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스크랩] 여자의 육체

김남시 2005. 10. 2. 08:50

서양 문명사에서 여자의 육체만큼 많이 다루어진 대상이 있을까.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마돈나의 엉덩이까지 서양은 거의 편집증적이라 할 만큼 여자의 육체에 집착해왔다. 서양은 2천년의 역사를 거쳐 여자의 육체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들을 생산해내었고, 이는 오늘날 패션, 건강, 미용, 결혼, 요리, 육아, 나아가 직업과 예술, 정치, 문화 등 우리 삶의 모든 분야 속에서 다시 조합되고 반복되며 재생산되고 있다. 그 속에서 여자의 육체는 조각되고 그려지던 감상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벗겨지고, 훔쳐보는 에로틱한 시선의 대상이자, 빼앗고 빼앗기던 소유와 정복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여자의 육체는 또한 절개되어 탐구되던 해부의 대상이기도 했다. 여자의 육체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이러한 해부적 욕구는 자연과 창조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진리에의 의지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었다. 도대체 왜 여자의 육체는 이처럼 길고도 끈질기게 저 모든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엿새간의 작업을 통해 인간과 모든 생물을 포함한 자연을 창조하면서 신은, 자연에게 스스로를 재생할 수 있는 자기산출능력을 주었다. 그를통해 자연의 모든 생물들은 스스로 짝을 맺고, 생명을 잉태해 낳고 번식하면서, 그렇지 않았다면 한 생명이 수명을 다할 때마다 매번 다시 그를 창조해야 했을 신의 창조 작업을 대리하게 되었다. 신은, 어쩐지 그리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않았을 남자의 육체엔 극히 짧고도 미미한 역할 만을 맡기고는, 생명을 잉태하고, 몸 속에서 그를 키우며, 출산하는 인간 재창조의 작업은 전적으로 여자의 육체에 일임하였다. 그를통해 남자들은, 월경과 임신, 출산을 통해 자신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저 비밀스러운 자연의 창조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여자의 육체를, 신의 기획의 일부인 자기 산출적 자연 natura naturans으로 간주하게 된다. „여인들이 자궁을 통해 (아이를) 잉태하듯, 이 세계도 앞으로 생겨날 사물들의 원인을 잉태하고 있다“ (De trinologie, III, 9.16) 는 말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남자들을 대표해, 여자의 육체가 갖는 자연과의 동류성에 놀라와했다.

이를통해 서양 문명사에서 자연은 잉태하고, 출산하며, 양육하는 여자의 육체로 메타포화된다. 수십개의 젖으로 모든 자연의 생명들을 먹여 살리는 여신 Artemis (Isis)는, 유럽 정신사에 끊임없이 등장했던 여성으로서의 자연의 대표적 메타포였다. 자연이 자신의 자신 속에 신의 창조의 비밀을 감추고 있듯, 저 여인은 자신의 모습을 두터운 베일 아래 숨기고 있었고, 자연과 창조의 비밀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시도는 저 여인의 베일을 벗겨 그녀의 얼굴과 몸을 드러내는 행위로 메타포화된다.

알렉산더 훔볼트는 괴테에게 헌정했던 자신의 책 <식물 지리학의 이념 Ideen zur einer Geographie der Pflanzen>의 표지에서 그의 광범위한 자연 탐구를 여신의 베일을 벗기고 있는 아폴로 신의 모습을 통해 표현한다. 1681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된 Blasius의 <동물 해부학 Anatome Animalium> 의 표지에도 동일한 모티브가 등장하는데, 한 손엔 해부용 칼을 또 한 손엔 돋보기를 든 과학을 상징하는 여인이 자연의 베일을 벗겨 그녀의 얼굴과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동물들을 해부해 찾아내려 했던 자연의 비밀은 베일에 가려있던 여신의 벗은 모습이었던 것이다.이처럼 스스로를 감추고 있는 (Sichverbergen) 존재로서의 자연과 연결된 여성의 육체는 그를 가리고 있던 베일을 ‚벗기고 offenen, 밝힘 lichten’ 으로써 열릴 자연의 진리 라는 의미론을 얻게 된 것이다.

위 두 그림에선 자연과 그녀의 베일을 벗기고 있는 탐구자 사이의 관계는 아직 평화로와 보인다. 여신의 베일을 벗기는 손길은 폭력적이지 않으며, 자연은 그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 것에 기뻐하는 듯하다. 어쩌면 그녀는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베일아래 가려진 그녀 모습에 대한 인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자연은 변장하기를 좋아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때론 이 부분을, 때론 다른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그에게 지치지 않고 다가가는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그녀 전부를 알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한다.“ (De linterpretation de la Nature, # 12)는 디드로의 말 속에서 인간은 자연이라는 여인의 스트립 쇼를 관람하는 관객이 된다. 우리가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면 그녀는 스스로 베일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탐구자들은 자연이 덮고있는 베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근대 초 자연에 대한 모든 종류의 신학적 경외심이 사라져가자 유럽인들은 강제로라도 그녀의 베일을 벗기려 했기 시작했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공격적 태도를 우리는 <순수이성 비판>의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곳에서, 자연은 부드럽게 다루어야 하는 상처받기 쉬운 여인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강제로라도 답변을 강요해야 하는, 이성의 법정에 호출된 증인으로 등장한다. „이성은 한 손엔 자신의 원리들을, 다른 손엔 실험을 가지고 자연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건 물론 자연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이성은 선생이 하려는 모든 걸 그저 말하게 하는 학생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자연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답변하도록 증인을 강제하는 법관으로써 자연에 다가가야한다." (Immanuel Kant : Kritik der reinen Vernunft, Vorrede zur zweiten Auflage, B XIV.)

칸트의 충고를 따른 많은 과학자들의 실험실에서 인간이 고안한 도구와 실험의 강제를 통해 자연의 베일이 벗겨지는 사태에 대해 몇몇 인문주의자들은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자연으로부터 그녀의 베일을 빼앗지 말라. 그녀가 너희들의 정신에 드러내 보여주기를 원치않는 걸 지렛대와 나사를 가지고 억지로 보려하지 마라“ (Faust I, 670)고 경고하며, 니체는 „우리는 자신의 수수께끼와 화려한 불확실함 속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연의 부끄러움을 존중해야 한다.“ (Nietzsche contra Wagner, Epilog 2) 고 항변했다. (Pierre Hadot : Zur Idee der Naturgeheimnis. Beim Betrachten des Widmungsblattes in den Humboldtschen „Idee zur einer Geographie der Pflanzen.“ 1982 Mainz.에서 재인용)

그러나, 우린 근대 과학의 역사가, 유럽인들의 앎에의 의지 앞에서 저 자연의 부끄러움이 노골적으로 무시되고 만 역사라는 걸 알고있다. 이제 사람들은 (남자들은!) 관찰과 실험이라는, 그 효과가 입증된 도구를 가지고 아직 벗겨지지 않고 남아있던 최후의 자연, 여자의 육체를 잘라 그 내부를 들여다보려 했고, 이미 베일에서 벗겨진 여자의 육체는 그를통해 남자들의 시선 앞에서 열리고 해부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열어 들여다보려 했던 여자의 육체는, 바로 그 육체를 ‚자연’으로 만들어주었던 „임신하는 육체“였다.

놀랄만한 지식욕으로 평생동안 자연의 비밀을 파헤쳐왔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 누구보다 먼저 여자의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관심을 드러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해부 스케치에서 보듯 여자의 육체에 대한 그의 관심 역시 여성의 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역학과 수학, 자연과학과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정력적으로 찾아 헤맸던 저 창조의 원리 Disegno Dei 가 인간에게선 임신과 출산을 하는 여성의 육체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그가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그의 뒤를 이어 여자의 육체를 열어 보았던 다른 해부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 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 Andrea Versalius는 1543년 출판한 자신의 역사적 저서 의 표지 한 가운데에 여자의 육체를 그려넣었다. 그 자신과 조수, 잘라낸 살 덩어리들을 처리할 백정과 개, 그리고 인체 해부라는 센세이셔널한 구경꺼리를 위해 해부실을 꽉 채운 저 모든 남자들의 시선 앞에서 자궁과 태반을 열어 보이고 있는 여자의 육체는, 호기심에 불타는 남자들에게 감추어져 있던 자연의, 곧 신의 창조의 비밀을 드러내 보여줄 탐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1493년부터 1658년까지 출판된 14종의 해부학 서적 중 4권의 표지그림이 이처럼 해부된 여자의 육체를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 Thomas Laquer : Making Sex. Body and gender from the Greeks to Freud, Harvard Uni. Press 1992, S.74.)은 당시 해부학자들이 어렵게나마 구할 수 있던 시신들이 거의 남자들(사형수나 범죄자들) 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들은 실제로는 거의 구할 수 없었던 여자의 육체를 절개해 자신들의 책 표지에 실음으로써, 자신들이 해부를 통해 자연이라는 여인의 비밀스러운 내부를 열어 그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표지그림엔 남자가 등장했던 다른 해부학 서적들 에서도 본문 중에 등장하는 여성의 육체들은 모두 배가 열려 태반과 태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임신한 여성들이었다. 근대 초기 해부학의 역사 속에서 여성의 육체는, 그 어떤 다른 특성보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사실을 통해 특징지워졌고 바로 그를 통해서만 해부학적 의의를 부여 받았다. 여자의 육체가 „자연“으로서의 지위를 갖게했던 임신과 출산의 가능성은 이를통해 그 육체의 정체성, 곧 „여성성“과 결합하게 된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여성의 육체에 대한 해부학적 관심은 해부학 서적들에로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유럽 대도시들에서 인체 해부가 권태로운 귀족과 시민들을 위한 구경꺼리로 자리잡고 그를위해 도시마다 원형의 „해부극장 anatomisches Theater“이 생기는 해부의 대중화 시대를 맞아, 유럽인들은 해부된 여자의 육체를 삼차원의 조형물들로도 만들어 내었다. 몸 속의 모든 기관들을 하나 하나 떼어내고 다시 맞추어 넣을 수 있는 이러한 해부모델을 통해 여자의 육체는 그 내부 기관들까지 들여다 보고 만져볼 수 있는 장악의 대상이 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자궁과 그 안에 들어있는 태아는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해부된 인간 육체와 장기들이 지니는 ‚피와 살’의 리얼리즘을 재료의 물질성 속에 억압하고 있던 이런 해부 모델들은 육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준 획기적인 재료, 밀납이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색깔과 질감 면에서 실제 인체 기관들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 사실적 재현을 가능케 한 밀납 덕분에 이제 해부 모델은, 스스로 자기 육체를 열어 드러내 보이던 초기 해부도들 속의 „살아있는 시체들“을 실물적이고 생생하게 구현시킬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인의 의 학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Clemente Susini (1754-1814)의 작품 Venerina, 일명 „해부된 비너스“는, 오늘날 해부학 서적에 등장하는 익명화되고, 물질처럼 대상화된 육체와는 달리, 목걸이를 한 채 잠자듯 누워 있는 젊은 여인의 사실적인 육체 를 재현하고 있다. 여자의 육체에 대한 페티시즘적 도착을 느끼게도 하는 이 해부 모델 역시, 몸 속의 모든 장기들을 하나 하나 떼어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저 여인의 배를 덮고 있는 대장을 들추어 내면 그 아래 절개된 자궁 속에선 태아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 ‚해부된 비너스’ 역시 임신한 비너스 였던 것이다.

임신과 출산을 통해 규정된 여자의 육체와 여성성이라는 이러한 오랜 사고의 틀이 오늘날의 현대 문화 속에선 어떤 형태로 계승되고 있는가를 찾아보는 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오늘날 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는 프라스틱 해부모델이 임신한 비너스의 명목적 계보를 잇고 있다면, 저 절개된 여성의 육체에 부여되어 왔던 여성성의 의미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출몰한다. 바로 임신한 바비다.

긴 금발머리, 쭉 뻗은 다리와 얇은 허리,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바비가 오늘날 현대 서구 여성들의 이상적인 육체상을 구현하고 있다면, 임신한 바비는 거기에 오랜 역사를 통해 여성의 육체에 부과되어 왔던 자연으로서의 여성성을 결합시키려는 시도다. 임신한 비너스에겐 그래도 아직 가시적이었던 여성 육체의 모든 다른 육체적 특성들 (내장 기관들)은 여기선, 바비의 배 덮개 아래 들어있는 태아 하나로 축소되었고, 그를통해 여성의 육체는 다른 모든 ‚불필요한’ 육체들로부터 „해방“되어 오직 ‚임신하는 육체’로, 저 오래된 자연성=여성성의 순수한 이념으로 환원되어 있다.

출산이냐 몸매냐라는 대립 속에서 갈등하는 현대 여성들에게, 태아 인형과 배 덮개만 제거하면 다시 예전의 완벽한 몸매로 되돌아가는 바비는, 저 오랜 육체적 여성성의 현대판 이데올로기를 체현하고 있다.

출처 : 발터 벤야민과 현대
글쓴이 : 김남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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