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림과 시간 2

김남시 2006. 3. 3. 19:56

 

 

그림을 통해 시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들, 곧 서사를 재현하는 이러한 두가지 방식은 그런데, 서양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옛 그림들에서도 서사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두가지 방식을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전체 서사 중 중요한 한 장면만을 뽑아 그려 전체 서사를 대표하고 상기시키는 방법을 우리는 1797년 발행된 필사 채색본 <오륜 행실도>에 실려있는 « 맹희득금 »이란 그림에서 본다. 

 

 

« 맹희득금 »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지닌 서사다. « 촉나라의 맹희는 비록 가난하지만 부모님을 지극으로 모시고 살았다. 그는 과일을 팔아 아버지를 부양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거적을 깔고 상을 지냈다. 그때 맹희가 있던 자리에 쥐가 땅을 파내려 갔는데 그 곳에서 황금 수만냥이 나왔다. « 이 그림은 저 서사 중 맹희가 아직 살아계신 아버지를 모시며 과일을 팔러가는 장면을 그리고 있는데, 이를통해 이 그림은 전체 서사를 상기시키면서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맹희의 지극한 태도와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보다 거의 300여 년 앞서 1431년 세종의 명으로 출판된 <삼강행실도>에서 우리는 서사의 시각적 재현의 또 다른 방식, 곧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난 사건들을 동일한 공간 속에 배치시키는 방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삼강행실도>에 등장하는 황향선침 ‘, « 황향이 베게에 부채질하다 »라는 제목의 그림은 동한시대 황향의 부모에 대한 효도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주인공 황향이 한 그림에 세 번 동시에 등장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서양의 그것과는 다르게 여기선 주인공 옆에 친절하게 그의 이름을 붙여 놓았는데, 그를통해 그림 속에선 여러번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실상 황향이라는 한 인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왜 이렇게 이름을 붙여 놓아야 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저 동일한 공간 -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서로 다른 인물인 걸로 혼동될까봐? 그렇다면 15세기의 한국인들은 20세기 이후나 등장했던 사진적 재현, 한 그림은 그것이 보여진 (화가 혹은 사진사에 의해) 순간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하던 대상과 인물들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근대적 시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한 공간에 서로 다른 시간을 동시에 배치하는 이런 재현 방식이 그들에겐 같은 시기의 유럽인들만큼 익숙한 것이 아니였기 때문일까?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이 그림에서 시간이 어떤 시각적 질서에 따라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위 세 명의 황향 중 누가 시간적으로 먼저이고 누가 나중인지가 어떤 규칙에 따라 재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선 이 그림이 전하고 있는 서사의 구조를 확인해야 한다. « 동한 때의 황향은 이미 나이 9살 때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깨달았다. 무더운 여름날에는 아버님의 침석을 부채질하여 모기를 쫓고 잠자리를 시원하게 하여 편안히 주무실 수 있게 하였으며,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의 베게, 이불, 요를 자기 몸의 체온으로 따뜻하게 하여 아버지가 따뜻한 잠자리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해 드리니 그 이름이 임금의 궁성에 까지 알려졌다이에 의하면 위 그림 가장 아래 쪽엔 9살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시신 앞에 꿇어앉아 예를 표하고 있는 - 다른 기록에 의하면 « 황향은 9살에 어머님을 여위고 아버지만을 모시고 살았다 »고 되어있다. - 황향을, 그 위 중간은 여름에 아버지의 침석에 부채질하는 황향을, 그리고 그 위엔 겨울에 아버지의 잠자리를 따뜻하게 하는 황향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림 속에서 서사의 시간적 순서는 아래에서 부터 위를 향하는 공간적 질서를 통해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공간적 질서가 모든 그림들에 다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유럽 회화들에서도 « 왼쪽에서 오른쪽 », 그리고 « 아래쪽에서 위»로 향하는 시간의 공간적 시각화의 기본 원리는 화가들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되어 사용되었다. 그건 화가가 자신이 재현하는 서사의 어떤 부분을 부각하고 싶은지, 어떤 주제와 내용을 강조하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옛 그림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이를 1617년 광해군의 명에 따라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그림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금이 왜적을 치다 >라는 제목의 이 그림에서도 주인공 최금이 두번 등장하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을 한 공간 속에서 표현하는 서사의 재현방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 양민여자 최금은정유란에 그 지아비를 따라 두 아들을 거느리고 산중으로 왜적을 피하였는데, 왜적이 갑자기 이르러 지아비와 두 아들을 죽이거늘 최금이 돌을 가지고 돌진하여 왜적 하나를 죽이고 살해당했다. (그래서) 임금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는 서사를 이 그림은, 파격적인 공간적 질서를 통해 재현하고 있는데, 그건 저 그림에 등장하는 사건의 시간적 순서가 아래에서 위로가 아니라,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 아래라는 지그 재그식질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통해 산 속에서 마주친 왜구와의 싸움이 갖는 긴장감과 격렬한 운동이 시선의 공간적 이동을 통해 부각되는 효과를 갖는다. 흥미로운건, 최금의 용감한 행실을 치하하기 위해 임금이 내린 정문이 그림의 가장 위쪽 중앙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상 가장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그림의 가장 위쪽에 그리는 전통적 공간 질서를 따르고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이를통해 이 서사 전체를 통해 보여주려는 메시지, , «장한 행동에 대한 보상»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같은 책에 실린 <이보가 손가락을 자르다>라는 제목의 서사에서도 마찬가지다.

 

 

« 이보는 용안현 사람이나 그 아버지 태방이 고치기 힘든 병을 얻어 거의 죽게되니 구완하여 치료해도 효험이 없어 밤낮으로 울고 있는데, 꿈에 어떤 중이 일러 말하되 산 사람의 뼈를 먹으면 나을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보가 즉시 놀라서 깨어 손가락을 베어 약을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즉시 나았다 » 이 그림 속에서 두번 등장하는 이보의 행적은 그림 중앙에서 부터 시작하는데, 그건 이보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안간힘쓰며 괴로와하고 있는 장면이다. 잠깐 조는 사이에 꿈 속에서서 나타난 중 현실이 아닌 꿈 속의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구름을 타고 있는 이 그 다음의 시간적 순서에 해당된다면, 그의 왼쪽 아래서 손가락 피를 짜내고 있는 이보는 시간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해당되는 장면이다. 역시 이 그림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의 병 구완을 위한 이보의 노력   그건 자기 손가락을 베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 이다. 이보의 아버지가 병이 나은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이 그림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가 – <행실도 >에 실린 다른 일화들과 마찬가지로 - 효도의 세속적, 현실적 « 효과 »가 아니라 지극한 효도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미 한국 그림의 역사 속에서 엄연히 존재했었던, 그림에 시간을 담아내려는 시도들은 유감스럽게도 한국 미술사에서 예술적 재현의 새로운 방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는 어쩌면 외재적인 근대화의 논리와 더불어 수입된 편협하고 나이브한 리얼리즘에의 강박이 저 옛 그림들에 표현되어 있던 풍부한 시각적 재현의 시도들을, 다른 모든 전통적 가치들과 더불어, 원시적이고 비 과학적인 것으로 싸잡아 폐기함으로써 생겨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를통해 우린, 이후 유럽 미술의 역사 속에선 다채로운 시각적 재현의 방식들로 발전되어 온 시간의 시각화의 단초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시시각각 운동하는 시간적 변화들을 한 평면에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시간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려던 시도들이 이후 유럽 미술사에서 어떤 모습으로 이어졌는가를 우리는 20세기 이후의 현대 미술에서 발견한다.

 

 

1912년 마르셀 뒤샹이 발표한 그림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No.2>는 화가가 바라본 순간 저 계단에 존재하고 있던 서로 다른 여러 피규어들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은 서로 다른 시간에 걸쳐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동일한 한 명의 벌거벗은 사람을 그림의 동일한 공간 속에 동시에 배치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시간과 운동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이 그림이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서로 다른 시간에 존재했던 동일인물의 다른 모습들을 좀 더 집약적인 공간에 집중시켜 놓았다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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