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림과 시간 1

김남시 2006. 3. 3. 06:58

 

예술은 시간을 어떻게 표현할까. 언어로 이루어지는 예술, 곧 문학의 경우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다. 그건 말이나 글을 사용하는데 이미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말이나 글이 가진 시간성은 그를 그림과 비교해 보면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사과를 그린 그림을 보고 그것이 사과라는 걸 알아보는데는 일초도 걸리지 않지만 사과를 묘사하는 말이나 글을 통해 그 모습을 떠올리기까지는 그를 듣거나 읽어 이해하고, 그를 머리 속에서 그림으로 변환시키는 시간이 소요된다. 한 장의 그림을 통해서라면 금방 전달할 수 있는 장면을 말이나 글로 묘사하려면 시간이 걸리며, 이는 그 묘사를 듣거나 읽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로 이런 특성으로 인해 언어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행위를 묘사하는데 그림보다 더 큰 장점을 갖는다. 그림이 사건의 경과나 행위들을 다만 그 중 특정한 한 장면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반해 시간성을 특성으로 갖는 언어는 사건의 경과나 행위를 묘사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달리고 있는 말이나 날아가는 새, 사건의 경과 혹은 전쟁 등을 소재로 한 그림은 실제로는 계속 움직이는 그 대상들의 한 모습과 장면만을 포착해 표현할 수 밖에 없지만, 언어는 이들의 사건과 운동을 모두 전달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라오콘>을 통해 레싱은 시와 회화의 우열을 둘러싼 논쟁에서 시의 편을 든다. 그에 의하면, 회화는 운동하는 대상으로부터 시간을 제거하여 그를 특정한 순간으로 고정시켜 공간화시킨 예술이다. 이를통해 원래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대상들은 시간이 정지되어 있는 그림의 공간 속에 고정되어 표현된다. 운동이 살아있는 것,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의 본질적 속성이라면 회화는 이런 의미에서 운동하는 것의 세계, 곧 정신적의 것의 세계에 참여하지 못한다[1]는 것이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매체가 갖고 있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도 훌륭하게 시간을 표현해왔다.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 곧 서사는 호머 이래 시와 소설 뿐 아니라 회화의 주요 대상이기도 했으며, 회화가 정물과 풍경 등의 고정된 대상을 묘사하기 시작한 건 2,500 년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보면 오히려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매체의 특성상 비 시간적일 수 밖에 없는 그림이 도대체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서사를 표현해 왔을까? 그를위해 그림은 어떤 장치와 질서, 표현방식을 발전시켜 왔을까?          

 

그림이 서사를 표현하는데는 전통적으로 크게 두가지 방식이 있었다. 첫째는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서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한 장면을 그리는 것이다. 신약전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일생이라는 서사 중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 „최후의 만찬“,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피에타“, „예수의 부활등의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저 길고도 드라마틱한 서사 중 그것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택된 하나의 장면은 그를통해 그 그림을 그린 (혹은 위탁한) 사람들이 무엇을 저 전체 서사의 핵심으로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주며, 나아가 그 서사 전체를, 위의 경우엔 예수의 생애 전체를 상기시켜 주는 촉매적 (일종의 Mnemographie!) 역할을 한다.

 

서사 속의 한 특정한 한 장면이 이처럼 서사 전체를 대변하는 일이 반복될수록 그 장면은 점차 서사 전체를 지시하고 암시하는 상징이자 알레고리로 일반화된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림이 단지 일회적이고 역사적인 그 사건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신약전서 전체의 메시지 - 인류의 죄를 대속해 인간을 구원하는 신의 아들 의미하는 기호가 되고, 아기 예수를 안고있는 마리아 그림이 특정한 종교적 인물 마리아와 예수 에 대한 묘사를 넘어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Caritas적 사랑과 구원을 상징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벌거벗은 비너스 그림이 아름다움의 알레고리로, 뱀이악과 불신의 상징으로, 턱을 괴고있는 사람이 멜랑코리의 알레고리로 자리잡게 되면, 이는 이후의 많은 다른 예술적 실천들 속에서도 일반적이고 보편적 기호로 등장하게 된다.[2]

 

그림을 통해 서사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림의 동일한 공간 속에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함께 배치해 넣는 것인데 이는 거의 18세기 초까지 시간의 시각적 재현의 방법으로 꾸준히 사용되어 왔다. 1416 Bruder von Limburg 가 그린 <에덴동산>은 이러한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화가는 이 한 장의 그림 속에서 서사 전체를 이루는, 서로 다른 시간에 걸쳐 일어났던 사건들을 동시에 배치하고 있는데, 여기선 신이 아담과 이브를 창조하고,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금지된 나무 열매를 따 아담과 나누어 먹고, 그로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장면들이 모두 한 공간 속에 그려져 있다.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동일 공간 속에 배치해 그 사건들로 이루어진 전체 서사를 표현하는 이러한 재현 방식은, 서로 다른 시간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걸 허용치 않는 사진의 재현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겐 낯설게 느껴진다. 우린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 사람과 대상들이, 마치 사진을 볼 때 처럼 사진을 찍은 바로 그 순간에 함께 존재하고 있던 것으로 인지하며, 그를통해 저 그림 속에 네 명의 이브와 세 명의 아담이 같은 순간에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고 느껴 이를 모순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각적 재현이 카메라를 통해 시간적 동시성의 요구를 충족 – 순간포착! - 시키게 된 것은 사진이 발명되고 나서도 한참 후에나 가능했던 일이다. 초기의 카메라는 한 장면을 잡아내기 위해 몇 시간에 걸친 노출과 감광 시간을 필요로 했었고, 그를통해 만들어진 사진엔 ‚순간’이 아니라 그렇게 노출된 만큼의 긴 시간이 찍혀져 있었다. (1827년 Nicéphore Niepce 가 자신의 거실 창밖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은 8시간의 노출을 필요로 했다![1])

 
 
 
 

1530Lucas Cranach (the elder) 가 그린 <파라다이스>에서도 한 공간 속에 서로 다른 시간의 사건들이 공존하고 있다. 신이 흙으로 아담을 빚어내는 장면부터 그의 옆구리에서 이브를 뽑아내는모습, 금지된 열매를 따먹고 난 아담과 이브가 신의 노한 목소리를 피해 숨어있는 장면들이 Limburg의 그림에 더 추가되어 있다. 이를통해 이 그림은 Limburg의 그것보다 더 상세하고 친절하게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나 소설이 그저 일어났던 사건들을 시간순서에 따라 기계적으로 전달하지 않고 서술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사건의 순서를 바꾸거나 특정 장면들을 강조하듯, 그림 또한 화가의 재량에 따라 일어났던 사건들의 순서를 재배치하거나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사건을 부각시킴으로써 서사의 시각적 재현을 다채롭게 한다. 이 그림에서 화가는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서사 가운데 신이 아담과 이브에게 계율을 전하는 장면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 정면에 배치하고 있는데, 이를통해 화가는 신으로 부터 받은 계율의 중요성을 저 에덴동산에서 일어났던 서사의 핵심 주제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위 두 그림에선 그래도 그림의 공간 속에, 동일한 시간이 아닌 서로 다른 시간들이 공존한다는 걸 알아보기가 쉬운 편이다. 그건 에덴동산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결국 아담과 이브, 그리고 신, 이 셋 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림 속의 여러 등장 인물들이 결국 모두 서로 다른 시간의 아담과 이브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이 번식과 번창을 거듭하는 동안 이 땅엔 수많은 아담의 후손들이 생겼고 또 그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사건들에 연루되게 되면서, 이제 그림을 통한 서사의 표현도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게 되었다. 이런 복잡한 서사를 표현한 그림들에선 한 공간 속에 공존하는 서로 다른 시간을 확인하기가 쉽지않다.

 
 
 

 

1470 Hans Memling이 그린 를 익숙해 있는 사진적 재현 방식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이 그림 속에 등장하는 저 군중들이 마치 같은 순간에 저 성벽 도시 안 팎에 운집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그림은 도시 주변의 모습을 한 순간에  포착한 풍경화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행적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서사화라는 걸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에서 쫓겨나는 상인들, 유대인들의 모의, 최후의 만찬, 유다의 배반, 예수의 체포, 대제사장의 사형판결, 십자가 행진, 골고다 언덕에서의 십자가 형, 예수의 죽음과 그의 부활까지, 소위 고난주간이라 일컫는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간의 삶들을 예루살렘이라는 한 공간을 중심으로 절묘하게 배치함으로써 여기서 표현되고 있는 사건의 경과를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의 이동을 통해 함께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우린 그림의 왼쪽 위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이어지는, 마치 책을 읽을 때와 같은 시선 이동을 통해 예수가 체포될 때 까지 사건의 전개를 읽는데“, 그 사건의 긴장감은 이어 도시의 중심이자 그림의 한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대제사장의 사형판결을 통해 절정에 달한다. 그 후 시선은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걸음을 쫓아 성벽을 오른쪽으로 돌아 저 위 쪽의 언덕을 향해 가면서 이전에 일어났던 모든 시간적 사건들을 다시한번 공간적으로 조망하게 된다. 그림의 왼쪽 위,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과 대응점을 이루는 오른쪽 끝에서 부활해 승천하는 예수의 모습은 이 전체 서사의 결말이자 마침표인 셈이다.

 

근대까지 서양미술의 큰 쟝르를 차지하는 순교 성인들을 그린 그림들은, 이처럼 그림 속에 공간화되어 존재하는 서로 다른 시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다. 그건 바로 순교자라는 단어 자체가 시간성과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는 특정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다. 그들이 순교자로 불리는 건 그들이 죽었기때문이다. 누군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는 아직 순교자가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크리스트교 신앙의 확산에 부인할 수 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그를 말이나 글로 전할 때는 없던 표현의 문제가 생긴다. 도대체 순교자와 그들의 순교 행위를 어떻게 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 이들을 아직 순교하기 전, 말하자면 죽기 전의 모습대로 그린다면 이는 순교자 그림이 아니라 다만 특정 인물들의 초상화가 될 것이다. 그렇다고 죽은, 그래서 비로소 순교자가 된 이들의 시체를 그림으로 그려, 누구 누구 순교자라는 제목을 붙여 보여줄 수만도 없다. 그건 시체 보관소의 시체들을 상기시킬 것이다. 이 난점을 해소하기 위해 서양 회화가 택한 방법은 이들 순교자들을 아직 살아 있으면서도 이미 순교자인 상태로, 말하자면 아직 죽지 않았으면서도 이미 죽어 순교자가 된 상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를위해, 그림은 위에서 언급했던 서사의 시각적 재현의 원리를 따라, 죽기 전의 순교자와 죽은 순교자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간극을 한 그림 속에 동시에 공존시켜 표현하게 되었다. 

 

이 대표적인 사례를 우리는 1416 Henri Bellechose가 그린 <데니스 성인의 순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주인공 Denis성인은 총 네 번 등장한다. 왼쪽 아직 감옥에 갖혀있을 때의 그의 모습과 오른쪽 끝, 붙들려와 사형을 기다리는 모습, 그리고 형틀에 댄 목이 반쯤 잘려나간 모습, 마지막으로 완전히 목이 잘려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이 그것이다. 우린 이제 이 네 명의 데니스가 동일한 인물이 서로 다른 시간에 겪어야 했던 사건들을 공간적으로 시각화시킨 것이라는 걸 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감옥에 갇혀있던 데니스에게선 보이지 않던 성인을 상징하는 후광이 사형을 기다리는 데니스에게서부터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목 잘리기를 기다리고 있던 순간의 데니스는 아직 죽지 않았건만, 그에겐 이미 순교자로서의, 말하자면 종교를 위해 죽은성인으로서의 지위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그러나 한 그림 안에 동시적으로 표현된 사건들 사이의 이러한 시간적 간극은 성인과 사형수 사이에서도 발견되는데, 아직 사형 집행인이 칼을 내려치지도 않았는데 데니스 성인의 목은 이미 반쯤 잘려 나갔고, 또 한 명의 데니스는 아예 목이 잘린 채 뒹굴고 있다. 화가는, 사형 집행인이 칼을 들어올리고, 사형수의 목이 잘리며, 잘린 목이 바닥에 나 뒹구는, 단두형의 가장 극적인 순간의 장면들을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움직이지 않는 그림들을 통해 움직이는 시간의 생생함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1653 Guercino가 그린 <카트린 성인의 순교> 1628년 니콜라스 푸쎙이 그린 <에라스무스 성인의 순교>에서도 그외 대부분의 순교성인 그림들에서도 마찬가지로 -  우리는 이러한 살아있는, 그래서, 아직 순교자가 아닌 인물들을, 이들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차지하게 될 순교자라는 지위로 표현하기 위한 화가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림 속의 카트린과 에라스무스는 아직 죽지 않았건만, 저 하늘 위에선 푸토가 이미 순교자를 상징하는 월계관과 야자수 가지를 든 채 이들이 죽어 순교자가 되기를 기다리고있다. 그림 속에서 고문 당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성인들이 그들의 « 현재 »를 보여준다면, 저 푸토들은 이 그림엔 그려있지 않은 않은 이들의 순교자 성인으로서의 « 미래 »를 대변하고 있다. 이를통해 이 그림들 역시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한 그림 속에 공존시킴으로써 그 사이의 시간 속에서 일어난 하나의 서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 http://www.wu-wien.ac.at/usr/h99a/h9950236/fotografie/foto3.htm 

[1] G.E. Lesseing : Laokoon, Reclam, XVI.

[2] Vgl. Carsten-Peter Warncke : Sprechende Bilder – sichtbare Worte. Das Bildverständnis in der frühen Neuzeit, Wiesbaden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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