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진리, 시간 그리고 죽음

김남시 2006. 5. 20. 05:11

 

 

진리는 스스로 참되다고 하는 미덕 말고도 세계에 스스로를 실현시킬 만할 힘을 가지고 있을까. 진리는 어떤 도움 없이도 세상에 자신의 진리성을 관철시킬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 진리는 그를 위협하는 모든 세상의 거짓과 허위를 혼자의 힘으로 이기고 승리할 있을 만큼 강한가. 유감스럽게도 진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달리, 혼자서는 자신을 실현시킬 힘도, 그를 위협하는 세상의 모든 힘들에 대항해 싸워 이길만한 능력도 없으며, 자신의 진리성만으로 세상 모두에게 인정받을 만큼 강하지도 못하다. 진리는 너무나 자주 거짓과 비진리에게 승자의 자리를 빼앗기며, 시기와 불화, 중상과 모략의 공격에 굴복하고, 때로는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채 초라하게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이런 진리의 약함과 패배를 너무나 많이 겪어왔던 탓일까. 서양문화가 만들고 발전시켜온 진리에 대한 의미론 속에서 진리는 이처럼 힘없고, 연약한 그래서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모든 외적인 꾸밈과 가림, 은폐와 왜곡을 거부하는 벌거벗은 진리 veritas nuda“ 의미론에 따라 전라의 여인의 모습을 진리는, 거의 대부분의 그림들 속에서 그를 위협하는 세상의 악들에게 둘러싸여 해침을 당할 위기의 순간에 처해있다. 마스크를 들고있는 허위(거짓) 인간 마음 속에 악한 감정을 불지르는 횃불을 시기(질투), 자신의 흉악한 얼굴을 베일 속에 감추고 있는 중상(모략) 당장이라도 연약하고 멋모르는 진리를 해치려고 달려들고 있는데, 진리는 괴한들로부터 자신을 지킬 힘도, 능력도, 의지도 없이 벌거벗은 무방비 상태에 있다.

 

 

누가 스스로조차 방어하지 못하는 진리를 시기와 거짓과 중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줄 것인가. 하나, 오직 시간만이 진리를 구해낼 있다. 진리는 날개를 늙은 시간의 도움으로만 비로소 자신의 적들로부터 몸을 피해, 시간이 이끄는 천상의 세계로 나아가 스스로 싸워 얻은 것이 아닌, 자신의 승리를 맞이할 것이다. 시간이 허위와 시기, 중상과 싸워 그들로부터 진리를 구해내어야만 비로소 진리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위의 어둠을 밝히는 빛이 것이다. 서양 문화 속에서 진리가 시간의 Veritas filia temporis 등장하는 것은 이처럼 진리가 탄생하고 나아가 실현되는데 있어 시간이 필수적인 요소라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진리에게 자신의 승리를 스스로 쟁취할 힘이 결핍되어 있다면, 진리가 이처럼 자신의 늙은 아버지 시간의 도움을 통해서만 비로소 거짓과 허위와 중상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을 실현할 있는 수동적 존재라면, 이는 진리를 쫓는 인간들에겐 비극적 사실이 아닐 없다. 그건 우리들에겐 우리가 믿는 진리가 그것이 태어난 순간부터 스스로 세상 모든 이에게 자명한 진리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진리는 언젠가 시간이 그를 구해줄 때까지 끊임없이 거짓과 시기와 중상의 위협에 처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인 사실은, 진리를 구해내는 시간이 결코 우리들의 제한된 삶의 시간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삶의 시간은 우리가 믿는 진리가 실현되는데 걸리는 시간보다 대개의 경우 훨씬 짦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진리가 아직 실현되지 못한 지금의 순간을 사는 우리들에게, 과연 진리가 언젠가 시간에 의해 구출될 있으리라는 우린 어떻게 확신할 있는가. 우리가 믿는 진리의 진리성이 그를 구해줄 시간에 달려 있다면, 그리고 진리실현의 시간을 우리가 우리의 삶의 시간 내에 직접 체험할 없다면, 과연 우리의 진리가 진정한 진리라는 어떻게 있는가. 우리는 진리의 진리성이 실현되리라는 희망이 없어도 다만 그것이 진리일 것이라는 현재의 믿음만으로 그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직 스스로를 실현시키지 못한, 그래서 아직 진리로 인정받지 못한 진리일지라도 여전히 진리로써 추구하고 좇아야 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자의 미덕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이 믿는 진리가 실현될 것을 조급하게 희망하는 것은 오히려 진리의 진리성을 훼손시키는 것은 아닐까.

 

진리와 시간과의 관계는 이처럼, 우리 인간들에겐 진리를 실현시키는 필요한 세계시간과 우리의 제한된 삶의 시간 사이의 비극적 편차[1]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이는 진리를 구해내는 시간이, 우리 인간들에겐 세계에서의 우리의 삶을 앗아가는 죽음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은 진리를 거짓과 중상으로부터도 구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제한된 삶의 시간을 가진 우리 인간들을 세계의 삶으로부터 강탈해 가기도 한다. 바로그로인해 시간의 알레고리는 동시에  죽음의 알레고리와 동일한 커다란 낫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세계 존재로서의 인간의 현존재 속에는 이미 그것의 종말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2] 그리고 종말이 죽음일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시간성이 우리 현존재의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근거를 이루고[3]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무엇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늙게 만듦으로써 우리 육체의 아름다움을 강탈해간다. Giambattista Foggini 조각 <아름다움을 강탈하는 시간> 등장하는 시간이 안고 있는 것은 이제, 허위와 중상으로부터 구출된 진리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는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시간 또한 죽음의 지표인 커다란 낫을 아래 가지고 있다.

 

 

 

제한된 삶의 시간만을 가진 현존재로서의 인간들에게 시간은 이처럼 죽음과 분리될 없이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건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는 죽음이 시간을 상징하는 모래 시계를 들고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간이 우리의 젊음을 폭력적으로 강탈해가는 것에 비교한다면, 우리의 삶의 시간이 하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죽음은 오히려 신사적으로 보인다. 죽음은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젊은 시절의 육체의 아름다움에, 세속적 부와 명예에 빠져있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vanitas 이라는 것만을 묵묵히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경고는 우리의 삶에 남아있는 얼마되지 않는 시간을 가리켜 보임으로써 이루어진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알이 아래로 흘러 내리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삶의 마지막 시간이 다하는 순간 죽음은 조용히 우릴 찾아올 것이다. 그리곤, Jacek Malcyewski 그림에서처럼, 이제 남은 자신의 삶의 시간을 소비한 인간의 눈을 감기곤 그를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로 데려 것이다.

 

 

 

Malcyewski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죽음은, 경건하게 자신에게 몸을 맡기는 늙은 인간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보인다. 여기 등장하는 죽음은 어쩔 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하지만 인간의 짦고도 제한된 삶의 시간에 대해 깊은 동정과 이해를 가지고 있는 선량한 심부름꾼의 모습을 하고있다. 그녀는 우리가 Bruegel <죽음의 승리>에서 있는 같은, 처절한 전쟁을 통해 인간 세계를 정복한 폭력적 승리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권력자이건, 귀족이건, 카톨릭 교주건, 여자건 남자건 가리지 않고, 삶의 시간을 다한 모든 인간들을 자신의 전리품으로 만드는 공평한죽음의 부대는 그림 속에서 인간 세계를 완전히 정복해 버렸고, 폭력적 정복자는 그들이 휘두르는 아래 죽어가는 인간들에게 일말의 연민도 갖지 않는다.     

 

 

브뤼겔의 그림이 보여주는 격렬함과 극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죽음의 승리, 제한된 삶의 시간만을 가지고 있는 현존재로서의 인간 세계에선 , 바로 지금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과학과 의술을 가지고 우리는, 마치 죽음의 대군을 향해 칼을 뽑으려는 그림 속의 기사처럼 죽음에 저항해 보지만, 그건 다만 필연적인 죽음의 승리를 잠시 동안만 유예시킬 뿐이다. 죽음의 승리는, 이미 우리 인간 현존재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본질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승리가 인간 현존재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는 , 그로부터 벗어날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현존재가 붙들려 있는 시간성의 제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서양 기독교적 사고 속에선 메시아의 구원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구원은 동시에 신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시간이 끝나는 시간의 종말이며, 바로 그로인해 지금까지 불확정적으로, 불확실하게 머물러 있었던 세계의 모든 사건과 역사들이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진리와 심판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건 마치 최종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결정할 있게 하는 심판의 종료 호르라기처럼, 과연 누가 지금까지 인간 역사의 최종적 승자인지를, 누군가의 행동이,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 결과적으로 옳은 것이었는지 아닌지를 결정하게 주기 때문이다.

 

 

진리와 심판의 순간과 더불어 시작되는 새로운 시간 속에서, 시간은 이제 이상 죽음을 동반하지 않게 것이다. 인간은 구원과 더불어, 더이상 제한된 시간성에 자신의 존재의 본질적 근거를 갖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와 시간 속에서 진리는 더이상 거짓과 중상과 시기의 위협을 받지 않으며, 동시에 시간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진리성을 증거할 것이다. 시간의 종말,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을 주재하고 있는 죽음은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마치곤 새로운 세계 속에선 모습을 감출 것이다.

 


[1] Vgl. Hans Blumenberg : Lebenszeit und Weltzeit, Shurkamp.

[2] Heidegger : Sein und Zeit, § 45. S.310.

[3] Heidegger : Sein und Zeit, § 45. S.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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