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마녀사냥과 기독교

김남시 1999. 9. 12. 00:37


그리스도교가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선 당시의 삶과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이교도, 즉 동양의 지혜를 몰아내기 위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르네상스 이전 중세를 휩쓸고 있었던 이교도적 경향들의 원천은 이후 르네상스에 와선 학문과 삶의 전범으로 추앙되기에 이르는 그리이스, 로마의 문화였으며, 이러한 그리이스 로마의 지식과 사유방식에 영향을 건네준 것은 가르티아의 지혜, 곧 바빌로니아의 점성술과 유물론적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마녀사냥, 점성술사나 연금술사에 대한 박해, 아라비아 학문에 대한 신비주의적 경계등은 모두 그리스토교가 당시를 지배하고있었던 동양적 이교도에 대해 벌인 싸움의 결과들이었다.

고대 희랍적 전승은 일신론적인 신앙 체계를 구축하려는 카톨릭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하고도 거북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점성술이 전제하고 있는 다신론적 전제와 세계의 모든 만물은 그 '다양성'의 견지에서 그대로 이해 하고자 한 욕구의 표현인 '그리이스적 신화'등은 그래서, 카톨릭의 지배를 위해 척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점성술사의 계략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고 있으며, 단테는 {신곡}에서 아라비아의 과학과 아라비아인들을 그리스도교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그러한 이교도들은 지옥에서 **의 형벌을 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 등 중세 르네상스를 개시했던 인문학적 사상가들이 1453년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으로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이탈리아로 망명해왔던 학자들의 反아랍적 분위기를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은 '고대의 부흥'으로 일컫어지는 르네상스가 지닌 내적 한계를 말해주고 있다.

로마시대에 정부가 점성술을 박해했던 것은 그것이 황제의 죽음의 예언을 통해 사회불안을 일으킨다고 하는 사회, 정치적 이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에는 그리스도교의 체제가 그것의 사상적 이유에서 점성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회 신부들은 그리스도나 모세의 생애가 별에 의해 지배 받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점성술은 천체가 보여주는 다양한 속성 - 빛깔, 모습, 등장하는 위치와 시기 등- 에 서로 다른 신적 특성을 부여하고 그러한 천체들과 지상의 사물들을 서로 관계지움으로써 지상의 모든 사물들의 성격이나 변화, 소멸 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천체 광물학, 천체 화학, 천체 식물학 등'은 지상의 광물, 화학물, 식물들을 그에 상응하는 천체의 속성과 운동을 통해 설명하려고 하였으며(이 점에서 점성술과 연금술은 깊은 관계를 갖는다.), '점성 의학'은 인체의 각 장기 기관을 각각의 천체에 상응시킴으로써 신체의 질병과 변화 등을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점성학파들은 1345년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의 원인은 그해 3월24일 물병자리에 토성, 수성, 목성이 모였기 때문이며, 15세기 말 이래 맹위를 떨쳤던 전염병인 '매독'은 1484년 4개의 혹성이 전갈좌에 모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면 그로부터 100년이 지나 같은 혹성의 회합이 1548년 다른 별자리에서 일어날 때 이 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매독의 해독제로 사용된 염화 수은은 수성을 이용하여 나쁜 별의 악영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수성은 수은에 대응하기 때문에 수은 연고를 바르면 된다는 근거에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유일한 신의 의지나 결단에 의해 만물의 질서와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던 기독교와는 융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닌 점성술적 사고가 금방 유일신적 사고방식으로 변화될 리는 만무하였다. 더구나, 지상의 모든 사물들이 지상의 것 보다는 천상의 원리에 의해 영향받고 있다고 보는 점에서 기독교와 점성술적 사고 방식은 서로 공통적 지반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신약 성서}에는 그리스도 탄생의 시기 동방에서 점성술학자가 와서 동방에서 본 별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태어난 그리스도의 별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한동안 점성술적 사고와 기독교적 사고가 공존, 혹은 융합되는 시기가 존재하였다.

 

13세기 로저 베이컨은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보다 월등하다는 점을 점성술을 통해 증명하여 그리스도교 강화에 이용하려고 하였다. 그는 목성이 돌아다니며 만나는 혹성을 각각의 종교에 대응시켰다. 7개의 혹성(태양계)에서 목성을 제외한 6개의 별들은 각각 토성은 유대교, 화성은 카르티아인의 법, 태양은 이집트인의 법, 금성은 사라센인의 법, 수성은 그리스도교의 법에 상응한다. 수성의 운행은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문학으로 계산하면, 모든 혹성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렵다.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 정도로 깊이있는 진리를 함유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교가 대응한다. 달은 그 움직임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워 어떠한 법칙에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달은 反그리스도교나 마술, 심령술 등에 대응하는 별이다. 달은 빠르게 움직이므로 이러한 반그리스도적 주술들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충적 사고방식은 14세기에 들어서면서 기독교적 사고가 전사회적으로 확립되는 것과 더불어 강경하게 탄압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홀로스코프를 만들어 점성술과 그리스도교를 결합해보려 했던 체크 다루고리는 1327년 처형당한다.

비슷한 시기 서양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의 열풍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소위 '마녀'라 불리워졌던 사람들은 민간에서 전해져오던 고대의 점성술, 연금술적 지식이나 요법 등을 이용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전승된 지식을 이용하여 간단한 '의약품' 등을 제조하거나, 무속적 방식으로 인간의 미래나 운명을 예언하거나 하였다. 그리하여, 마녀사냥은 전승되어오던 민간 신앙과 그에 뿌리박고 있던 다양한 민간 요법, 소박한 주술적 믿음, 전통적 가치와 신화적 세계 (이는 고대 동양적 전통에 그 기원을 갖는다.)에 대해 카톨릭적 세계관이 벌인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었다. 이를통해 교회는 전 사회에 파급되는 전일적 신앙체계를 개개인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수용시킬 수 있었고, 이단,마녀, 악마적인 것이라 간주된 '탈기독교적' 가치 체계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교회가 이들 탈기독교 세력들을 가려내고 처벌하는 과정엔 중세적 순진성과 결합된 유일 종교적 압박이 어느 정도로 까지 드러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14**년 스트라스 부르크에서 발간된 {마녀의 망치}는 악마나 그의 징표를 받은 마녀를 가려내는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고 있다.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은 자신의 몸에 악마가 내려준 징표를 지니게 된다. 그곳은 바늘로 찔러도 피가 나지 않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곳으로 몸 가운데 털로 감추어져 있거나 머리털 속에 숨겨져 있기도 한다고 믿어졌다. 그리하여, 악마와의 관계가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기 위해 혐의자는 온 몸의 털이 깍이고 바늘로 면밀히 찔러보는 '증거시험'을 견뎌내야 했다. 때로는 혐의자의 팔다리를 묶은 채 물 속에 빠뜨려 보기도 했는데, 그것은 악마의 추종자라면 악마가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단 혐의가 있다고 판단된 사람이 살아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만일, 그가 익사하지 않았다면 그는 악마의 추종자임을 입증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화형에 처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악마의 집회'는 열광적인 춤과 노래, 술마시기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고대 '박카스의 집회'를 연상시켰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이나 강변에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이 집회는 '부두교'인들의 집회-고대 동양적 무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악마집회, 마녀의 행태와 그들의 악행, 마녀 판별방법 등 마녀사냥을 둘러싼 거대한 상징 체계는 사실상 지식인-종교가들의 상징 체계에 다름 아니었다. 혐의받는 자의 체포와 고문, 자백, 마녀로 밝혀진 자에게 부여하는 사회적 상징들 - 그녀들은 악마를 상징하는 고깔과 망또를 걸친 채 대중들 앞에 전시되는 절차를 거친다. - 그들의 화형과 처형에 이르기까지의 시각적, 상징적 이미지들은 종교재판가나 세속 재판가들의 상상적 세계관을 '실재적인 것'으로 전환시켜 실제적인 분노와 경악,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도록 구성되었다.

이러한 마녀 사냥의 열풍을 진정시키게 했던 원인은 중앙 집권적 왕권의 강화과정과 연관되어 있었다. 공동체 단위의 재판관 혹은 사적 형벌의 형태로 존재하던 마녀사냥의 관행이 중앙집권적인 사법적, 정치적 집중화를 추구하려던 왕권 주의자에겐 극복해야 할 절차적 난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악마에게로 퍼져 있었던 처벌/죄의 체계를 왕=국가/ 반역'이라는 체계로 전환시킴으로써 - 그 체계에서 모든 범죄는 '왕의 의지를 거역하거나 훼손하는 것으로, 처벌의 근거를 얻는다. - 중앙 집중화된 권력에로의 한발을 내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