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아담의 죄

김남시 2006. 5. 1. 06:55

 

소위 예술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의 그림들, 서양 종교화들은 오늘날처럼 화가의 새로운 아이디어나 창조성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들이 아니었다. 그림들은 이미 사람들이 알고있는 텍스트의 내용들을 그림이라는 매체로 번역해서 보여줌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알고있던 성경과 성인들의 일화들과 그것들의 종교적, 도덕적 교훈들을 재인식하고, 그를 자신의 종교적 삶으로 실천하게 하기 위한 목표로 그려진 것이다. 다른 모든 성경 일화들 중에서도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특히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는데, 이는 그것이 서양 기독교 교리의 핵심의 하나인 원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다만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될 있는 존재가 되었고, 이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 형을 받는 이유가 되기도 되었는데, 이를통해 원죄는 구약의 죄와 신약의 구원을 연결시켜주는 중심이기도 했다.   

 

성서해석의 권위자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주석[1]에 의하면, 신을 시기하던 악한 천사가 뱀을 사주해 아담이 아닌, 이브를 먼저 유혹케 했던 이유는 이브, 곧 여자가 «인간 쌍 중 더 약한 쪽»이라는 걸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담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 거역하게 하기위해 먼저 그의 부인을 유혹하는 전략을 사용했던 것인데, 그건 저 악한 천사가 «남자는 그렇게 쉽게 남의 말을 믿고 속아 넘어가지 않겠지만, 그 부인이 저지르는 잘못은 함께 따라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는 올바른 신념을 갖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 특히 «자신과 감정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의 말에는 쉽게 굴복 »하는 인간심리를 이용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브가 금지된 열매를 먼저 따먹은 것이 뱀의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라면, 아담이 이브가 주는 열매를 받아 먹은 것은, «자신의 하나 뿐인 부인과의 관계의 끈을, 비록 그것이 죄를 저지르는 일일지라도, 저버리져 하지 않았기 때문»[2] 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담은 자신의 유일한 아내 이브와의 관계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것이 죄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가 주는 열매를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 먹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행동의 배후에는, ‘아무리 죄라 할지라도 신이 자신에게 짝지워준 여자를 따르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을 것[3]이라는 잘못된 판단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이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할 신에 대한 교만한 마음의 소산이라고 본다.

 

 

 

Domenichino <아담과 이브>(1623-25)는 신의 추궁에 대해 « 당신께서 제게 짝지어 주신 여자가 열매를 따 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창세기 3 :12)라고 대답하는 아담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곧 교만의 죄를 짓고 있는 아담의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저 교만한 마음으로 인해 신의 규율보다 자기 여자와의 관계를 더 중시한 죄를 지은 아담에게, 저 질투하는 신 여호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먹여 살리던 그의 여자를, 아담의 땀흘려야 하는 노동에 떠 넘긴다. 

 

원죄를 통해 아담과 이브에게 일어난 가장 극적인 사건은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의 육체와 감각이 더 이상 인간의 의지를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원죄를 짓기 이전 아담과 이브의 육체는 전적으로 그들의 의지와 정신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리고, 이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고는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 땅을 정복하라’ (창세기 1 :28)라는 신의 말씀을 따라 아담과 이브가 번식을 위한 활동, 곧 성행위를 할 때조차 그랬다. 많은 이들 기독교가 인간의 성행위 자체를 부정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창세기의 위 구절은 신이 성행위를 금기시하기는 커녕, 오히려 번식을 장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에따라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카톨릭 신부와 수녀들의 독신생활을 신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판하는 데 사용한다.[1] 문제가 되는 건 다만 성행위에 동반하는 육체적, 성적자극인데, 루터는 성행위시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이 «치명적이고 tödlich, 저주할 만한 verdammlich,악한 böse육체적 자극»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는 의무를 수행하는 한 종교적으로 정당화된다[2]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원죄 이전의 아담과 이브에게는 이러한 성행위에 동반되는 육체적 자극이 (필요) 없었다. 그들의 « Libido » 는 오늘날 우리들에게서 처럼 « 쾌락을 제공하지도, 그를 길들이려는 정신에 저항함으로써 스스로 분열되고 자신과의 모순에 빠지»[3]지도 않았었다. 그들이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었던 이유는, 이처럼 «쾌락이 그들의 성기관들을 의지에 반해 자극시키지도, 육체가 자신의 불복종을 통해 인간의 불복종을 비난하는 증인으로 등장하지도»[4] 않았었기 때문이다. 금지된 열매를 먹고나서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벗은 몸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은 그와 동시에 그들의 육체가 의지와 정신의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 반응하고 움직이는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번식을 위한 성행위에 육체적 자극이 동반되게 된 것도 원죄를 통해 생겨난 이러한 육체의 반란의 결과인데, 이로인해 원죄 이후의 인간의 성행위는 부끄러움, 그리고 죄와 분리할 수 없게 연결되어 버렸다. 

 

아담이 그것이 죄인줄 알면서도 열매를 받아먹은 것이 이브와의 관계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결국 인간의 성적기관이 의지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사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사건을 둘러싼 많은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아담이 이브와의 관계에 집착했던 이유가, 혹 아담이 이브에게 성적자극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담이 거절하지 못했던 금지된 열매란 이브의 성적자극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이런 종류의 상상들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성행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1593년 아르메니아에서 나온 아담 이야기다. 이에 따르면 아담은 이브가 건네주는 사과를 근 세시간이나 고집스럽게 거절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여자의 아름다움이 그의 머리 속에서 이성을 앗아가버렸다. 그녀의 육체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할지몰라 갈등하던 아담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여자와 헤어지고 그녀를 다른 이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다. 그녀가 신의 계율을 어긴다 하더라도, 신이 정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 난 이 여자 없이 살 수 없다.’ 그리곤 열매를 받아 먹었다.[5]      

 


 

Tintoretto의 아담과 이브(1550)는 다른 그림들에선 좀처럼 찾을 수 없는, 아담의 저 망설임과 거절의 순간이 그려져 있다. 뱀의 유혹에 빠져, 도발적인 표정으로 아담에게 열매를 왼손으로 ! – 권하고 있는 이브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녀로부터 흠칫 물러서고 있는 아담은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있다. 그러나, ‘보석처럼 빛나는이브의 육체 앞에서 아담은 망설임 끝에 결국 저 열매를 받아먹을 것이다. 이브의 왼쪽 뒤로 이들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는 모습이 조그맣게 미래형으로 ! - 그려져있다.

 

구약 창세기엔 저 금지된 열매가 어떤 나무의 열매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미 중세 초부터 사람들은 그것이 사과열매라고 믿었고, 또 그렇게 그려왔다. 여기에도 역시 저 이야기의 성적함의가 작동하고 있는데, 여자의 가슴을 닮았다는 이유로 사과는 이미 그리이스, 로마시대부터 성적 심볼로 여겨져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Poma legere’, 과일(사과) 훔치다라는 말은 성행위 Coitus ‘ 에두른 표현이었다.[1] 이러한 배경하에서 이미 5세기부터 라틴 교회들에서는 이브가 따 아담에게 건네 준 것이 사과였으며, 나아가 신이 금지한 열매란 곧 여자의 성기를 지칭[2]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전해지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화가 Lukas Cranach der Ältere  그린 일련의 <아담과 이브>씨리즈 (1509-1538)에서도 우리는 이제 금지된 열매, 곧 사과를 따먹는 장면의 성적 함의들을 더 잘 읽어낼 수 있다. 두 그림에서 아담은 사과를 받아먹으면서 이브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이를통해 화가는 사과를 받아먹는 아담 행위이 동기가 이브에 (성적)애착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은 사과가 갖는 상징적 의미를 통해 더 강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죄임을 알면서도 금지된 사과를 요구함으로써 아담 역시 원죄에 깊숙히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화가들은 사과를, 혹은 이브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아담의 모습을 통해서 표현했다. Hugo van der Goes 1467년에 그린 <원죄>에서는 위에서 살펴본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해석이 고스란히 다 드러나고 있는데, 첫째, 원죄, 유혹의 오랜 의미론에 따라 여자의 모습을 한! - 의 유혹에 넘어가 먼저 금지된 사과를 따먹었던 것이 이브라는 것, 둘째, 그러나 아담 또한 그런 이브에 대한 애착을 통해 결국 사과를 받아먹음으로써 역시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이 두번째 생각이 이브와 사과를 향해  뻗고있는 아담의 왼손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알프레히드 뒤러의 유명한 판화 <아담과 이브> (1504) 역시, 아담이 저 사과를, 우리 해석대로라면 이브의 육체를 욕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사과를 향해 내어뻗은 그의 손을 통해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히려 이브는 왼손에 쥔 사과를 뒤쪽으로 감춤으로써 아담의 저 적극적인 공세에 방어태도를 취하는 듯이 보인다. 만일 아담이 이처럼, 금지된 사과를, 이브의 육체를 적극적으로 욕구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미 그를통해 죄를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아담의 죄있음을 강조하면서도, 뒤러는, „두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원죄 극복이라는 희망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건 아담을, 왼손으로는 금지된 사과와 육체적 쾌락을 요구하면서도, 오른손으로는 인식의 나무가지를 붙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해 내려오는 일화에 의하면, 아담의 아들 Seth가 에덴 동산에 있던 나무가지를 아담의 무덤에 심었는데, 그렇게 자라난 나무로부터 이후 그리스도가 그를통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십자가가 만들어진다.[1]

 


 

 

Jan Mabuse Gossaert <아담과 이브> (1520) 에서 금지된 사과, 이브의 육체를 원하는 아담의 욕구는 더욱 노골적이고도 분명하게 그려져있다. 그는 왼손으로는 이브의 몸을 붙잡고, 오른손으로는 자신의 입을 가리키면서 이브가 뒤쪽에 감추고 있는 사과를 어서 달라고 졸라대고 있다.

 

 
 

같은 화가가 그린 또 다른 <아담과 이브> (1525)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원죄를 짓는데 있어서 아담의 자기분열 혹은 자기모순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는데, 자신에게 사과를 권하는 이브를 향해 왼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것이 신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는 걸 상기시켜 주면서도 아담은 땅을 향해 있는 다른 손으로는 손가락을 교차시키는 거짓 맹세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그의 리비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바로 이 순간 그의 이성적 의지와 충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손 아래 쪽엔, 악마, 타락한 천사, 인간의 무절제한 호기심과 욕망의 상징으로 자주 그림에 등장하는 원숭이가 사과를 들고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 화가는 이 원숭이와 자신의 왼손을 배반하고 있는 아담의 오른손 사이에, 아담과 이브에게 저 열매를 따먹지 말 것을 이야기하는 신의 모습을 그려넣음으로써, 아담이 자신의 욕망 때문에 결국 신의 계율을 어기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 에덴 동산에서의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여자는 뱀과 악마의 유혹에 빠진 죄를, 남자는 육체적 쾌락에 대한 욕구로 인해 신에게 불복종한 죄를 속죄하고 거듭날 수 있을까? 카톨릭과 개신교 교리 모두가 이러한 원죄로부터의 구원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속죄는 인간을 불쌍히 여긴 신에 의해 인간 세계에 보내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에덴 동산에서의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를 대속하는 구원자 예수는, 그리하여 기독교 교리 속에선 자신의 죄를, 그리하여 결국 모든 인간의 죄를 씻는 두번째 아담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원자, 예수를 낳은 마리아는 이를통해 저 첫번째 여자, 이브의 죄를 씻는 두번째의 이브가 된다.   

 

 

 1606년 카라바치오가 그린 마리아와 아이 예수는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그림이다. 두번째 이브 마리아와 두번째 아담 예수가 함께 힘을 합쳐 저 에덴동산에서의 원죄의 원흉이었던 뱀의 머리를 밟아 그를 제압하고 있다. 이를통해 이 그림은 최초의 인간이 저질렀던 원죄가, 나아가 그를통해 우리 모든 인간들이 물려받은 죄가 결국 마리아와 그녀가 낳은 예수를 통해서 씻겨질 것임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구약의 원죄와 신약의 예수를 멋지게 연결시키고 있는 이 그림은, 원죄의 죄의식에서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구원이라는 메시지가 갖는 추상성을 마리아와 예수의 발 밑에서 꿈틀거리며 죽어가는 뱀의 모습 속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림이 갖는 이러한 심리적이고 구체적인 효과가, 우상에 대한 뿌리깊은 신학적 혐의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림이 사라지지 않았던 이유였다.             

 


 

[1] Augustinus : Gottesstatt, 14. Buch.

[2] Augustinus : Gottesstatt, 14. Buch, Kapitel 11.

[3] Augustinus : Gottesstatt, 14. Buch, Kapitel 13.

[1] Martin Luther : Vom ehelichen Leben (1522), in M. Luther, Vom ehelichen Leben, Reclam, S.15.

[2] Martin Luther : Ein Sermon von dem ehelichen Stand, verändert und korrigiert durch Dr. Martin Luther, Augustiner zu Wittenberg (1519) , in M. Luther, Vom ehelichen Leben, Reclam, S.6.

[3] Augustinus : Gottesstatt, 14. Buch, Kapitel 16.

[4] Augustinus : Gottesstatt, 14. Buch, Kapitel 17.

[5] Paul Schwarz : Die neue Eva. Der Sündenfall in Volksglaube und Volkserzählung, Göppingen 1973. S.51.

[1] Paul Schwarz : Die neue Eva. Der Sündenfall in Volksglaube und Volkserzählung, Göppingen 1973. S.26.

[2] Paul Schwarz : Die neue Eva. Der Sündenfall in Volksglaube und Volkserzählung, Göppingen 1973. S.26.

[1] Paul Schwarz : Die neue Eva. Der Sündenfall in Volksglaube und Volkserzählung, Göppingen 1973. S.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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