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벤야민, 하이데거, 카프카

김남시 2004. 5. 25. 04:49

benjami

 

 

벤야민, 하이데거, 카프카.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유명한 이 세 명의 독일인들이 한 때 동일한 시간, 동일한 공간 속에서 살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신비로운 감정을 느끼게한다. 마치 플라톤과 비트겐스타인이 우연히 동네 비디오 방에서 만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면 갖게 될 그런 감정이다. 그런데, 알고보면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그들의 저작만으로도 충분히 우릴 주눅들게 하는 저 세 명의 철학자와 문학자들은 같은 시대를 공유했던 동시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이 세 명의 삶의 괘적은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에서처럼 이곳 저곳에서 서로 엇갈리며 교차하고 있었다.

1892년 베를린에서 태어나 1940년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발터 벤야민과 1889년 태어나 1976년 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한 마틴 하이데거 사이에는 삼년의 나이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12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벤야민은 그 해 여름학기 철학과에서 개설된 리케르트 Rickert 교수의 „인식론과 형이상학 입문“ 강의를 수강한다. 벤야민 보다 조금 먼저 같은 대학 철학과에서 공부하던 마틴 하이데거 역시 같은 학기 리케르트 교수의 이 강좌를 수강하였다. 말하자면 발터 벤야민과 마틴 하이데거는 1912년 여름학기 같은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들었었다는 말이다. 이제 막 철학공부를 시작한 벤야민과 아직 박사과정 중이던 하이데거가 서로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구나 그 강좌의 수강생은 100명이 넘었다. (Autenthalte und Passagen, Leben und Werk Walter Benjamins, Willem van Reijen und Herman van Doorn, 2001, 25 쪽)

 


hrd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각자의 분야에서 이름을 날리게 될 두 명의 철학자가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한 채 1912년 여름 같은 강의실에 앉아 함께 수업을 들었었다는 사실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어쩌면 하이데거는 그 수업 중 당시 형이상학 이론의 대가였던 리케르트 교수에게 날카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졌을 것이고, 그 질문은 이제 막 철학 공부를 시작했던 그 강의실의 수강생 벤야민의 철학적 사유에 자극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시 이미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청년운동'에 연계되어 있었던 벤야민이 저명한 철학교수에게 대학개혁에 관한 비판적 문제제기를 했을 것이고, 이것이 학구적 철학도 하이데거의 눈에 거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둘은 어쩌면 서로를 알지 못한 채 바로 옆자리에 앉아 눈인사를 나누었을지도 모른다.

 


 

1883년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는 1924년 비인의 요양소에서 사망하기 불과 몇달 전까지, 그러니까 1923년 9월부터 1924년 3월까지 그의 여자 친구인 도k라 디아만트 Dora Diamant 와 함께 베를린에 살았다. 벤야민은 1915년 카프카의 작품을 처음 접했고 이후 그의 작품을 통해 받은 깊은 인상을 1934년 그가 죽은지 10주기를 기해 카프카에 대한 글을 써 남기기도 했다. 프란츠 카프카가 베를린에 살았던 이 기간 동안, 프랑크프르트에서 다시 베를린으로 올라온 발터 벤야민은 1923년 11월부터 1924년 4월 카프리로 여행을 떠날때 까지 계속 베를린에 머무른다. (Autenthalte und Passagen, Leben und Werk Walter Benjamins, Willem van Reijen und Herman van Doorn, 2001, 86/87쪽)

 당시 카프카가 여자 친구와 함께 살던 미쿠엘 가 8번지와 벤야민이 머물렀었던 그의 아버지 집 델브뤽 가 23번지는 걸어서 8분 정도 거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Bucklicht Männlein und Engel der Geschichte : Walter Benjamin. Theoretiker der Moderne, Ausstellung des Werkbund-Archivs im Martin-Gropius-Bau in Berlin, 28.Dezember 1990 bis 28.April 1991, 1990)

어쩌면 그 사이 벤야민은 집에 오가는 도중 폐렴에 걸린 가슴을 움켜잡고 쿨럭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던 한 명의 수척하고 창백한 병자를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카프카는 어느날 산책길에서 삼층짜리 저택으로 들어가던, 말끔한 복장의 한 부르조아 지식인을,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늘 우수에 어려있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쳤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