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발터 벤야민의 연인 Asja Lacis (1)

김남시 2003. 4. 14. 06:13

 

발터 벤야민의 연인 Asja Lacis ( I )

발터 벤야민이라는 이름엔 적지않이 익숙해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라트비아의 수도 Riga 출신의 볼세비키 혁명가 아스야 라키스의 이름은 생소하다. 발터 벤야민의 사상에 일가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 놀랍게도, 이 여인이 얼마나 깊이 발터 벤야민의 삶과 그의 사상, 나아가 그의 죽음에까지 연루되어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벤야민과 아스야 라키스의 만남, 그녀에 대한 벤야민의 열정과 집착, 그리고 그녀가 벤야민에게 미친 영향등을 고려하지 않고 Einbahnstrasse 이후 벤야민의 작업들과 결국 자살로 마감하게 되는 그의 삶의 여정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가 우리에게 낯설어져 버린 것에는 조금은 복잡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역사가 작용하고 있다

Asja Lacis라는 이름이 발터 벤야민과의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등장한 곳은 1925819일 발터 벤야민과 아스야 라키스의 공동집필로 프랑크프르트 신문에 실렸던 <나폴리>라는 제목의 에세이였다. 그 글은 벤야민과 그녀가 함께 했던 나폴리 여행에서의 인상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형태로 벤야민과 그녀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드러난 곳은 1928년 베를린에서 출판된 단행본 <일방통행로 Einbahnstrasse>의 헌사에서 였다. 이 책의 첫 장 그녀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벤야민은 "이 거리의 이름은 아스야 라키스 거리이다. 그녀는 엔지니어로써 내(필자) 속에서 그 길을 이등분 내 버렸다“ Diese Straße heißt ASJA LACIS STRASSE nach der die sie als Ingenieur im Autor durchgebrochen hat 라고 썼다. 저명한 벤야민 연구가 Susan Buck Morss에 의하면 벤야민의 이 책은 프랑크프르트 대학 교수einbahnstrasse 자격 논문으로 제출했었던 <독일 비극의 기원>과는 그 방법론과 문체 면에서도 확연히 대립적일 뿐만 아니라, 이 책을 통해 벤야민 스스로가 '밀교적 교의의 저자에서 기술자로'1 변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Asja Lacis가 그녀의 회고록2에서 밝히고 있으며, 벤야민 역시 자신의 일기장3에서 확인하고 있듯이, 이 책의 많은 에피소드들은 벤야민과 Asja Lacis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체험들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글들 속에선 무엇보다도 그녀를 향한 벤야민의 열정이 담겨져 있다.

"여자 친구를 방문하기 위해 난 Riga에 도착했다. 그녀의 집과 그 도시, 그곳의 말을 난 알지 못했다. 그 누구도 날 기다리고 있지 않았고, 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난 두시간 동안 외롭게 거리를 돌아 다녔다. 그러나 난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모든 집들의 대문에서 섬광이 치솟았고, 모든 골목길들이 불꽃을 튀기고 있었으며, 모든 전차들이 소방수처럼 나에게 엄습해왔다. 그녀는 바로 저 대문을 열고 나올 수도, 저 골목을 돌아 나올수도, 그리고 저 전차에 앉아 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서 난 어떤 일이 있어도 먼저 상대방을 쳐다볼 수 밖에 없는 자가 되어야 했다. 그녀의 시선의 도화선이 나에게 닿았었다면, 난 마치 탄약고처럼 폭발해야 했을 것이다.“4

벤야민이 그녀를 처음 만난건 1924년 여름 이태리 카프리에서였다. 그 해 Asja Lacis는 폐렴에 걸린 그녀의 딸 Daga의 요양을 위해 그녀의 파트너였던 Bernhard Reich와 함께 카프리에 와 있었다. Reich가 잠시 독일에 가 있는 동안 그녀는 딸과 함께 Piazza 시내에 물건을 사러 나갔다가 발터 벤야민을 만나게 된다. 벤야민과의 첫 대면을 그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asja lacis 2

"난 상점에서 Mandel을 사려고 했다. 나는 Mandel을 이태리어로 뭐라 부르는지 몰랐으며 상점주인 역시 내가 그에게 뭘 원하는지 몰랐다. 이때 내 옆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친애하는 부인,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고 난 '네 부탁합니다' 라고 말했다. Mandel을 받아 물건 상자를 들고 Piazza로 향했다. 그 신사가 날 쫓아오더니 물었다. '그 상자를 제가 들어다 드려도 되겠습니까?' 난 그를 쳐다보았고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제 소개를 허락해 주시지요. 저는 Walter Benjamin 박사입니다'. 난 이어서 내 이름을 말해 주었다.“ 5

벤야민은 그녀와 Daga를 집에 데려다 주고는 그녀에게 다음 번에 또 방문해도 되겠느냐고 물었고, 바로 그 다음날 다시 그녀를 방문한다. 그녀의 딸 Daga와 친해진 벤야민이 그녀가 만들어준 스파게티를 함께 먹으며 고백한 바에 의하면, 벤야민은 이미 만델 가게에서 그들이 대면하기 2주 전 부터 그녀를 관찰해 오고 있었다. "당신이 하얀 원피스를 입고 저렇게 긴 다리를 가진 Daga와 함께 Piazza 위를, 걸어다니는게 아니라 훨훨 날아다니는 것을 말입니다.“6

이렇게 시작된 벤야민과 그녀의 만남은 그러나, 누구보다도 벤야민 자신에게 안타깝고 고통스러운 열정의 댓가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건 무엇보다도 부유한 유대인 집안 출신인 벤야민과 라트비아의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의 딸 Asja Lacis의 서로 다른 삶의 기반으로부터 기인하는 바가 컸다. 더구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러시아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분위기에 힘입어 각국에서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운동과 반동적인 파시즘과 나찌즘이 뒤엉켜 대립하던 정치적 격변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사회주의 소비에트에서 연출가이자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볼세비키 혁명가였다.benjamin

독일인 대농장주의 노예였던 할아버지와 하느님과 짜르에 대한 순종만을 미덕으로 알고 살던 어머니, 공장 노동자이자 사회 민주당 당원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녀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완고한 규칙과 관습들로 삶을 얽어맨 부르조아적 소시민성7에 대한 깊은 혐오를 키워가던 공격적 무신론자였다. 힘든 생활환경 속에서도 딸의 교육에 힘썼던 아버지 덕분에 그녀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이후 페테스브르그와 모스크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절감하고 이를 프롤레타리아 연극 운동을 통해 실천에 옮기는 작업을 시작하고 있었다. 유럽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부르조아 소시민 계급의 문화를 "비당파적이고 외적인 예절과 안정의 문화, 감상적이고 위선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 뒤에 사실상 냉정한 에고이즘을 숨기고 있는 문화"8 라며 경멸하고 있던 그녀에게 유복한 부르조아 집안의 아들 '발터 벤야민 박사'와의 관계는 이미 시작부터 많은 갈등과 긴장의 여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첫 만남에서 부터 그녀는 그녀 특유의 계급적 직감을 통해 이미 발터 벤야민의 계급적 기반을 간파하고 있었다. "나의 첫인상 : 작은 스포트라이트 처럼 빛을 발하는 안경알, 두꺼운 검은 머리칼, 좁은 코, 서투른 손 - 그의 손에서 상자가 자꾸 미끄러졌다. - 한마디로 말해, 부유한 집안 출신의 견실한 지식인“.9

그녀와의 만남을 통해 벤야민의 사상엔 맑스주의적, 유물론적 사유의 단초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유대교적 신비주의와 보들레르를 위시한 근대 문학을 향해있던 그의 관심은 서서히 문화와 예술, 철학과 문학의 물질적이고 역사적인 기반에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이를통해 그는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1936)에서 새로운 물질적 기반 (기술)이 예술과 문화의 지각과 수용방식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다가올 혁명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분석하게 된다. 벤야민의 유물론적, 맑스주의적 사유의 단초가 모두 전적으로 Asja Lacis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감정과 느낌들을 숨기지 않고 즉각적으로 표현하는' 성격의 그녀10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벤야민의 계급적 자의식을 날카롭게 공격함으로써 그를 강제했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리고, 이것이 벤야민과 그녀와의 관계에서 벤야민이 언제나 수동적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벤야민의 기반 없음을 비판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벤야민이 공산당에 가입하기를 종용했으며11, 그의 사상이 관념적인 상아탑 미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12고 매섭게 쏘아부쳤다.

scholem "너는 교육 받았고,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전문분야도 있다. 그럼에도 물질적 생존기반이 없다...Riga에서 난 경제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왜인줄 아니? 내가 자본주의 국가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야. 안 그랬으면 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을 꺼야. 그런데 너, 문화의 대가인 너는 도대체 어디에 서 있는거니? 너의 형은 공산당에 가입했는데, 왜 너는 안하는 거야?“13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거지 모스크바를 삶의 중심으로 삼고있던 그녀에게 역사적 유물론과 메시아 주의 사이에서 방황하던 지식인 벤야민은 대지와 유리된 관념을 쫓는 허튼 이상주의자로 느껴졌을 법도 하다.

"어느날 한 번은 벤야민이 히브리어 학습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히브리어를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팔레스티나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친구 숄렘이 그곳에서 안정된 생활 기반을 약속했다고 했다. 나는 놀라 아무말도 할 수 없었고, 우리 사이엔 날카로운 대립이 생겨났다. 정상적으로 사고하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길은 모스크바로 향해있지, 팔레스티나가 아니다.“14

그러나, 벤야민과 그녀 사이에서 늘 이런 식의 정치적 긴장과 대립 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벤야민과 아스야 라키스 사이의 관계를 '언제나 서로 다투기만 하는', '엄청나게 문제가 많은 관계'15라며 못 마땅해 하는 벤야민의 친구 숄렘 조차도 그녀가 벤야민에게 끼친 '강한 지적 영향'16을 부인하지는 못할 정도로 이 둘 사이엔 또한 인간적 애정에 기초한 풍성한 지적 교류도 이루어졌다. 벤야민에게 자신이 참여했었던 모스brecht 크바와 리가에서의 프롤레타리아 아동 연극에 대해, 새로운 사회주의적 도덕에 대해, 소비에트의 예술가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던 그녀는, 한편으로 '베를린의 레스토랑들과 그곳의 전문 요리들을 완전히 꽤고 있으며, 전문가답고 고상하게 메뉴를 조합할 줄 아는'17 벤야민의 고상한 생활패턴에 경탄하기도 하며, 벤야민이 번역하고 설명해 주는 근대 프랑스 문학에 귀를 기울이고 특히 보들레르를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18

나아가 당시 독일의 진보적 문화, 예술가들과 교제를 갖고있던 벤야민과 라키스는 서로의 인적 교류를 공유함으로써 독일과 소비에트에서의 새로운 문화 생산과 교류에 기여하기도 한다. 이미 1922년 부터 그의 연출 어시스턴트이자 연극 배우로써 브레히트와 친분을 갖고 있던 그녀는 kracauer 벤야민과 브레히트를 만나게 해 주었으며, 그녀는 또한 벤야민을 통해 유명한 영화 비평가이자 문화 철학자인 Siegfried Kracauer를 소개받는다. 브레히트와의 만남을 통해 벤야민은 자신의 생산적 작가론('생산자로서의 작가') 과 문학 이론에 새로운 자극을 받으며, 라키스는 크라카우어를 통해 당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던 소비에트의 다큐멘타리 필름이 독일 영화에 소개되도록 한다. 19

진부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아스야 라키스를 만났을 당시 벤야민은 아내 도라 벤야민과의 사이에서 아들 스테판 벤야민을 두고 있던 유부남이었고,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해 혼자서 딸 Daga를 키우고 있던 아스야 라키스 역시 독일 출신의 연극 비평 및 연출가인 Bernhard Reich와 동거 중이었다. 그녀를 만나기 이전 부터 아내와의 관계가 힘들어진 벤야민은 아스야를 만나면서 아내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벤야민과의 만남을 계속하면서도 아스야는 자신의 동거자 라이히와의 관계에 계속 매달리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라이히와의 관계를 죽을때까지 지속시킨다.) 당연하게도 아스야 라키스와 라이히와의 이러한 관계는 그녀를 연모하는 벤야민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더구나 벤야민은 이미 라이히 하고도 지적인 교류를 나누고 있던 관계였다. 이들 세 명의 좌파 지식인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벤야민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긴장감과 심리적 갈등은 이들이 함께 모스크바에 머물러 있었던 시기에 쓰여진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장>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계속...>


1Susan Buck Morss, Dialektik des Sehens, Shurkamp 2000, S.30

2Asja Lacis, Revolutionar im Beruf, Roger & Bernhard, 1976

3Walter Benjamin, Moskauer Tagebuch, Shurkamp 1980

4Walter Benjamin, Einbahnstrasse, Shurkamp 1997, S.54-55

5Asja Lacis, Revolutionar im Beruf, Roger & Bernhard, 1976, S.46

6Asja Lacis, S.46

7Asja Lacis, S.14

8Asja Lacis,S.20

9Asja Lacis,S.46

10Asja Lacis, S.67

11Asja Lacis, S.54

12Asja Lacis, S.65

13Asja Lacis, Revolutionar im Beruf, Roger & Bernhard, 1976, S.54

14Asja Lacis, S.49

15Gershom Scholem, Vorwort zum Moskauer Tagebuch, Shurkamp 1980, S.13

16Gershom Scholem, Vorwort zum Moskauer Tagebuch, Shurkamp 1980, S.15

17Asja Lacis, S.53

18Asja Lacis, S.47

19Asja Lacis, S.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