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억압된 기표, 화장실 표지

김남시 2006. 8. 23. 01:56

 

화장실은 일상의 존재망각 속에서 잊혀져 있던 현존재의 성적차이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다. 망가진 망치가 비로소 도구로서의 망치의 망치임을 자각시켜 주듯, 화장실은 의도적이건 비 의도적이건 일상 속에서 망각되고 있던 사실, , 우리가 남자여자라는 서로 다른 성으로 나뉘어진 존재였음을 확인시켜준다. 직장 혹은 학교에서 고락을 함께하던 동료들은 물론, 몇십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도, 나아가 서로를 전혀 성적 존재로 의식하지 않던 부모와 자식들도 화장실 앞에선 자신의 성적 차이를 커밍아웃하고, 그에따라 헤어져 다른 문으로, 다른 길을 가도록 강요받는다. 화장실 밖의 세상에서 우리가 갈구해왔던, 사회-문화적 성적차이와 이분법적 성적 정체성, 그에따른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모든 노력도, 화장실에선, 비록 일시적이지만, 좌절하고 만다. 여기서 사람들은 화장실 밖의 세상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고 가꾸어 오던 모든 사회-문화적 정체성은 괄호친 채, 자신을 남자 아니면 여자의 범주로 환원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수백년 전에 바지가 남자의 전유물이기를 그치고, 남자 이발소와 여자 미장원이 통합되고, 남자와 여자의 사회적, 직업적 구분이 사라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화장실은 여전히, 저 오래된 성적 구분과 그에따른 분리를 고집하는 최후의 성채로 남아있다. 인류 역사 수천년을 함께 살아온 남자와 여자가, 그럼에도 여전히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떤 특별한 해석학적 테그닉(„남자여자-의 마음 읽는법“!)을 필요로하는 미지의 타자(„화성 남자와 금성 여자“!)로 남아있는 사실도, 어쩌면 화장실이 요구하는 저 시원적 구분에 기인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화장실 표지는, 오늘날의 Unisex의 시대엔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저 시원적 성적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기호다. 화장실이 근거하고 있는 구분과 분리의 원리가 이 차이의 기호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면, 화장실 표지는 혼동될 수 없는 분명한 기표적 차이를 통해 여기서 요구되는 저 차이를 명석하고도 판명하게 지시해야한다. 그렇다면 저 기호가 분명하고도, 혼동될 수 없게 지시해야 하는 차이는 도대체 어디에, 무엇에 근거해 있을까. 그건 남자와 여자를 구분시켜주는 육체적 성 기관[1]이다. 말하자면 화장실 표지는 남자와 여자의 성기관의 차이를 기의로 갖는, 말하자면 그 차이를 분명하고도 혼동될 수 없게 지시하는 기표이어야 한다. 화장실 표지가 남녀 성기관의 차이를 지시하는 기표라는 사실은 화장실이 인간의 생물학적 배설 욕구를 충족시키는 제도화된 공간이라는 사실과도 관계한다. 화장실이 그 어떤 문화적 외관에도 불구하고 결국 생물학적, 육체적으로 조건지워져 있는 인간의 배설 욕구와 직접적 관련을 가지고 있는 한 이런 점에서 라깡은 화장실을 „(오늘날) 서양인이 집 외부에서 자신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다수 원시사회와 현대인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스런 장소이자, 얼마나 현대인의 공공적 삶이 용변을 위한 분리urinale Segregation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는가를 상징하는 장소[2]라고 말한다. - 화장실은 어쩔 수 없이 생물학적, 육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성기관의 차이, 그와 관련된 성과 성교에 대한 상상을 환기시키는데, 이는 어디에서보다 화장실에 성과 섹스에 관한 낙서가 많이 생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장실 표지는 이제, 저 성기관의 차이에 근거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분명히 지시해야하면서도 동시에, 문화적, 문명적 공공 장소로서의 사회적 요구에 따라 저 본능적, 육체적 성 에너지에 근거해 있는 성적 환기를 최소화시켜야 하는 이중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이 어렵고도 모순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화장실 표지가 활용하고 있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대상을 직접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를 지시하는 걸 가능케 하는 언어적 원리, 곧 환유(Metonymie)와 제유(Synekdoche). 남자 구두와 하이힐, 중절모와 꽃모자, 담배 파이프와 핸드백, 바지와 치마, 나아가 바지를 입은 남자와 치마를 입은 여자 등의 그림을 통해 남자 화장실과 여자 화장실을 구분하는 화장실 표지가 이에 해당된다. 여기 등장하는 구두나 바지, 파이프나 남자얼굴, 신사복 입은 남자와 하이힐, 핸드백, 치마, 여자얼굴, 원피스 입은 여자는 궁극적으로는 각기 남자와 여자의 서로 다른 성기를 지시하고 있는 환유 혹은 제유들이다. 달리 말해, 이들은 환유와 제유의 방법을 통해 저 궁극적 기의, 성기적 차이에의 환기를 최소화(혹은 억압)하고 있는 기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 언급한 화장실 표지들이 여전히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실물적 대상들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면, 오늘날 화장실 표지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화장실 픽토그램은 치마입은 여자와 바지입은 남자의 모습을 보편적 기호의 수준으로까지 추상화시킴으로써 저 궁극적 기의 성기적 차이-에 대한 환기를 최소화(억압)시키고 있다.  

 
 
 

이러한 환유/제유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성기적 차이의 기의는 그를 환기시키는 다양한 기호적 변용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표면화시키고 있는데, 고추와 조개 그림(심지어 조각!)으로 남자와 여자의 성기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거나, 남여의 육체적 지표들을 유형화시켜 그를 배설행위와 연결시키는 방법 등을 통해 화장실이 연루되어 있는 시원적 성적 연관들을 작동시키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화장실 표지가 그 보편적 이해 가능성을 위해 그림기호를 사용하는 한 저 궁극적 기의, 곧 남녀의 성기적 차이에 대한 지시를 최소화하고 억압하는덴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다. 그림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의미변용과 역전, 풍부한 표현 가능성은 그 억압을 균열시키는 새로운 표현양식들을 늘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림의 반란을 우려하는 어떤 화장실 표지들은, 성상과 그림을 없애고 그 자리에 글자를 가져다 놓았던 우상 파괴주의 (Ikonoklasmus)의 방법을 따라 화장실 표지에 남아있던 그림을 글자로 대체해 버린, 그림없는 화장실 표지를 만들어내었다.

 

화장실 표지로부터 그림이 지니고 있던 모든 물질적, 감각적 흔적들을 깔끔하게 제거하고는 그를 언어적 기표로 대체시킨 이런 문자 화장실 표지로부터 라깡은 자신의 유명한 명제 기표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기의를 도출해 내었는데[1], 이전의 그림 표지들과는 달리, 여기 화장실 문위에 쓰여진 기표 - Dames / Hommes – 들은 자신의 기의, 성기적 차이를 어떤 식으로도 보여주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화장실의 구분이 다만 두 기표가 가지고 있는 철자적 차이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이 화장실 표지는, 그러나 이 기표가 하나의 언어 체계 예를들어 프랑스어 - 속에서 다른 기표들과 갖는 차이와 연쇄의 관계 속에선, 그리고 그 차이와 연쇄의 언어체계에 익숙해있는 사람에게는 여전히 남자여자라는 의미를 발생시킨다.

 

단어적 의미를 갖는 이 두 기표 대신 그 단어를 이루고 있는 첫번째 철자, H D 로만 이루어져 있는 화장실 표지는, 그렇지 않아도 이미 기표적 차이로 축소되어버린 라깡의 화장실 표지에서 남아있던 최후의 의미 가능성을 제거해버렸다. 그 자체로는 물론, 다른 기표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어떤 의미도 발생시킬 수 없는, 단지 하나의 알파벳 철자로 환원되어 버린 이 화장실 표지는 다만 순수한 차이구분을 지시하는 하나의 기호로, 화장실이 연루되어 있는 성기적 연관들을 말끔하게 보이지 않게 만든다.

 


 

배설의 시급한 육체적 욕구에 쫓겨 화장실을 찾게된,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은, 청교도적 철자의 정신 Geist des Buchstabens 만들어낸 화장실 표지 앞에서 뼈저린 사실을 체험해야 것이다. 그를 압박하는 배설에의 욕구로 인해 생각하는 존재에서 순수한 육체적 욕망의 존재가 되었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의미없는 기표의 연쇄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문명화된 알파벳의 세계 속에선 용변의 자연적 욕구조차도 기표의 질서에 의해  규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1] Jacques Lacan : Das Drängen des Buchstabens in Unbewussten oder die Vernunft seit Freud. Das Werk, S.24.

[1]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성기관의 차이로부터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여러 관점에서 비판될 있다. 여러 요인으로 인해 불분명한 성기관적 특질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에 근거해 어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육체적 성적 비결정자들 대부분은 수술을 통해 분명한 육체적 성기관을 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비육체적인 성적 정체성의 문제를 성전환 수술을 통해 해결하려는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는 여전히 성기관의 육체적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사회,문화적 성적차이의 근거를 이루고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2] Jacques Lacan : Das Drängen des Buchstabens in Unbewussten oder die Vernunft seit Freud. Das Werk, 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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