다보고 있다.

화가는 왜 신의 아들 예수를 그 육신의 고통으로 힘겨워 하는 육체적 존재로 묘사했을까? 만일 이 그림을 보는 당신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에서 조금이라도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면 이 그림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미사를 드릴 때마다 교회 정면에 설치되어 있는 이 그림 (이 그림은 알사스의 한 마을인 이젠하임의 교회 제단화 중 하나이다.)을 보며 인간들이 예수에게 저지른 죄가 무엇이었는가를 생생하게 떠올리곤 전율할 것이다. 과연, 성 요한은 참혹하게 죽어가고 있는 구세주의 모습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말한다. 보라, 성찬배 속에 피를 쏟고 있는 어린 양처럼(그림 오른쪽 아래) 예수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다!

그러나, Matthias Gruenewald에게 있어 육체적 존재로서의 예수는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와는 달리, 다만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그에게 있어 부활한 예수는 이제 거추장스럽던 육체성을 벗어던지고 신적 세계의 영원한 존재로 승천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이제 모든 육체적 고통을 벗어던진 영적 존재로 무덤 뚜껑을 열고 부활하였다. 손바닥과 오른쪽 옆구리에는 여전히 상처가 남아있지만 그것은 서서히 영적인 세계로 스며들어가는 예수의 모습 속에서 사라져가는 중이다. 부활한 그리스도는 빛의 형태로 묘지와 물질적 세계로부터 떠나가고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그의 육체에 가한 폭력의 죄과 역시 영원한 신의 세계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참혹하게 죽어가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가책과 죄의식에 몸서리치던 우리는 이제 육체성을 벗어나 부활하는 예수의 그림 속에서(이 그림은 제단화 오른편에 이어져 있다!) 안도하게 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살펴볼 그림은 카라바치오가 그린 '성 도마의 불신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02) 이다. 여기에서 부활한 예수는 더 이상 그 육체성으로 인해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덤덤하게 친히 도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게 한다. 옆구리 상처를 제외하고는 그의 몸 어디에서도 십자가에 못박힐 때의 상처는 보이지 않으며, 수없이 흘렸을 피자국도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서의 예수가 '승천하는 그리스도'에서처럼 육체성을 완전히 벗어던진 영적인 존재로 그려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는, 어딘가 빈곤한 농부들처럼 보이는 그의 제자들처럼 아주 친숙한 인간적 존재로 그려져 있으며, 옆구리 상처 위의 주름이나 도마의 손을 잡고 있는 손마디 등은 우리에게 여전히 그리스도는 육체를 지닌 존재임을 상기시켜 준다.

카라바치오의 그림에서 이제 부활한 예수의 테마는 더 이상 포교적 목적과 관계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참혹한 육체 앞에서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갖게 하지도, 그 부활의 기적을 통해 종교적 환희에 젖어들게도 하지 않는다. 카라바치오에게 있어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자 일화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그리하여,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신학적 사건은 세 명의 호기심 많은 노인들이 큰 사고에서 목숨을 건진 한 젊은이를 둘러싸고 당시의 정황에 대해 캐묻고 있는 평범한 장면으로 바뀐다.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와 신의 아들로서의 그리스도... 그를 묘사한 많은 그림들은 그의 존재를 둘러싼 신학 논쟁만큼이나 그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육체성을 드러냄으로써 그가 인간들을 위해 감수해야 했던 고통의 크기와 희생을 강조할 것인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는 신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신적 권능과 위엄을 되살릴 것인가에 따라 그리스도는 고통스러워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때론 의연한 신의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 사이엔 십자가 처형을 통한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과 (영적 혹은 육체적)부활이라는 사건이 가로놓여 예수의 신성과 육체성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변증법을 연출하는 것이다.


참고도서

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창작과 비평사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예경사
색의 수수께끼, 마가레테 브룬스, 세종연구원
The Sense of touch within the plexus of the senses, Hartmut Boehme.
신의 본질, 강담사

* 여기에선 그림이 다 삽입되지 않는군요. 관련된 그
림들을 함께 보시고자 하시는 분은

http://my.dreamwiz.com/southclo/christ.htm 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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