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독일적군파 RAF에 대한 레포타쥬

김남시 2001. 4. 4. 18:13

RAF (Rote Armee Fraktion)


  • Baader-Meinhof 그룹

   1968년 4월 독일 프랑크프르트,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도중 Andreas Baader와 여학생 Gurdun Ensslin가 "자본주의와 미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백화점 건물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람들은 이를 젊은이들의 과격 시위 도중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한 사건 정도로 여겼다.

 

재판중인 Baader와 Ensslin (우측 2명) 1970년 5월 한 명의 여류 저널리스트가 체포되어 3년형을 언도받고 구금되어 있던 Baader를 취재하겠다고 요청, 베를린 사회문제 연구소에서 인터뷰 허가를 받는다. 인터뷰 당일, 그러나,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사법 재판관 1명을 사살하고 나머지 법정 관리인들을 위협하며,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검은색 BMW 승용차로 Baader를 탈옥시킨다. 그녀의 이름은 Ulrike Meinhof, 좌파 잡지 "Konkret"의 기고가이자 이미 쌍둥이 자매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이 둘의 이름을 딴 Baader-Meinhof 그룹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이 사건은 이후 서독 사회운동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좌파 테러조직 Rote Armee Fraktion (RAF)의 출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탈주에 성공한 이들은 곧 동독 국가 안전부(슈타지)의 비호를 받으며 동베를린을 거쳐 요르단에 잠입, 팔레스타인 해방군으로부터 본격적인 무장 투쟁 훈련을 받는다. 이들 창립 멤버에는 두뇌 역할을 하던 변호사 Horst Mahler도 속해 있었다. 그는 동독에서 건너온 사회주의자로 이미 운동권 출신 수감자들의 전문 변호인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독일 네오 나찌주의 정당인 NPD를 창당한 인물이기도 하다.) 동독으로 돌아와 무기까지 제공받은 이들은 서독으로 비밀리에 귀환, 72년부터 본격적으로 "폭력적 혁명 투쟁"에 나선다.

  • 전후 독일의 상황

    이들이 무장 투쟁을 선택하게 된 배경에는 파시즘을 겪은 후의 독일사회와 미국의 베트남 참전, 68년 학생혁명의 좌절의 경험이 있다. 민족사회주의(나찌)가 패전한 이후에도 독일에서는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은 전후의 독일에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재 구축하고 서방 사회의 군사적 경제적 블록에 독일을 편입시키는 것을 1차적 과제로 삼았다. 그들에게 전후의 서독은 "공산주의 블록과 볼세비즘에 대한 방어벽"이었던 것이다. 힘을 키워가던 사회주의 세력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해, 전후 몇 년 사이에 이전의 나찌주의자들이 다시 관직과 명예를 회복하였다. 두 차례의 전범 재판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전후 젊은 세대들의 눈에 독일의 과거와 나찌 시대의 범죄와의 사회적 대결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과거에 대해 어떤 질문도 던져지지 않은 채 독일은 급속하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사회가 되어야만 했다.

 

   전후 독일 세대들은 곧 독일 관료들의 정신상태, 나찌 공범자와 위선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부모세대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 왜 그들은 유대인에 대한 질문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가? 어떻게 파시즘이 나타날 수 있었는가? 누가 이 살인 기계의 일부였는가? 어째서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는가? 나찌의 범죄와 유대인 수용소에 대해 당신들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 왜 당신들은 그에 반대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위 세대는 어떠한 만족할 만한 대답도 주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나찌 시대에 사형판결을 내렸던 바로 그 판-검사들이 법정에, 나찌 시절의 사장들이 기업에, 바로 그 관료들이 관청에, 그 선생들이 학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로써 젊은 세대들에겐 파시즘에 물들었던 사회가 거의 아무런 과거와의 단절없이 그대로 민주주의사회로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들은 대안을 찾아 나섰고, 부모 세대와는 다르게 살려했으며 그를 통해 사회와의 대결을 받아들였다. 많은 젊은이들은 60년대에 이 곰팡내 나는 부르조아 사회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그를 비판하였다. 새로운 주거 공동체(Wohngemeinschaft)와 학생 조직이 생겨나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삶의 감정이 느껴질 수 있었다. 투쟁의 동력은 대학들에서 출발한 반 권위주의 운동으로부터 생겨났으며, 그것은 베트남 전쟁과의 대결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poster

  당시 미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이름을 걸고 베트남 민중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고 있었다.  네이팜탄으로 무장한 미군의 무자비한 융단 폭격은 독일 전역의 좌파들 내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저항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학생운동 내부에선 의식적인 반제국주의 운동과 제3세계 해방운동에 대한 연대의 움직임이 자라나왔다. 1968년 2월 "사회주의 독일 학생연맹(Sozialistischer Deutscher Studentenbund)"(포스터)는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국제 회의를 개최하였고 여기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제3세계 해방 투쟁에 대한 지지와 전세계적인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의 혁신을 위해 유럽 각도시 들에서 제국주의와 투쟁하는 제2의 전선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서유럽은 제국주의의 조용한 배후 국가로 남아있어선 안된다. 이 투쟁의 수단과 형태들은 각 나라들 대중의 조건과 의식에 따라 전개되어야 한다. 여기엔, 이미 라틴 아메리카의 도시 게릴라 경험을 통해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던, 혁명적 폭력의 사용이 포함되는 것이었다. streik

   60년대 후반에 발생했던 두 사건은 이러한 분위기를 본격적인 저항으로 발전시키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1967년 6월 2일 폭력적인 독재정권으로, 당시 독일과의 중요한 무역 파트너였던 페르시아의 국가원수가 베를린을 방문하던 날, 이에 대한 반대시위 도중 학생  Benno Ohneorg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채 1년도 안지나, 1968년 4월 10일 언론 재벌 Axel Springer사의 선동을 통해 자극받은 한 우익 화가가 독일 학생연맹 의장인  Rudi Dutschke를 저격하여 중태에 빠뜨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일어난 광범위한 장외 가두 투쟁 (APO)이 1968년 말을 기해 그 한계에 직면하게 되면서, 독일의 저항세력들은 다양한 조직들로 분열되어 나갔다. KBW 같은 공산주의 그룹, 현실 사회주의 국가 지향적인 DKP 같은 조직이 생겨났고, 또 어떤 이들은 제도권에로의 진출을 시도하거나 반 교조적인 환경 운동에로 나아가기도 하였다. 무기를 들고 불법적으로 투쟁하려는 그룹들이  독일의 적군파, 즉 RAF 를 조직하였고, 이에는 다수 도시 게릴라 그룹의 연합체인 "7월 2일 운동", 그 이후에 생겨난 "혁명 세포"(RZ)와 "붉은 분노(ROTE ZORA)" 그룹 등이 해당된다.

  • 도시 게릴라의 개념raf

  Meinhof가 Baader를 탈주 시킨지 1년 후인 1971년 4월, RAF 기관지 "도시게릴라의 개념"(사진)이 등장한다. Meinhof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그 팜플렛에서 RAF는 무장 투쟁의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현시점 독일과 서독에서 무장한 저항그룹들을 조직하는 것이 올바르며, 가능하고 또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린 또한 맑스-레닌주의의 최고 형태로서 무장 투쟁이 지금 시작될 수 있으며 또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없이는 대도시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은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 우리는 불법적인 무장 저항조직들의 합법적인 프롤레타리아 조직을 대체할 수 있으며 이것이 유일한 계급 투쟁의 방법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또한 무장투쟁이 기업과 국가에서의 정치적 투쟁들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이것이 다른 투쟁들의 성과와 진보를 위해 필요한 하나의 전제라고 주장할 뿐이다."

  RAF는 그들의 선사를 학생운동의 역사에서 찾는다. "자유,평등,박애도, 인권도, UNO-헌장도 우리 민주주의의 내용을 이루지 않는다. 여기서는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의 식민주의 제국주의적 착취가 문제이다. 억압받는 자들에 대한 규율과 지배, 그 무자비함이 그들로 하여금 항의하고 저항하며, 반 제국주의투쟁을 이끌도록 한 것이다. 학생운동에게 자의식을 주었던 것은 이곳에서 전개되는 계급투쟁이 아니라, 우리가 베트공과 같은 계급의 적을 상대한다는, 우리의 운동이 곧 국제적인 반제국주의 운동의 부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학생 운동은 그 조직형태가 그 목적에 적합한 실천을 발전시키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 와해되었다. 학생운동은 자신의 목표와 내용을 반제국주의 투쟁이라 부를 수는 있었지만, 그들 자신은 혁명적 주체가 아니였으며, 때문에 그들은 운동의 조직적 중개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험으로부터 도시 게릴라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도시 게릴라는 전체적으로 보아선 힘이 약한 혁명 세력들에 의해 혁명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체제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탈 도덕화한다. 도시 게릴라는 국가의 지배 도구들을 개별적 지점에서 파괴하고, 곳곳에서 교란시키며, 체제의 편재와 체재의 불가침성이라고 하는 신화를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 1세대 RAF의 활동

   당시 독일 정부는 경찰 및 법조인, 공무원등 국가 조직을 총 동원하여 이들 RAF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업에 돌입한다. 또한 언론과 방송, 티브이 등의 매체를 총 동원하여 국민들 사이에서 당시의 사회 혁명적 운동들에 대해 광범위한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켜 이들을 대중으로부터 이반시키려 했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들에 대한 정보차단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2년, 5명 중 1명의 독일 시민들은 RAF가 수색되고 체포되지 않게 하는 것에 대해 묵인하겠다고, 7명중 1명은 RAF 구성원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겠다고 대답했으며, 6%는 스스로를 RAF의 잠재적 동조자라고까지 말했다. terror

  1972년 미국은 "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 민간시설에 대해서까지 전격적으로 폭격하고 나아가 북 베트남 항구를 지뢰밭으로 만들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이 공격은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유럽 미군-사령부에 설치된 대형 컴퓨터를 통해 지원되는 것이었다. 1년 내내 이에 대한 많은 항의시위들이 있었지만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공격을 막기엔 역 부족이었다. 이에 RAF는 1972년 3월 11일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제5미군 사령부를 폭탄을 장착한 차량으로 공격하였다. 이를 통해 5명의 미군이 사망하였다. RAF는 이 공격을, '우리 자신과 미국의 전쟁 책동에 대해 항의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저 바라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단을 통해 효과적으로 행위할 수 있게 한 해방적 결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베트남을 절멸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을 위해 서독과 서 베를린은 결코 더 이상 안전한 배후국가가 될 수 없다. 미국은 베트남 민중들에 대한 그들의 범죄행위가 그들에게 분노하고 있는 새로운 적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과 이제 세계 어디에도 그들이 혁명적 게릴라 부대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고 말했다.

 5월 12일에는 아우구스부르그와 뮌헨의 경찰서에 RAF의 폭탄공격이 있었으나 부상자는 없었다. 5월 16일 독일 연방범원 판사 Buddenberg에 대한 폭약공격으로 그의 부인이 다치는 사건이 이어졌다. 5월 19일 마침내 함부르크에 있는 언론재벌 스프링어 빌딩에 두 개의 폭탄이 폭발하였다. 사전에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프링어는 직원들을 대피시키지 않아 17명의 직원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1972년 6월과 7월에 거쳐 드디어 수배 중이던 RAF 핵심인물들, Baader, Holger Meins, Jan-Carl Raspe, Gudrun Ensslin, Brigitte Mohnhaupt, Ulrike Meinhof가 체포되게 된다. 

  • 형무소 내에서의 투쟁

  체포된 RAF 구성원들은 형무소에서 완전히 사회로부터 고립당한다. Ulrike Meinhof(사진)는 "죽음의 지대"라 불리는 쾰른의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녀의 감방은 모든 외부 세계로부터 청각적, 시각적으로 차단되었으며 사방의 벽과 시설들, 감방의 문까지도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그림이나 달력 등도 벽에 걸지 못하게 했으며, 창문은 처음에 완전히 막혀있었고 후에 약간 열리긴 했으나 그 틈으로는 아무 것도 내다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네온으로 된 조명은 밤에도 켜져 있었고, 겨울에도 난방이 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고안된 이러한 "백색고문"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그녀는 한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머리가 폭파될 것 같은 느낌, 척수가 뇌 속으로 쥐어짜 들어오는 듯한 느낌, 뇌가 마치 마른 과일처럼 점점 찌그러드는 느낌. 몇 시간 동안이나 알아차리지 못하나 끊없이 원격 조정당하고 있는 느낌. 내 몸통으로부터 영혼이 오줌을 통해 빠져나가 버리는 느낌,일어나서 눈을 떠보면  감방이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 오후에 햇빛이 비치면 갑자기 멈추어 서는 듯한 그런 느낌...벙어리가 되어 버려, 단어들의 뜻을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항상 아픈 머리가 문장과 문법과 구조를 더 이상 콘트롤하지 못하게 되는 상태. 글을 쓸 때 두 번째 줄 말미에서 더 이상 첫 번째 줄 시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내부에서 무언가 불타 버리는 듯한 느낌.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더 이상 어떤 생존의 기회도 갖지 못하리라는 분명한 의식. 완전히 끝장나 버렸다는 느낌. 면회 역시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1시간 후엔 그 면회가 오늘이었는지 지난 주였는지를 겨우 기계적으로 구성해낼 수 있을 뿐...살갗을 벗겨내 버린 듯한 느낌..."

   1973년 1월 17일부터 40여명의 정치범들은 처음으로 공동 단식투쟁을 벌이며 RAF 수감자들에 대한 고립, 특히 Ulrike Meinhof를 "죽음의 감방"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의 단식투쟁 결과, 그녀는 2월 9일 남자 감방의 독방으로 옮겨온다. 그러나, 그 외의 수감 조건들은 하나도 변화하지 않았다. 1974년 9월 19일 수감자들은 이번엔 5개월동안이나 지속되는 단식 투쟁을 벌여 RAF 수감자들에 대한 특별대우와 비인간적 대우에 항의한다. 형무소측은 이들의 단식투쟁에 대해 고통스럽고도 생명에 위협적이기까지 한 강제 급식으로 대응하였다. 12밀리미터 두께의 고무 튜브를 강제로 입에 집어넣고 음식물을 쏟아붓는 것이다. 8주 후인 1974년 11월 9일 RAF 수감자인 Holger Meins가 강제 급식 도중 사망한다. Holger Meins의 죽음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게 국가의 RAF와의 전쟁이 형무소 내에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이를 통해 폭력적 국가 권력에 대한 대중적 투쟁은 더욱 거세어진다. 그의 무덤 앞에서 당시 서독 학생운동 조직 SDS(사회주의 독일 학생연명) 대변인 Rudi Dutschke는 "Holger!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이러한 반 국가 투쟁에 불을 붙인다.

  • 석방을 위한 투쟁

   Holger Meins가 죽은 다음날 베를린의 고등법원장 Drenckmann이 "6. 2 운동" 그룹에 의해 사살당한다. 이에 국가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경찰과 비밀 경찰들을 동원해 전국에 있는 변호사무실, 좌파 서점, 인쇄소와 주거 공동체들을 수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집들이 부서지고 많은 사람들이 임시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수배 중이던 23명 중 아무도 체포할 수 없었다. 1975년 2월 6.2 운동 소속의 테러리스트 3명이 베를린 CDU의 부의장이었던 Peter Lorenz를 납치하였다. 다음날 이들은 수감 중이던 6명의 RAF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로렌즈 석방조건으로 제시하고, 요구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로렌즈를 살해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서독 정부는 이들의 요구조건을 수용하고 석방을 거부한 홀스 말러를 제외한 5명의 테러리스트들을 석방하였다. 납치범들은 자진해서 인질이 된 전 베를린 시장이였던 알버트 그리고 석방된 테러리스트들과 함께 서독이 제공한 루프트한자 항공기 편으로 남 예멘에 도착,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였고, 알버트는 그 다음날 귀국하였다. 로렌즈는 알버트 도착 6시간 후에 무사히 석방되었다. 1975년 4월 24일 RAF "Holger Meins" 분견대가 스톡홀롬에 있는 독일대사관을 점거하고 12명의 대사관직원을 인질로 잡고는 26명의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였다. 경찰이 대사관 건물에 진입, 4명을 사로잡고 1명을 사살, 1명은 도주하였다.

 1975년 5월 수감된 RAF 멤버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변호를 방해하고 배제하려는 조직적 시도들이 이루어졌다. 변호인들은 수감자들과 직업적으로 접촉했다는 이유로 범죄인 취급을 받았고, 사무실을 수색당하고, 재판서류를 압류당했다. 이 재판을 위해 법률들이 개정되어 심지어 Andreas Baader는 재판이 시작하기까지도 변호인을 갖지 못했다. 1976년의 "반-테러법률"에 의해 변호인단과 정치 수감자들 사이의 편지나 정보교환에 대해 검열이 행해졌다.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유엔의 인권위원회와 다른 공식적 위원회에 의해 비판되기도 했다.

  1975년 12월 21일 비인에서 열리고 있던 오펙 회의가 6명의 RAF 조직원들에 의해 습격 당한다. 이들은 회의에서 반-이스라엘 선언이 채택될 것을 요구하였고 11명의 장관들을 알제리로 납치해 간다. 그 와중 1명의 오스트리아 경찰과 2명의 아랍인이 사망한다.

  • Ulrike Meinhof의 죽음

   1976년 5월 8일 Ulrike Meinhof가 그녀의 감방에서 목매달아 죽은 채 발견된다. 이에 대해 국제 조사위원회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 "Ulrike Meinhof가 목매달아 죽었다는 독일 당국의 주장은 증명되지 않았으며 우리 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 목매달 수 없었다는 데에 도달하였다. 본 조사 결과, 목매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죽어있었으며, 이 죽음에는 제3자가 관여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상황증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형무소 직원들 외에 비밀요원들이 분리되어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7층 감방에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독일 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자살이라고 발표되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타살 의혹과 그 죽음이 불러일으켜진 동요에 의해 프랑크프르트를 비롯한 독일 여러 도시에서 화염병을 동반한 과격 시위가 일어났다. 현 독일 외무부장관 요스카 피셔가 '전투요원'으로 참가했었던 프랑크프르트에서의 시위 도중 누군가가 던진 화염병에 의해 경찰관 1명이 심한 화상을 입었던 것도 이때였다. 같은 해 6월 27일 텔 아비브에서 파리를 비행하는 에어 프랑스 소속 항공기가 조지 하바시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조직 PFLP와 독일의 RAF 소속 8명의 테러리스트에 의해 아테네 이륙 직후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이 항공기와 함께 납치된다. 납치범들은 리비아의 벤가지를 거쳐 6월 28일 아침 우간다의 엔테베에 항공기를 강제 착륙시키고, 유럽 각국에 투옥되어 있는 아랍과 RAF 테러리스트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승객을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분류하여 협상과정에서 146명의 인질을 석방하고 유대인 106명은 계속 인질로 잡았다.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스라엘 정부는 특공대 대장인 조나단 네타나후 중령의 이름을 따 "조나단(Jonathan) 작전"으로 명명된 구출작전을 단행했다. 7월 3일 이스라엘을 이륙한 특공대는 3대의 헤큘러스 수송기를 이용해 3,000마일 떨어진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어둠을 이용해 잠입, 7명의 테러리스트와 20명의 우간다 군인을 사살하고 구출작전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였다. 30분간의 구출작전 과정에서 그러나, 특공대장 조나단과 3명의 인질이 사망하였다.

  • 독일의 가을

   1977년은 2세대 RAF 테러리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독일의 법조계, 경제계, 정치계의 주요인물들에 대한 테러를 벌였던 '독일의 가을' 해였다. 그 첫번째 희생자는 당시 독일 연방검사였던 Siegfried Buback였다. 1977년 4월 7일 Karlsruhe 시내에서 그와 그의 운전사, 그리고 그를 호위하던 한 명의 경찰관이 오토바이를 타고 습격해온 "Ulrike Meinhof 분견대"에 의해 사살 당한다. 그들은 성명서에서 "Buback은 직접적으로 Holger Meins, Siegfried Hausner, 그리고 Ulrike Meinhof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그는 연방 검사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통해 그들의 살해를 야기시키고 이끌었던 것이다. 게릴라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적 독일의 반전쟁 속에서 사법부는 그 전쟁을 이끄는 도구에 다름 아니다. Buback은 우리와의 대결을 전쟁으로 규정하고 이를 이끌어왔다. 우리는 우리의 전사들이 서독의 형무소에서 살해되도록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연방검사는 수감자들이 투쟁을 멈추지 않는 문제를 조정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우리는 연방검사가 수감자들의 4번째 단식 투쟁을 인권을 유린하는데 이용하고 Andreas, Gurdin. Jan을 살해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석 달 후 7월 30일, 드레스덴 은행의 대표이사였던 J rgen Ponto가 직원을 사칭하고 집에 들어온 RAF 요원에 의해 피살된다. RAF는 애초에 그를 납치, 수감자들의 석방을 놓고 협상할 계획이었다. meyer

같은 해 9월 5일 쾰른, 5명의 RAF 테러리스트들이 서독 실업계의 거물로 서독 경영자협회 회장과 서독 산업 연맹 회장을 겸하고 있는 Hanns Martin Schleyer(사진)를 납치하였다. 납치 과정에서 그의 경호원 3명과 운전사가 사살당했다. 이들은 감금당해 있는 Shleyer의 사진을 언론에 보내며 연루 중이던 Baader를 비롯한 11명의 RAF 구성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수감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나라로 석방된다면 Schleyer를 석방하겠다고 말했다. 슐라이어는 당시 독일 사회에서 가장 힘있는 인물 중의 하나로, 언론들이 침묵하거나 면죄시켜 준 나찌 경력자이기도 했다. 그는 이미 16살 때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었으며, 나찌 학생회의 리더로써 대학 평준화와 유대인 및 반 파시즘 학생들의 제거에도 참여했었다. RAF의 납치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형무소에선 수감자들에 대한 접촉이 강하게 통제되었고, 형무소 외부에선 동시에 전격적 수색이 이루어졌다. 중요한 교차로에선 20살에서 35살 사이의 운전수가 운전하는 모든 통행 차량들에 대한 검문이 이루어졌으며, 쾰른에선 모든 전기 계량기들이 점검되었다. 슐라이어의 가족과 동료들은 협상을 원했으나 독일 정부는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할 수 없다는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flug

  이에 가세해 그해 10월 13일 4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부대가 82명의 승객과 5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Mallorca에서 프랑크프르트로 향하던 루프트 한자 항공기(사진)를 납치, RAF 연루자와 터키에 수감되어 있던 "팔레스타인 해방전선" 소속의 두 명의 석방과 1500만 달러의 석방금을 요구하기에 나선다. 그들은 이 요구가 10월 16일 8시까지 이행되지 않을 경우 승객과 승무원을 모두 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납치된 비행기는 마요르카에서 로마, 사이프러스, 바레인, 두바이, 아덴을 거쳐 납치 발생 5일만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공항에 최종적으로 착륙하였다. 독일 정부당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소말리아 정부의 허락을 받은 후 영국제 특수장비와 SAS 대원의 도움을 받아 대 테러리즘 특공대 GSG-9를 투입하여 10월 18일 밤 테러리스트들을 사살하고 인질들을 구출한다.

  • 1세대 RAF의 죽음

  10월 tot18일 아침 Andreas Baader(사진)와 Gurdrun Ensslin 이 죽은 채로, Jan-Carl Raspe 와 Irmgard Moller는 심하게 부상한 상태로 감방에서 발견된다. Raspe는 몇 시간 후 사망하였다. 이후 이루어진 조사에서 석연찮은 점들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자살이라고 하는 공식발표가 이루어졌다. Andreas Baader가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하지만, 전문가 판정에 의하면 권총은 머리에서 30-40Cm 떨어진 곳에서 발사되었으며 권총 길이 자체가 이미 17Cm였다. Gurdrun Ensslin의 시체에는 상처와 피 멍들이 발견되었다. 독일 당국은 이것이 스스로 목을 맸을 때 오는 발작 과정에서 단단한 대상에 몸을 부딪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Meinhof의 경우에서처럼 스스로 목을 맸는지, 아니면 이미 죽어있는 상태로 목 매달아졌는지를 판정할 수 있는 히스타민 테스트는 거부되었다. 관계자들이 시체를 곧바로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Irmgard Moller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살이란 우리들에게 명백히 말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투쟁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다. 내 상처도(심장 바로 옆의 자상) 내 스스로 낸 것이 아니다." 당시 Irmgard Moller는 의식 불명상태에서 병원으로 후송 도중 깨어났다. 당시 수감자들은 거의 6주 이상 고립상태(접촉차단)에 처해있었다. 그들은 라디오를 지닐 수 없었으며, 따라서 모가디슈에서 그들 스스로가 경험할 수 있었을 사건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다.

  1977년 10월 19일 한 프랑스 신문 편집부에 Hanns-Martin Schleyer의 시체가 어디있는지 알려주는 편지 1통이 배달된다. 거기엔 "모가디슈와 스탐머(형무소)에서의 학살에 대한 우리의 고통과 분노에 비하면 그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문장이 쓰여져 있었다. Shleyer의 시체는 납치된지 43일 만에 차량 트렁크에 실린 채 발견된다.

  •  RAF의 해체

  이들 1세대 RAF 멤버들이 죽고, 독일의 정치가 안정 기미를 보이자 한동안 독일 내에선 좌파 테러가 잠잠해지는 듯 했다. 그러나, RAF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된 것이 아니었다. 80년대 들어 RAF가 벌인 테러들은 다음과 같다. 1981년 헤센 주 경제 장관 Heinz-Herbert Karry 피살, 85년 8월 20세의 미군 파이멘탈 살해, 적군파는 그의 신분증을 가지고 라인-마인 공항에 폭탄을 장치하여 2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86년 7월 지멘스사 경영자 백쿠르츠 살해. 86년 10월 외무부 브라운틸 국장 살해. 89년 도이체 방크 은행장 Alfred Herrhausen 피살, 1991년 신탁청 총채 Detlev Karsten 피살. 93년에 RAF는 헤센 지역에 증축 중이던 형무소 건물을 폭파하였다. 같은 해 Wolfgang Grams와 Birgit Hogefeld가 체포되는 과정에서 Grams는 국경 수비대원 1명을 살해하고 자살한다.

  1996년 말 프랑크프르트의 법정에 선 Hogefeld는 RAF의 와해를 선언한다. "투쟁은 좌초되었다." 그러나, RAF의 공식적 해체는 1998년 4월 20일 RAF가 로이터 통신에 발송한 "해체 선언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통독 이후 동독에 은신해 있던 조직원들의 신원이 드러나고, 그들의 투쟁 방식에 대한 좌파 내부에서조차 비판적 시각이 증폭되어가면서 이루어진 자기 해체였다. 그들의 해체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RAF는 해방투쟁 속에서 1970514일 탄생하였다. 오늘 우리는 이 계획을 종결한다. 이제 RAF의 조직으로 진행되었던 도시 게릴라는 역사 속의 한 장이 되었다. RAF는 나치로부터 해방되고도 나치의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는 국가에 대항해 투쟁을 시작하였다. 무장투쟁은 권위적 사회형태와 (자본주의적) 소외와 경쟁에 대한 반항이었고 다른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세계적으로 불기 시작한 해방의 바람 속에서 사이비 합법 체제를 거부하고 극복하기 위한 단호한 투쟁의 시간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좌파가 그 한계에 도달하고 붕괴하기 시작되었을 때 RAF를 새로운 기획에 연관시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비현실적이었다. RAF의 오류는 불법적 무장투쟁 외에 어떠한 정치 사회적 조직도 구축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런 기획의 부족은 RAF가 미래의 해방과정에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현재의 세계는 우리가 혁명을 시작했을 때 보다 더 악화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가 적절한 대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보다 더 심각한 일이다. RAF는 해방의 해답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이었다. 그럼에도 해방된 인간의 세계에 대한 무수한 질문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미래의 해방계획은 여러 주체와 관점과 내용의 다양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상이한 개인이나 사회 그룹들이 주체가 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68년이래 독일 좌익의 구상은 새로운 해방의 기획이 될 수 없다.

 

  


  • 참고자료

        DER SPIEGEL, Nr.5/29, 2001년 1월

               Spiegel Archiv :  http://www.spiegel.de/archiv/1,1619,,00.html

       독일 역사 사이트 : http://www.hdg.de/lemo/home.html

               RAF 관련자료 사이트 : http://rafinfo.virtualave.net/link.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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