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묵시록, 유토피아 , 사라진 종말

김남시 1999. 9. 12.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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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자연신학은 묵시론의 예언을 자연을 통해 증명하려 하였다. 세계는 하느님이 예시한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 현상들이 그러한 자연적 종말의 과정을 예시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시기는 토마스 모어를 필두로 한 '유토피아론'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종말을 향해가는 세계'와 '보다 나은 세계에의 꿈'은 외면적인 모순관계에도 불구하고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세계에 대한 그 시대의 패러다임을 이뤘다.

에덴동산 이후의 자연 속에서 세계 종말의 증거들을 찾았던 Thomas Burnet은 '성서라는 계시의 책 가운데서 읽은 바를 자연이라는 책 가운데서 확인'하려고 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원죄와 더불어 본래 완벽했던 창조 전체가 저주에 이르게 되었다. 자연의 점진적인 몰락과 폐허로의 진행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며, 또한 이를 통해 세계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알게된다...자양분이 많은 지표의 흙들이 점차 산으로부터 바다로 씻겨나가며 점점 더 잦게 홍수가 오게되고, 바닷가의 땅들도 바다에 의해 점점 더 삼켜지게 되면서 무의미하며 사람이 살수 없는 물에 의해 덮인 늪과 같은 지표면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묵시론적 자연신학은 '종말' 그 자체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종말 이후의 '새롭게 창조된 세계'에 대한 유토피적 기대감을 더 많이 함의하고 있었다. 곧, 역사와 자연의 종말 이후 하느님이 새로운 세계를 세우시리라는 희망과 깊게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새롭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인간의 원죄 이후 타락한 지구를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다. 세계를 멸망시켜 새롭게 건설하겠다는 하느님의 계획은 이미 그가 이 세계를 만들 때부터 의도된 것이었으며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이미 몇 번씩이나 '멸망을 통해 갱신' 해왔다. 노아의 홍수는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적극적 기획의 일부였으며, '소돔시의 멸망'은 한 도시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파괴와 갱신'의 사건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을 통한 새로운 창조'는 미래에 대한 유토피적 기획에 맞닿아있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토마스 모아(1516)와 캄파넬라(1602)의 '유토피아론'들은 종말을 거쳐 이루어질 '새롭고 보다 나은 세계로의 재생'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태양의 나라'의 사람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밤도둑들이 몰래 침범하듯이, 반드시 별안간에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즉, 그들은 이 세상의 재생을 이 세상이 멸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 모아 역시 그의 {유토 피아} 후반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유토피아와의 비교를 통해 사유제도로부터 발생하는 현세의 온갖 부정의를 비판하지만 이는 사유제도에 대한 '현실적 부정'을 위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종말을 통해 완전히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를 위한 것이다.

세계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그 종말은 세계의 완전한 갱신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러한 신의 계획을 '자연 속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유토피아가 도래하는 것은 마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필연적이고 자연적 과정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캄파넬라는 해박한 점성술적 지식을 이용, 별들의 운행을 점성술적으로 해석하면서 종말의 필연성과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예언한다. "토성의 元地點이 마갈座에, 수성의 원지점이 사수좌에, 금성의 그것이 처녀좌에 들어가고, 카시오페이아에서 새로운 별이 출현한 후, 대회합이 다시 제1의 3宮에 되돌아오면, 새로운 대 군주국가가 출현하게 되며 법률과 기술은 개혁되고,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나 일대 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경우 온 세계의 모든 질서는 뒤엎어지고, 세상은 깨끗이 청소되고 새로이 건축되어 전혀 새로운 사회가 출현할 것이다."

병들고 타락해 있는 현재가 종말을 고하고 '보다 나은 세계로 창조' 된다는 생각, 나아가 그러한 과정이 '역사와 자연 가운데로의 어떤 특별한 개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몰락과 퇴락이라는 자연적 과정'을 통해서 수행되리라는 믿음은 유토피아론의 핵심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것이 근,현대의 혁명적 유토피아론과 구별되는 점은 16세기의 유토피스트들이 그 자연적 과정이 결국은 하느님의 계획 하에서 그리스도교적 세계가 실현되는 것으로 곧, '신의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종말 이후의 세계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신의 질서에 의해 보장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캄파넬라는 위에서 언급한 새로운 사회의 출현을 "목성과 태양의 영향하에 신세계 남반부와 아프리카, 아시아 전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것과 관련시킨다. 화성과 달의 영향을 받는 이교도들은 '그 별들의 특성들이 그러하듯이 우연적일 뿐이며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어떤 특정한 종교도 경솔하게 교조화 되지 않는 신앙자유의 원칙이 제도화되어 있"긴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교가 그들이 대부분 믿고 있던 신앙에 가장 흡사"하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을 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교의 "진실성이 폭력이나 위협을 쓰지 않아도 이성적으로 냉철한 검토를 거치는 중 그 자체의 자연적 힘으로 드러나서 승리하게 되는" 과정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유토피스트들에게 있어 종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는 '그리스도 교가 참되게 실현되어 신의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이자 '(신의 질서로서의) 자연의 참된 법칙이 실현'된 유토피아이다.

파괴를 통해 새롭게 건설되는 세계야말로 '자연의 참된 법칙에 적합한, 자연적인 세계'라고 한다면, 그 목표를 위해 파괴, 멸망 되어야 하는 세계는 '반자연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일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의 세계는, 세계의 본원적 자연성이 '인위적, 인공적 개입'을 통해 훼손되고 타락하게 된 세계이다. 자연은 '본래 그대로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며, 인간 역시 자연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참다운 삶을 살 수 있다. 그래서 '태양의 도시' 사람들은 논밭에 일체의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마치 운동으로 생긴 자연미가 아니고 화장으로 얼굴을 예쁘게 하고자 하는 여인이 허약한 자녀를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실과 곡물이 제대로 자라는 땅에 비료를 준다면 도리어 종자가 썩고 땅을 망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토피아 사람들은 자연에 따라 사는 것이 덕이며, 또 신은 그렇게 살도록 인간을 창조했다고 생각"하며 "자연의 가르침을 따라 소망하고 회피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곧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루소에게서 '본원적 자연'이라는 유토피아에로의 상고를 통해 '비자연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탈 종교적 유토피아론의 원형을 본다. 루소에게 인류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일탈함으로써 생겼다. 그가 1754년 디종 학술원에 제출하여 당선된 현상 논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테마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을 자연법이 시인하는 것인가.' 였다. 인간의 자연적 조건이라는 낭만주의적 이상과 역사에 의해서 결정된 현존하는 삶의 현실을 열렬히 대조시킴으로써 루소는 현존현실을 실제적인 당면문제로 만들었다. 현존현실은 인간의 본원적인 자연상태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현재의 모든 문제들의 근원은 인간이 그 원래의 자리로부터 '이탈'해 왔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으로부터의 추방' 이래, 인간의 역사는 고통과 암울의 현실이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인간의 모태로 회귀하라! '인공적으로 이루어져 온갖 고통과 타락을 낳았던 인위적 제도, 관습, 직위를 철폐하여 세계와 인간 본연의 자연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되었고 이리하여, '새로운 창조를 위한 종말'의 묵시론적 유토피아론이 마침내 역사적 사건의 무대에서 물질적 힘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자연의 요구를 억압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위적인 것' 들을 파괴시켰지만, 파괴된 폐허 위에서 새롭게 등장해 온 것은 '그리로 회귀해야 할 자연'이 아니라 추한 혼란 뿐이었다. 자, 파괴는 이루어졌다. 이제 어떻게 신이 도움없이 '에덴동산의 자연'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 파괴가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졌듯, '낙원' 역시 우리가 건설해야 한다면, 누가 우리가 파괴시킨 것보다 '더 나은 질서'를 건설할 것인가? 민중인가? 민중은 위대하지만 또 무질서하기도 했다. 바리케이트를 지키는 민중들은 혁명적 영웅이었지만 '냄새나는' 영웅 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천하기 짝이 없었고 주고받는 말도 어리석었고 땀이 내밴 이마에는 바보같은 만족감이 서려있었다.' 왕궁을 접수한 "민중은 복수하려는 생각보다 오히려 자기가 소유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거울이며 커튼, 샹들리에, 촛대, 테이블, 의자, 둥근걸상, 가구란 가구는 모두, 뿐만 아니라 화첩이며 스푼에 이르기까지 부수고 찢었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이상 맘껏 소란을 피워도 상관없지 않은가" 천박한 사회주의자들이 건설되어야 할 '자연의 이념'을 제시해줄 수 있는가? "마블리니 모델리니 푸리에니 쌩시몽이나 꽁트니 까베니 루이블랑 같은, 짐마차에 하나 가득 싣고도 남을만큼 많은 사회주의자들, 즉 인류를 위해서는 병영생활 정도의 생활수준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매음굴에서 기분을 풀게하고 계산대 위에 꼬꾸라지게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정치인들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적어도 지금까지 4개의 정부를 섬기어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재산을 보호하고 불쾌며 곤궁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면, 아니 권력을 본능적으로 숭배하는 비굴한 근성으로도 프랑스를 서슴없이 팔 사람들이었고 인류조차 서슴없이 팔아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입을 모아 정치상의 범죄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플로베르 {감정교육} 중)


신이 사라진 유토피아에는 '에덴동산'이 존재할 수 없었다. '하느님의 질서'가 그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자연적인 것'과 그것을 타락시킨 '인위적인 것'을 구분해 낼 수 없다. 에덴동산에 심어둔 무화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의 원죄'이자 '타락'의 출발일 수 있는 것은 신이 계율이 그것을 금지했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그의 부인은 신에 의해 금지된 '인위적' 욕구를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자연'으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런데, '금지하는 신의 계율'이 없다면 우린 어떻게 '자연의 필요'에서 오는 욕구과 '인위적 습관'에서 기인한 욕구를 구분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에밀의 식사나 잠자는 시간을 정확하게 정할 경우 일정한 시간이 되면 요구하는 버릇을 만들어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이내 욕구는 자연적 필요에서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오게"될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즉자적인 요구를 모두 들어주어서도 안된다. 우린 "진짜 필요, 즉 자연에서 오는 필요인지, 오직 생명의 과잉에서 오는 필요인지를 잘 구별해야 한다. 아이의 욕망은 그것이 '자연의 필요에서 오는 욕망'일 경우에만 응해주어야 한다. 과잉의 '인위적 욕망의 충족'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을 낳아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루소는 인간의 불행이 '욕망과 그것을 채우려는 능력과의 불균형'에서 생기며 그러한 결핍에 의해 인간은 고통을 느낀다'고 말한다. (루소 {에밀} 중) 그렇다면 인간의 고통엔 2가지 종류가 있다. '자연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함으로써 오는 고통과 '인위적 욕구'로부터의 고통.

허나, 그 고통이야말로 혁명의 원동력이 아니었는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욕망과 그것이 충족되지 않는 고통은 고난에 가득찬 역사속에서 '그것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이 아니였던가. 루소는 그러나,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에 맞서'기 보다는 아예 날개를 접어버리기를 택했다. "현실세계와는 달리 상상의 세계는 무한하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더 넓힐 수가 없으므로 상상력을 좁혀야 한다. 우리를 참으로 불행하게 하는 모든 고통은 오로지 현실과 상상이라는 이 두세계의 부조화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으로 돌아간 인간'은 그곳에서 자신의 안전한 보금자리를 얻는다. "인간은 자기의 현재 처지에 만족하고 있음을 알 때 아주 강하고, 인간이상의 것이 되려고 할 때 오히려 가장 약하게 된다." 너의 처지에 만족하라, 그것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루소는 이러한 귀족적 낭만주의를 계몽주의와 결합시켜 정치적으로 다룬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의 목가적 자연관은 낭만주의적 자연에 대한 정치적 해석에 다름아니다. 루소의 사상에서부터 출발하였던 프랑스 계몽주의의 말로가 역사와 현실에 대한 환멸로 귀결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소망하였던 '자연적인 것'을 위한 싸움의 결과는 결코 자연적인 것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환멸은 또다시 낭만에로의 집착을 낳는다. 그러나, 이때의 그것은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는 외면으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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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적인 것/인위적인 것'의 변증법은 그것을 판가름해 줄 초월적 존재의 개입없이는 '환멸'의 악무한으로 빠져들 뿐이다. 극복해야 할 '자본주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고, 도래할 '사회주의'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것이였는가? 도대체 이를 누가 보장해 주는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가, 성공한 혁명이, 아니면 '항상 승리하게끔 되어있는 '역사적 유물론'이라 불리는 인형이? '초월적 신'의 자리에 대신 들어선 '역사의 법칙'은 역사 자체를 이끌어 내지 못했고, 그리하여 끌어내려진 레닌동상처럼 추락하였다. 이제 '자연적/인위적'이라는 오랜 범주짝은 몰가치적으로 시간이라는 척도만을 갖는 '옛것/새것'의 변증법으로 대체되었다. '옛것'은 '새것'에 의해 대체되어지나, 그것이 반드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새것'이 '옛것'을 대체했다고 해서 반드시 전자가 후자보다 '더 나은것'은 아니다. 그건 단지 그렇게 대체 되어졌을 뿐이다. 그러나, 우린 최소한, 아니면 어쩔수 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는 있다. '옛것'이 '새것'으로 대체되어가는 과정이 반드시 어떤 목적이나 종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나, '옛것'에 머물러 '새것'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사람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미국의 유명한 X세대 대변자가 보기에 '옛것'이 '새것'에 의해 대체되는 것은 생명의 진화과정에 다름아니며, 명백하게도 '새것'은 '옛것'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이다. 그에게 '지구 온난화, 인종갈등, 근본주의자들의 득세, 핵무기, 세균성 돌연변이, 제3세계 소요, 도시의 부패, 도덕의 붕괴, 종교의 부패, 마약 중독, 관려제의 경직성, 생태계 문제, 에이즈, 자원고갈 등'을 세계 종말의 징후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당연한 인류의 새로운 진화과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낡은 일신교적 집착에 빠져있는 자이다. 문화를 포함한 전 인류는 지금 '한 생물종의 돌연변이에 비견할 만한' 새로운 진화의 단계를 거치고 있다. 이는 우리가 생명의 진화과정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수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복잡성의 방향으로, 즉 생명의 작은 부분들이 좀더 크고 상호 연결된 전체로 결합함으로써 높은 수준의 질서에로 진화해왔다. 원자가 분자로 조직되고, 분자는 다시 보다 복잡한 유기사슬로 조직되며, 그것이 다시 최초의 단일세포 생명체로 발전하고 나아가 좀더 복잡한 세포들을 거쳐 유기체로 발전해 나간다. 이 유기체는 떼를 지어 무리를 만들며, 인간의 경우에는 사회와 문명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진화의 각 단계는 그에 상응해 개별 구성부분이 좀더 큰 전체로 통합되는 계기가 존재하며, 더 큰 유기체는 일반적으로 이전의 상태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인지성과 복잡성을 지니게 된다."( Douglas Rushkoff {카오스의 아이들} 중)
이처럼 "진화가 물질이 좀더 높은 단계의 복잡성과 더 큰 인지 범위를 향해 가는 과정이고, 개별적인 것을 최대한 개발해서 그것들을 새롭고 네트워크화된 존재로 결합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을 수용할 수 있다면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해진다. 우리는 새로운 군체적 생명형테로 진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전화, 텔레비젼, 라디오, 팩스, 모뎀, 인테넷, 케이블 텔레비젼, 월드 와이드 웹 등 이 모든 발명품들은 인류가 접해야할 아이디어와 이를 통해 접촉하게 되는 사람의 수를 증가시키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끊임없는 발전에 상응해서 우리가 대처해야 할 사상의 수효도 비약적으로 증가한다. 이러한 네트워크 기술의 발달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새로운 군체적 형태로 결집시켜내고 진화의 방향을 제시한다. (21세기 인류의 진화는 생물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진화과정은 '자신의 개인성, 사생활, 전반적인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문화에 속한 (낡은) 사람들'에게는 불안하고 혼동스러울 세기말적 징후로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 오늘날의 <스크린 세대>들(새로운 존재들!)은 이미 '조상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극적으로 변화된 방식으로 이 진화하는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들이 즐기는 머그게임, 디지털 통신, 인터넷 서핑, 전자오락과 애니메이션, 스노우 보딩 속에서 그들은 이 진화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를통해 새로운 진화단계로 돌입한 '인류의 미래'를 보여준다. 우린 그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사실상 우리가 세계의 종말을 넘어서 나아가려 한다면, 그들처럼 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이 거대한 낙관론이 근거하고 있는 '21세기의 자연신학'이 있다. 그것은 {가이아}와 {카오스}이다.


자연적/인위적, 그리하여 '타락하고 쇠락하여 멸망되어야 마땅한 것'과 '보다 나은 새로운 것'의 구분을 보장해 주던 '초월적인 신'의 잣대가 상실된 이후, 우리는 한동안 다시 등장한 20세기의 어두운 묵시론적 이미지에 시달려야 했다. 거기엔 핵전쟁으로 인해 파멸한 인류의 후손들이 짐승 가죽을 입은 채 소리지르며 살아가고 있었고,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의 폐허위에서 원숭이들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원숭이들에게 사냥되는 얼마남지 않은 인간종은 저 끔찍한 1만년전의 역사의 순환을 구석기시대부터 반복해가고 있었다. 냉전시대 우리의 뇌리를 지배하던 20세기 묵시론의 이미지가 16세기의 그것과 다른 점은 멸망 이후 '보다 더 나은 세계로의 새로운 창조'가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이 절망적 묵시록이 그 어떤 '유토피아적 기획'으로도 연결되지 못하게 하였다. memento nuclear! 인류는 다만 그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가이아}와 {카오스}는 21세기를 향한 이 시대의 자연신학으로 등장하였다. 그것은 지구는 결코 인류가 원숭이의 사냥감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며,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을 우호적인 초록빛 별 지구의 그림으로 바꾸어 놓는다.

바닷가에 '모래성'이 '모래더미'와 구별되는 것은 전자가 어떤 생명체의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만들어진, '평형상태에서는 존재불가능한 분자 집합체'라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린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발견한다면 필경 그것이 어떤 생물체나 생명체의 산물임이 분명하다고 안다. 이와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전지구적 규모에서 '평형상태에서는 존재불가능한 분자분포'를 발견해 낸다면 이는 전 지구적 규모에서의 '생명체'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J. E. Lovelock {가이아 - 생명체로서의 지구} 중) '가이아'는 이렇게해서 '발견'된다. 그것은 '생물이 살기에 적당하도록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균형을 조절하는 자가조절 시스템'이다. 현재 대기조성물의 상태가 '평형화학의 일반원리를 거역하면서도 지금처럼 유지되고 있는 것은 그 상태가 생물이 살기에 유리한 조건이기 때문'이며, 지구에 생명이 처음 나타난 35억년전 이래로 지구 표면의 온도가 현재 온도를 중심으로 불과 몇도 차의 범위 내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 역시 지구상의 생물의 생존을 위해 가이아라는 복합적 실재가 지구의 온도를 적당하게 유지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온도가 외부 기온의 수시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당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우리 몸 속의 협동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이며, 바닷물의 염분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어 생물들이 살 수 있게하는 메카니즘 역시, 무생물적 조건에서라면 화학적 평형상태에 도달하였을 것을 생물의 생존을 위해 유지시킨 '가이아'의 덕분인 것이다.
이러한 지구위에서라면 인간은 지구의 미래와 환경오염, 핵전쟁의 귀결에 대한 종말론적 불안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환경오염이란 개념은 매우 인간 중심적인 것이다. 자연은 인간이 배출하는 것보다 더욱 유독하고 독성이 강한 물질들을 이미 제조, 발산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오염물질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다소간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있는 것"이며 그것은 '생물계를 위협함이 없이 이미 처리되고 있다.' 오히려 '적당한 대기오염은 생물에게 해로운 오존층이 너무 두터워지는 걸 방지하기도 한다.' 나아가, 인류의 어두운 묵시론적 미래의 저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핵'에 의한 자멸의 이미지 역시 가이아의 범지국적 조절 시스템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 폭탄의 반 가량 - 1만 메가톤 - 이 핵전쟁에서 사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류와 인류가 이룩한 인공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며, 30년 이내에 그 영향은 간과할 수 있을 정도로 까지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지구상에서 인류는 결코 완전히 멸망해버리지 않을 것이다! 냉전시대의 세계를 지배하던 묵시론적 이미지에 저 어마어마한 낙관론적 이미지 (21세기에 다시 불려나온 에덴동산)가 맞선다.

한편, {카오스}는 최소한 지금의 혼돈이 질서있고 안정적이던 세계의 종말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혼돈이 '자연의 비선형적 구조의 본질'임을 주장하며 우릴 안심시킨다. 모든 것은 무질서하고 불규칙한 것에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종말을 향한 혼돈'인가? 아니다. 그것은 정태적인 낡은 패러다임에 집착하는 자들에게만 그러할 뿐이다. 카오스의 본질은 그러한 "불안정성과 불규칙성이 카오스의 보편법칙에 따른다."는 데에 있다.( James gleick {카오스}
) 낡은 환원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카오스적 패러다임을 선택한 이들에게 자연은 그 모든 불규칙성까지 포함하여 자신의 비선형적 구조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카오스는 종래에는 그 불규칙성으로 인하여 예측할수 없었던 분야와 대상들에 까지 그 예측성을 보장해 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그들은 카오스를 받아들이는 것을 '개종 혹은 전향'이라고 부른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취하라, 그러면, 세계의 혼돈이 종말의 예시가 아니라 세계의 은밀한 곳을 들여다볼수 있는 '만화경'임을 알게 될 것이다.

'카오스'와 '가이아'는 현대를 위협하던 묵시론적 그림을, 혼란스럽게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계속해서 지속될 편안한 세계의 상으로 대체시켰다. 이제 우리의 세계는 어떠한 종말이나 묵시론적 단절없이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 인류에게 행복한 미래를 영위케 해 줄 것이다. 21세기의 낙관적 자연신학인 '카오스'와 '가이아'가 어떠한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지니는가, 이것이 어떠한 형태로 인간의 자연지배를 정당화하는가를 따져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15,16세기의 자연신학이 '자연' 속에서 신의 계시와 말씀을 읽어냄으로써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봉사했듯이, 21세기의 자연신학 역시 인류의 뇌리로부터 종말의 미래라는 음화를 쫒아냄으로써, 과격한 환경보호론자들을 싫어하는 다국적 기업의 입장을 대변할 수도 카오스적인 디지털 문화를 생산, 유통해내는 실리콘 벨리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해 줄 수도 있다. 어쨋든 다분히 의심스러운 21세기의 자연신학으로부터 우린 행복의 환상으로 가득찬 '종말' 없는 미래와 동질적인 시간을 물려받았다.

'구원'은 '종말'을 통해 이루어진다. 고통스런 역사를 겪어야 했던 유대민족의 성서가 '멸망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는 세계'에 대한 예언으로 종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무지개가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의 징표인 것처럼,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에게 '묵시록'은 그 구원을 보증하는 하느님의 약속인 것이다. 우리의 현재가 고통스런 과거시간에 의해 '구원'으로써 기대되었다면, 그리하여 '과거의 인간과 현재의 우리들 사이의 은밀한 묵계'가 우리들의 현재 속에 흐르고 있다면, '구원'은 동질적인 역사의 연속성의 파괴 속에서만 얻어질수 있다. 동질적 시간의 연속성을 폭파하려는 것 속에 구원의 메시아로서 '혁명'이 살아남는다.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의식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의 혁명적 계급에 고유한 것이다."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을 '지금시간(Jetztzeit)'에 의해 충만된 시간으로 만들기 위해선 현재의 정지, 곧 종말이 요구된다. 그래서, '혁명'은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가 된다.(발터 벤야민 {역사철학 테제} 중) "(역사적 유물론자는) 사건의 메시아 정지의 표식, 달리말해 억압된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과정을 폭파시켜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기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 과거를 인지한다." 그런데, 21세기의 자연신학은 우리로부터 '종말'을 탈취하고 의심스럽게 보장된 동질적이고 공허한 평온을 안겨다 주었다. '종말후의 새로운 창조'를 약속하던 신이 떠나고, 이제 그 '종말'마져 보장되지 않은 인류에게는 "과거의 진정한 상, 우리의 현재에 걸었던 구원에의 기대는 현재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우리 앞에 놓인 건 저 지긋지긋한 동질적인 시간의 연속, 현재를 향해 외쳐진 과거의 목소리도 미래를 향한 구원의 소망도 흡수될수 없는 무표정하고 매끈한 현재의 몸통 뿐. 21세기의 멜랑코리커는 그 단단한 현재의 몸통에 갇혀 "옛날 옛적이라고 불리우는 창녀에게 정력을 탕진하고 있는" 이들이며, 그들은 '종말'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종말의 부재'로 인해 고통스러워 하는, 그 어느시대의 것보다 위독한 우울을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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